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rp070313830001



국내성

삼국유사 키워드사전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都城).


국내성 서남벽과 치



일반정보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都城)이다. 국내성이 지금의 어느 곳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한때 이견이 분분했지만, 현재는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현성(縣城)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문정보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都城)이다. 『삼국유사』『삼국사기』등 관련 자료에 따르면 고구려는 유리왕 22년인 서기 3년에 도읍을 졸본(卒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겼다고 한다. 국내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한 때 이견이 분분했지만, 현재는 중국의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 있는 집안현성(輯安縣城) 또는 통구성(通溝城)이라고 불리었던 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성은 압록강 중류지역의 북쪽에 위치한 통구분지(通溝盆地)의 서쪽 끝에 있는데, 성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는 용산(龍山), 북쪽에는 우산(禹山), 서쪽에는 칠성산(七星山),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있어, 배산임수(背山臨水)하는 형세의 천험(天險)의 요새(要塞)를 이루고 있다. 성은 현재는 그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아직도 북쪽과 서쪽의 일부 지역에서 벽체가 잘 남은 곳을 볼 수 있다. 내·외벽을 잘 다듬은 장방형(長方形)의 돌로 쌓은 석축성(石築城)으로 평면은 거의 네모꼴이며, 둘레는 2,686m에 달한다.


성문은 여섯 곳이 있고, 성안에는 남북을 관통하는 도로와 동서를 가로지르는 2개의 도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도로에 의하여 성내는 크게 6개의 구역으로 구분되는데, 북쪽의 두 지역은 왕궁이 위치하고, 중앙의 동서 구역에는 관청이, 그리고 남쪽지역에는 일반 백성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李殿福/리덴푸·孫玉良/쑨위랑, 1990)


성의 외면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雉)가 있고, 또 성문마다 옹성(甕城)을 가진 것으로 보여 고구려 성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성벽의 발굴 결과 석축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토성이 존재했음이 확인되었다.


국내성은 평상시에 거주용으로 사용되었고 유사시에는 성의 북쪽 2.5㎞ 지점에 있는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피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은 현재 중국학계에서는 사서에 나오는 환도성(丸都城)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학계에서는 환도(丸都)란 산의 명칭인데 중국측 사서에서 오해하여 왕도(王都)의 명칭으로 사용했다고 하거나,(田中俊明/다나카 도시아키, 1989) 유리왕 3년의 국내(國內)로의 천도기사를 인정하지 않고 산상왕대에 비로소 압록강유역의 집안지역으로 천도했다고 주장하는데,(武田幸南/다케다 유키오, 1989) 이것은 고구려의 초기왕계를 부인하고, 『삼국지』권30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조에 나오는 “更作新國”(경작신국)을 근거로 산상왕을 고구려의 실질적 시조로 보아, 환도성(丸都城)이 곧 국내성(國內城)과 동일한 장소이거나 동일한 성으로 보았던(白鳥庫吉/시라토리 구라키치, 1914) 일본학계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런데 소판차령(小板岔嶺)에서 「관구검기공비(毌丘儉紀功碑)」가 발견되면서 이곳에서 가까운 산성자산성을 환도성(丸都城)이라고 보는 설이 유력하게 되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의하면 고구려의 수도는 졸본-국내-환도-평양-환도-평양동황성-평양-장안성으로 옮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장수왕 15년(427)년에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이전에는 기본적으로 『삼국사기』 지리 4에 졸본-국내-평양-장안성으로 천도지가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모두 국내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주류이다.


『삼국사기』권13 고구려본기 유리왕 22년(3)조에는 “왕은 국내에 천도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王遷都於國內 築尉那巖城)”라고 하여 위나암성(尉那巖城)이 등장하는데, 이 위나암성도 환도성(丸都城)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이에 대하여 관구검기공비의 발견위치가 소판차령(小板岔嶺)이 아닌 대판차령(大板岔嶺)이라고 하여 이에 가까운 집안현(集安縣) 패왕조촌(覇王朝村)에 있는 패왕조산성(覇王朝山城)을 국내위나암성(國內尉那巖城)이라고 보고, 환도성으로의 천도는 산상왕(山上王)대라고 보는 반론이 있었다.(孫進己/쑨진지, 1982). 하지만 위나암성과 환도성은 발음의 완급에 의한 차이일 뿐 동일한 것을 가리키며, 산성인 위나암성=환도성(산성자산성)과 평지성인 국내성(집안현성)으로 나누어 보는 견해가(李殿福.리덴푸·孫玉良쑨위랑,1990) 현재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평지성과 산성으로 구성되어 있는 고구려의 전통적인 도성의 구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국내성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에도 평양과 한성(漢城)과 더불어 고구려 삼경(三京)의 하나였으며, 연개소문 사후에 권력을 빼앗긴 남생(男生)이 국내성을 근거로 동생인 남건(男建)·남산(男産)과 대항하려 한 사실에서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중요한 성으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白鳥庫吉, 1914, 「國內城及丸都城考」『史學雜誌』25-4·5.

關野貞 , 1914, 「國內城及丸都城の位置」『史學雜誌』25-11.

池內宏, 1938, 『通溝』上, 日滿文化協會.

三品彰英, 1951, 「高句麗王都考」『朝鮮學報』1.

이병도, 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集安縣文物保管所, 1984, 「集安高句麗國內城的調査試掘」『文物』 1984-1.

魏存成, 1985, 「高句麗初·中期的都城」『北方文物』1985-2.

田中俊明, 1989, 「集安-朝鮮古代の王都を訪ねふ-」『NHKラジオ안녕하십니까?』

武田幸南, 1989, 『高句麗史と東アヅア』, 岩波書店.

李殿福· 孫玉良 공저, 강인구· 김영수 공역, 1990,『高句麗簡史』, 삼성출판사.

차용걸, 1993,「高句麗 前期의 都城」『國史館論叢』48.



관련원문 및 해석


第二 琉璃王 [一作累利 又(孺)留 東明子 立壬寅 理三十六年 姓解氏] 癸亥 [移都國內城 亦云不而城]


제2 유리왕 [또는 누리, 유류라고도 한다. 동명의 아들이다. 임인년에 즉위하여 36년간 다스렸다. 성은 해씨이다] 계해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겼는데 불이성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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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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