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다 ( 672년 0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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築漢山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歩.
한산주(漢山州)註 001에 주장성(晝長城)註 002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였다.註 003
주
註) 001
한산주(漢山州): 지금의 경기도와 충청도의 일부를 다스렸던 신라의 행정구역이다. 진흥왕 14년(553)에 신주(新州)가 설치된 이래, 북한산주(北漢山州), 남천주(南川州)로 바뀌었다가 북한산주로 다시 불렸으며, 그 뒤 한산주로 불렸다. 이곳은 한성기(漢城期) 백제의 왕성이 있던 곳이고 475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의 침입으로 한성(漢城)이 함락되면서 고구려가 이곳에 한산군(漢山郡)을 설치하였다. 이후 551년에 백제의 성왕(聖王)이 이곳을 회복하였으나 553년에 신라의 진흥왕이 빼앗아서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신주의 주치 및 정군단(停軍團)의 주둔지는 오늘날 경기도 이천시에 해당하는 남천(南川)이었다. 진흥왕 18년(557)에 주치와 정군단을 지금의 강북 지역에 해당하는 북한산(北漢山)으로 옮겼다. 이것이 본서에는 신주를 폐지하고 북한산주를 신설한 것처럼 기록되었다. 선덕왕 6년(637)에 신주를 분할하여 우수주와 한산주(漢山州)를 설치하였다는 견해(전덕재, 2001 「신라 중고기 주의 성격 변화와 군주」, 『역사와 현실』 40)가 있고, 경덕왕 16년(757)에는 한산주를 한주(漢州)로 개칭하고, 1소경(小京), 27군(郡), 46현(縣)을 영속(領屬)케 하였다.
* 주치(州治) : 주 행정관청 소재지. 정군단이 주둔한 곳
* 정군단(停軍團) : 신라 왕경인 출신의 군사로 구성된 지방 주둔군
註) 002
주장성(晝長城): 지금의 남한산성(南漢山城)을 가리킨다. 2006년 남한산성 행궁지(行宮地) 발굴조사에서 대형 건물지와 대형 기와가 발굴되었는데, 이는 672년에 축성된 주장성의 창고건물로 추정되고 있다(심광주, 2012, 150쪽). 현재 남한산성 외성(外城)과 옹성(甕城)을 제외한 원성의 둘레가 7,545m인데, 이는 4,360보라는 수치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 따라서 한산주(漢山州)의 주장성은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볼 수 있다(박성현, 2012, 44~45쪽). 대형 산성의 경우 축성기간이 수년에 걸치므로, 672년에 완성된 주장성은 나당전쟁이 개시되면서 축조되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이상훈, 2016, 84~85쪽).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제6 경기도 광주목(廣州牧) 고적조(古跡條)에 “日長山城(일장산성) 卽新羅時晝長山城(즉신라시주장산성) 文武王所築(문무왕축) 內有六井及溪(내유육정급계) 周八万六千八百尺(주팔만육천팔백척) 高二十四尺(고이십사척) 石築(석축)”이라고 전한다.
〈참고문헌〉
박성현, 2012, 「신라 통일기 주·소경의 성곽과 그 활용 -한산주와 국원소경을 중심으로-」, 『한국성곽학보』 21
심광주, 2012, 「주장성(晝長城) 축성기술과 남한산성」, 『한국성곽학보』 21
이상훈, 2016, 「나당전쟁기 신라의 대규모 축성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23
註) 003
한산주(漢山州)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는데 둘레는 4,360보(步)였다: 672년 8월에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크게 패한 신라는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진행하였다. 석문전투 이후 2년 내에 축조된 성은 11개에 달한다. 새롭게 축성이 이루어지면서 주요 요충지에 대한 방어망이 완비되었다고 볼 수 있다(차용걸, 2008, 185쪽). 새롭게 축조된 성들로만 방어망이 설정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성들과 연계하여 방어선이 설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산성은 침략군의 진군 시간을 지체시키고 군수품 보급을 저지할 수 있는 주요 수단이다. 전략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산성을 그냥 지나칠 경우 보급로의 위협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으며, 일일이 다 점령하면서 진군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소모된다(서영교, 2006, 157쪽). 신라의 제1방어선은 당군과 경계를 이루던 임진강이었으며, 칠중성이 거점성 역할을 하였다고 보인다. 그 후방은 한강을 중심으로 제2방어선을 설정해 볼 수 있는데, 제2방어선의 거점성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주장성이었다(이상훈, 2016, 86~87쪽). 신라가 주장성을 축조한 것은 임진강 방어선이 붕괴될 경우를 대비해 한강 방어선을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서영교, 2006, 『나당전쟁사 연구』, 아세아문화사
차용걸, 2008, 「신라 석축 산성의 성립과 특징」, 『석당논총』 41
이상훈, 2016, 「나당전쟁기 신라의 대규모 축성과 그 의미」,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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