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말갈·거란의 군사와 아홉 번 싸워 물리치다 ( 673년 09월(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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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兵與靺鞨·契丹兵, 來侵北邊, 凢九戰, 我兵克之, 斬首二千餘級, 唐兵溺瓠瀘·王逢二河, 死者不可勝計.
 
당나라 군사가 말갈(靺鞨)註 001과 거란(契丹)註 002의 군사와 함께 와서 북쪽의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무릇 아홉 번 싸워서 우리 군사가 이겨 2천여 명을 목 베었다. 당나라 군사 중에서 호로(瓠瀘)註 003와 왕봉(王逢)註 004 두 강에 빠져 죽은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註 005

 

 

 
 
註 001  말갈(靺鞨): 말갈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5 신라본기제5 선덕여왕 12년 9월조 참조.
 
말갈(靺鞨): 만주(滿洲) 동북 지역에 거주하던 고대 종족으로 후대의 여진족(女眞族), 만주족(滿洲族)으로 계통이 이어진다. 선진(先秦) 시기부터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로 불리다가, 현존 사료상으로는 『북제서(北齊書)』 무성제기(武成帝紀) 하청(河淸) 2년(563)의 기사에 처음 말갈(靺鞨)로 등장한다. 본래 여러 부족집단으로 나뉘어져서 각각 추장이 통솔하였고 당나라 시기에는 흑수말갈(黑水靺鞨)과 속말말갈(粟末靺鞨) 2부가 강성하였다(金賢淑, 2003, 「6~7세기 高句麗史에서의 靺鞨」, 『강좌 한국고대사 10』,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註 002  거란(契丹): 내몽골 싱안링/흥안령(兴安岭/興安嶺) 기슭의 송모/송막(松漠) 지역에서 발흥한 종족 집단이다. 거란의 계통에 대해서는 퉁구스족, 동호족, 선비족, 몽골족, 몽골과 퉁구스의 혼합이라는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이 중에서 우문(宇文)·고막해(庫莫奚)와 함께 선비(鮮卑)로부터 나왔다는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유목을 위주로 하다가 점차 농업을 병행하게 되었으며, 주변 강대 민족의 성쇠에 따라서 변동을 겪었다(정구복 외, 2012, 『개정증보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당나라 말기에 통일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916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거란을 건국하였다.
*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 에뤼 아바오지
 
註 003  호로(瓠瀘):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 7월 26일조 호로하 항목 참조.
 
호로하(瓠瀘河): 호로하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에 위치한 호로고루(瓠瀘古壘) 근처를 흐르는 임진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호로하와 관련하여 표하(䕯河), 과천(瓢川), 표천(瓢川)이라는 표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중(中)조에는 662년에 김유신이 평양성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소정방의 당군에게 군량을 공급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표하(䕯河)를 건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695년(효소왕 4) 무렵에 건립한 김인문비(金仁問碑)에는 김유신과 김인문 등이 호로수(瓠盧水)를 건넜다고 되어 있으며,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조에 전하는 「답설인귀서」에서는 호로하(瓠瀘河)를 건넜다고 되어 있다. 「답설인귀서」에서 고구려(高句麗)를 고려(高麗)라고 표현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후대에 「답설인귀서」의 내용을 개서하지 않았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답설인귀서」는 671년 당시에 김유신 등이 고구려에서 돌아올 때에 건넌 강을 호로하(瓠瀘河)라고 불렀음을 알려주는 유력한 증거자료로 볼 수 있다. 『자치통감』 권제202 당기제18 고종 함형 4년(674) 윤5월조에도 이근행이 고구려부흥군을 호로하(瓠蘆河)의 서쪽에서 물리쳤다고 전한다. 그런데 본서 권제6 신라본기제6 문무왕 2년 2월 기록에서는 김유신 등이 고구려에서 돌아올 때에 건넌 강을 과천(𤬁川)이라고 표기하였다. 한편 본서 권제10 신라본기제10 흥덕왕 3년 4월조에 “한산주 과천현(瓢川縣)의 요망한 사람이 스스로 이르기를, ‘빨리 부자가 될 수 있는 비법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홀렸다.”고 전한다. 이 기록을 주목하면 과천(𤬁川)은 표천(瓢川)을 전사과정(轉寫過程)에서 오기(誤記)한 것으로 짐작된다. 마찬가지로 표하(䕯河)와 과천(瓢川)은 같은 강을 가리킨다고 보이는데, 본서 신라본기 흥덕왕 3년 4월조를 통해 9세기 전반 흥덕왕대에 호로고루 근처를 흐르는 임진강을 표하(䕯河) 또는 표천(瓢川)이라고 불렀음을 추론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670년대에 호로고루 근처를 흐르는 임진강을 호로수(瓠盧水)(호로하/瓠瀘河, 호로하/瓠蘆河)라고 부르다가, 9세기 전반 흥덕왕대에 표천(瓢川)(표하/䕯河)이라고 불렀다고 정리할 수 있다. 김유신열전의 기록에 전하는 표하(䕯河)의 경우, 기본 원전에는 본래 호로하(瓠盧河/瓠瀘河)라고 기술되어 있었으나 9세기 전반 무렵에 이것을 표하(䕯河)라고 개서(改書)하였고, 김장청이 이와 같이 개서한 표현을 그대로 수용하여 김유신행록에 반영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전덕재, 2020, 「김유신열전의 원전과 그 성격」, 『사학연구』 139).
* 개서 : 새로 고쳐 씀
* 전사(轉寫) 글이나 그림 따위를 옮기어 베낌
 
註 004  왕봉(王逢): 본서 잡지제4 지리2 한주 한양군조에 “우왕현(遇王縣)은 본래 고구려 개백현(皆伯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고려]의 행주(幸州)이다.”라고 전한다. 또한 본서 권제37 잡지6 지리4 한산주 왕봉현(王逢縣)조의 세주(細注)에 “또는 개백(皆伯)이라고도 하였다. 한씨(漢氏) 미녀가 안장왕(安臧王)을 만난 곳이므로 왕봉(王逢)이라고도 하였다.”라고 전한다. 이를 통해 우왕현을 왕봉현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우왕현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행주내동·외동 일대로 비정된다. 따라서 왕봉하(王逢河)는 고양시 일대를 흐르는 한강을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 있다.
 
註 005  당나라 군사 중에서 ……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호로하는 임진강, 왕봉하는 한강의 일부로 비정되고 있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모두 강 하류로서 걸어서 건널 수 없는 지역이다. 673년 9월의 호로·왕봉하전투에 앞서, 철천(徹川)이 수군을 이끌고 서해를 진수(鎭守)하였고, 이후 신라군과 당군의 전투가 임진강과 한강 하류 일대에서 벌어진 점을 통해 볼 때, 이때의 말갈과 거란의 군사를 수군으로 볼 여지도 있다(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60, 473쪽). 말갈과 거란의 군사가 수군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강을 도하하거나 하류를 통해 상륙하는데 있어 당 수군의 협조가 뒷받침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이상훈, 2012, 126쪽). 672년 8월에 발생한 석문전투 이후 신라와 고구려 부흥세력은 예성강, 임진강, 한강 유역에서 당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구당서(舊唐書)』 권제5 고종본기(高宗本紀) 함형(咸亨) 3년조와 4년조에 따르면, 672년 겨울에 고간(高侃)은 횡수(橫水)에서 신라군을 격퇴하였고, 673년 윤5월에 이근행(李謹行)은 호로하(瓠蘆河) 서쪽에서 고구려 부흥세력을 격파하였다고 전한다. 672년 12월에서 673년 윤5월 사이에 고구려 부흥세력의 거점이었던 한성(漢城: 옛 황해도 재령)은 함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임기환, 2004, 333~334쪽). 673년 호로하전투 이전에는 고구려 부흥세력과 신라군이 협조하여 함께 당군에 맞섰으나, 이제는 고구려 부흥세력이 거의 소멸하게 되어 신라군이 단독으로 싸우게 되었던 것이다.
* 진수(鎭守) : 군대를 주둔하여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을 지킴
 
〈참고문헌〉
임기환, 2004, 『고구려 정치사 연구』, 한나래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 1960, 「고구려멸망후 유민의 반란 및 당과 신라의 관계(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 『만선사연구(滿鮮史硏究) -상세편(上世篇) 제2책(第二冊)-』, 요시카와/길천홍문관(吉川弘文館)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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