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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성도 없다
백암성도 없다
백암성(연주성) 글 목록 http://tadream.tistory.com/5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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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성도 없다
[이정훈 기자의 ‘딥 인사이드’]
3년 전 중국 동북공정의 실체 최초 폭로한 ‘신동아’의 현장 취재
광개토태왕비 앞에는 發福 비는 잔돈만 수북이…
2006.09.01 통권 564 호 (p328 ~ 353)
요동반도와 압록강 일대의 고구려성 위치도.
백암성도 없다
다음날 찾아가본 곳은 등답현 서대요향 관둔촌에 있는 고구려의 백암성(白巖城)이다. 고구려는 육로를 통한 중국 세력의 침입을 막기 위한 1차 방어선으로 요하 동쪽에 성을 여러 개 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백암성과 안시성(安市城)이다.
요동반도의 요동(遼東)은, 요하(遼河) 강 동쪽에 있다고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고려 우왕 때 최영 장군이 추진했던 ‘요동정벌’의 그 땅이다. 고려가 요동정벌을 계획한 것은 그곳을 우리의 역사무대로 보았다는 것인데, 이때 이성계는 요동정벌에 반대해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회군) 개성을 공격함으로써,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열었다. 요하 서쪽은 요서(遼西) 지역이다.
요하 때문에 이곳에 있는 중국 지방정부의 이름이 요녕성(遼寧省)이 되었다. 1345㎞에 이르는 요하는 서만주의 젖줄인데, 요하와 나란히 흐르다 하류에서 복잡하게 갈라져 서해로 흘러가는 요하와 합수되는 큰 강이 혼하(渾河)다. 요녕성 성도(省都)이자 동북지역 최대 도시이며,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대도시인 심양(瀋陽, 인구 800만)이 바로 혼하 중류에 있다. 이러한 혼하로 흘러드는 큰 지류가 뒤에서 설명할 태자하(太子河)다.
박작성이 함락되기 3년 전인 645년, 당 태종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동을 공격했다. 당나라 군대는 개모성과 비사성 요동성 백암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안시성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양만춘이 이끄는 고구려군의 저항이 거세 점령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습을 받아 패퇴하고 말았다.
당시 백암성 성주는 손대음(孫代音·‘孫伐音’이라는 기록도 있다)이었는데, 그는 요동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군에 항복했다. 백암성을 장악한 당나라군은 성 이름을 암주성으로 바꿔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를 안고 있건만 백암성은 고구려 산성에서 나타나는 ‘치(雉)’를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으로 꼽힌다.
성을 둥글게 쌓으면 적의 공격을 막기 힘들다. 그래서 톱니바퀴의 톱니처럼 밖으로 튀어나온 공간을 만드는데, 이것이 바로 치다. 치는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으므로 적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거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해 달려드는 적군을 공략하기 쉽다. 백암성에는 55m와 61m 간격을 두고 세 개의 치가 나란히 나와 있다. 치의 높이는 9m에서 10m 정도다.
치는 적의 공격을 가장 세게 받게 되므로 단단하게 지어야 한다. 고구려 시대에는 성을 공략하는 무기로 돌을 쏘는 충거(衝車)와 직접 부딪쳐 성벽을 무너뜨리는 당거(撞車)가 사용됐는데, 치는 충거가 쏘는 돌과 당거의 공격을 받아도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해야 한다. 이를 위해 아주 크고 튼튼한 돌을 치의 받침돌로 썼다. 그리고 그 위에 큰 돌을 9층 내지 10층까지 쌓는데, 뒤로 조금씩 물리면서 쌓는 ‘퇴물림 방식’으로 올렸다.
이렇게 하면 치나 성벽은 첨성대처럼 약간 뒤로 기운 모양이 되는데, 이렇게 쌓은 치나 성벽은 직벽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 백암성의 치 윗면에는 망을 보거나 성벽을 부수기 위해 달려드는 적군을 공격할 수 있는 가로세로 5m 정도의 공간이 있다.
고구려인들은 성벽 밖으로 나오는 돌은 매끈하게 다듬었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부분은 개 이빨(犬齒)처럼 뾰쪽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견치석’이란 말이 생겼는데, 견치석은 다른 돌과 맞물리는 기능을 한다. 견치석으로 쌓은 성벽은 외부에서 압력을 받을 경우 맞물리는 정도가 강해져 오히려 더욱 단단해진다. 백암성에서는 폭이 3m쯤 되는 성벽 한쪽이 무너져 있었는데 그 안에는 견치석 모양의 돌이 수북했다.
고구려인들은 화강암으로 성을 쌓았다. 그러나 백암성만은 석회암으로 만들었다. 이유는 바로 곁에 석회암 채석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채석장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고구려인들은 이곳에서 견치석 모양으로 석회암을 떼어내 퇴물림 방식으로 치와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이곳에 붙어 있는 안내판에는 고구려의 백암성이 아니라 ‘연주성산성(燕州城山城)’이라고 씌어 있었다. 연주성산성은 연나라 때 쌓은 산성이라는 뜻이다. 연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선비족이 사는 땅에 있던 왕국이다. 중국은 왜 고구려 산성에 연나라 성 이름을 붙인 것일까. 이유는 백암성 옆으로 흐르는 태자하와 고구려 역사 지우기에 있을 듯했다.
전국시대 가장 강한 나라는 전국을 통일한 진(秦)이었다. 기원전 228년 진은 한(韓·우리와는 상관없는 나라임)나라를 멸망시키고 조(趙)나라를 압박해 역수(易水)강까지 쳐들어왔다. 조나라가 무너지면 연나라가 공격을 받게 된다. 위협을 느낀 연나라의 태자 단(丹)은 자객 형가(荊軻)에게 진시황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형가는 진시황 암살에 실패해 죽임을 당했다.
분노한 진시황은 기원전 226년 군대를 동원해 연나라 수도를 공격했다. 그러자 겁을 먹은 연나라 왕 희(喜)가 요동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고, 태자 단을 죽여 그 목을 진시황에게 바쳤다. 아들의 목을 바치며 화해를 요청한 것인데, 진나라는 공격을 계속해 기원전 222년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그때부터 이곳에 흐르는 강을 아비에게 죽임을 당한 태자 단을 기려 ‘태자하’로 불렀다고 한다.
태자하 옆에 있으니 중국은 이 산성을 연나라의 성, 즉 연주성산성으로 부른 것으로 보인다. 연나라가 쓰러진 후 선비족은 5세기 무렵 북위(北魏)를 세워 140여년간 중국 북부를 통치하다 한족(漢族)에 동화되었다. 중국으로서는 대한민국의 뿌리가 된 고구려보다는 한족에 동화된 연을 이 땅의 주인으로 삼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성을 고구려의 성으로 확인해줄 수 없다.
1963년 중국은 이곳에 ‘연주성산성’이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고 1990년 같은 이름을 새긴 비석을 또 세웠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펼치기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 지우기를 해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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