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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 도읍 흘승골성과 졸본 ( 기원전 3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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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초기 도읍 흘승골성과 졸본 ( 기원전 37년 )


按通典云, “朱䝉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髙爲氏.” 古記云, “朱䝉自扶餘逃難, 至卒本.” 則紇升骨城·卒夲 校勘 002 似一處也. 漢書志云, “遼東郡, 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鎮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玄菟郡, 距洛陽東北四千里, 所屬三縣, 髙句麗是其一焉.” 則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亰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髙句麗是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景 校勘 003,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校勘 002 정덕본에는 本이 夲으로 되어 있다.

校勘 003 정덕본에는 景으로 되어 있으나, 《요사(遼史)》 38 지리(地理) 2에는 京으로 되어 있다.



고구려 초기 도읍 승골성과 졸본 ( 기원전 37년 )


살펴보건대 《통전(通典)》에서 이르기를 “주몽(朱蒙) 註 001이 한(漢) 건소(建昭) 註 002 2년(기원전 37년)에 북부여(北扶餘) 註 003로부터 동남쪽으로 나아가 보술수(普述水) 註 004를 건너 흘승골성(紇升骨城) 註 005에 이르러 자리를 잡고 국호를 구려(句麗)라 하고 ‘고(高)’로써 성씨를 삼았다”라 하였으며,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주몽(朱蒙)이 부여(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도망하여 졸본(卒本) 註 006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곧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같은 한 곳이다. 《한서지(漢書志)》 註 007에서 이르기를 “요동군(遼東郡) 註 008은 낙양(洛陽)에서 3천 6백리 떨어져 있으며, 속한 현으로서 무려(無慮) 註 009가 있다.”고 했다. 곧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 註 010때에 그 아래에 의주(醫州) 註 011를 설치하였다. [또 한서지에] “현도군(玄菟郡) 註 012은 낙양(洛陽)에서 동북으로 4천리 떨어져 있고, 속한 현이 셋이며, 고구려가 그중 하나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른바 주몽이 도읍한 곳이라고 말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과 졸본(卒本)은 아마도 한(漢)의 현도군(玄菟郡)의 경계이고, 대요국(大遼國) 동경(東京) 註 013의 서쪽이며, 《한지(漢志)》 註 014에 이른바 현도(玄菟)의 속현 고구려(高句麗)가 이것일 것이다. 옛날 대요(大遼)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遼)의 황제가 연경(燕京 註 015) 註 016에 있었으니, 곧 우리의 조빙하는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에 의주(醫州)에 이르러, 연계(燕薊) 註 017로 향하였음으로 고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 


註 001 고구려 1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기원전37~기원전19년이다. 성은 고씨(高氏). 본명은 주몽(朱蒙) 혹은 추모(皺牟), 상해(象解) 등으로 전한다. 기록에 의하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유인(誘引)하여 사욕을 채운 후 사라졌는데, 부여(扶餘)의 왕 금와(金蛙)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유화를 궁중에 유폐시켰더니 곧 큰 알을 낳았다. 이 알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 아이가 자라 활을 잘 쏘자 아이의 이름을 선사자(善射者)란 의미로 주몽(朱蒙)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주몽은 금와의 7형제들과 자라면서 용납되지 못할 것을 알고 마리(摩離)·오이(烏伊)·협보(陝父) 등과 도망하여 홀본(忽本)에 도읍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다. 이때가 기원전 37년이다. 주몽은 비류국(沸流國), 행인국(荇人國), 북옥저(北沃沮)등을 병합하여 국가기틀을 마련하였다. 재위 19년에 부여에서 도망온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고 사망하였다.(고구려본기, 제1 동명성왕 및 역주 표영관)


註 002 전한(前漢) 원제(元帝) 시대의 세번째 연호이다. 연호의 사용기간은 기원전38~기원전34년으로 건소(建昭) 2년은 기원전 37년이다(역주 이승호).


註 003 고대 북만주에 위치하였던 국가로 주몽(朱蒙)이 기원한 곳이기도 하다. 북부여(北扶餘)는 3세기 전반까지 지금의 만주 길림성(吉林省) 길림시(吉林市)를 중심으로 국가체계를 갖추어 그 세력을 유지하였음이 사료 상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3세기 말 북방민족인 모용씨(慕容氏)의 침공으로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가 4세기 전반 그 중심지를 농안(農安)으로 옮기게 되고, 이후 물길(勿吉)의 공세에 밀려 고구려 문자명왕(文咨明王) 3년(494년)에 나라를 들어 고구려에 항복하여 귀속된다.(관련연구로는 노태돈, 《고구려사 연구》, 사계절, 1999, 495~508쪽 참조)


註 004 오늘날 남만주의 혼강(渾江)의 지류이다(역주 이승호).


註 005 주몽(朱蒙)이 남하하여 처음 고구려 도읍으로 삼은 곳으로 현재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근처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되고 있다(역주 이승호).


註 006 고구려 초기 도읍으로 흘승골성(紇升骨城)과 같은 곳으로 추정되며 현재 그 위치는 지금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환인현(桓仁縣) 근처 오녀산성(五女山城)으로 비정되고 있다(역주 이승호).


註 007 《후한서(後漢書)》 권23 군국지(郡國志)를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2쪽)


註 008 한(漢)이 요하 동쪽 지역에 설치하였던 중국 군현(郡縣)이다. 지금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요양시(遼陽市) 일대이다. 한(漢)에서 위(魏)를 거쳐 서진(西晉)의 관할 속에 중국세력의 동북방 전진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4세기 중엽 모용씨(慕容氏)에 의해 군(郡)이 철폐되게 되고 이후 고구려가 차지하게 된다(역주 이승호). 요동군의 역할과 성격에 관련하여서는 권오중, 《전한시대의 요동군(遼東郡)》, 《인문연구》 17, 1995 | 《후한(後漢) 광무제기(光武帝期)의 요동군(遼東郡) ~군체제의 '허'와 '실'》, 《인문연구》 15, 1993등의 연구가 참고된다(역주 이승호).


註 009 요동군(遼東郡) 소속의 현(縣)으로서 서부도위(西部都尉)의 치소가 있었다. 지금의 요령성(遼寧省) 중부 북진만족자치현(北鎭滿族自治縣) 일대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2쪽)


註 010 10세기 전반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를 말하는 것으로 요(遼)는 발해를 멸하고 동몽고지역과 만주 및 북중국 일대에 세력을 구축하여 북방의 강국으로 대두하였으나 이후 1125년에 이르러 여진이 세운 금(金)에게 멸망하였다(역주 이승호).


註 011 지금의 중국 요령성(遼寧省) 북진현(北鎭縣)으로 이는 북진현(北鎭縣)의 요(遼)나라 시대의 지명이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3쪽)


註 012 압록강 유역에 설치되었던 중국 군현으로 한(漢)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설치했던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이다. 현도군의 위치에 대하여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며 또 그 위치가 2~3번에 걸쳐 이동을 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체로 《한서》 《지리지》를 근거로 현도군의 초기 치소를 고구려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후 재차 무순(撫順)지역으로 옮겨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삼국지》 《동이전》 동옥저전에서는 당시 옥저성에 현도군의 치소가 있다고 전하고 있어 이에 대한 논란도 존재한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李丙燾, 「현도군고(玄免郡考)」, 《韓國古代史硏究》, 1976, 158~190 | 기수연, 《현도군과 고구려의 건국에 대한 연구》, 《고구려연구》 20, 2007이 참고된다(역주 이승호).


註 013 요(遼)나라의 5경의 하나로, 한(漢)의 요동군과 고구려의 요동성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의 중국 요령성 요양시 일대이다(역주 이승호).


註 014 《한서(漢書)》 권28 지리지(地理志)8 하(下)를 말한다(역주 이승호).


註 015 정덕본(正德本)에서는 ‘景’으로 되어있으나 《요사(遼史)》 38 지리(地理) 2 에는 ‘京’으로 표기되어있어 이에 따라 교감하여 주해한다.


註 016 요(遼)나라의 5경의 하나로, 지금의 중국 북경시 일대이다(역주 이승호).


註 017 중국 오대(五代)의 혼란기 말엽인 936년에 석경당(石敬塘)이 거란의 원조를 받아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晉)을 세운 대가로 거란에게 할양하여 준 연운 16주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의 땅으로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 동쪽의 천진시(天津市) 일대를 말한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4 주석편(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354~3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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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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