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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요하 유역 성곽방어체계

        - 압록강 · 요하 유역의 군사방어체계를 중심으로 -  신 광 철
       Ⅰ. 서론                                 http://tadream.tistory.com/5520
        Ⅱ.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       http://tadream.tistory.com/5519
        Ⅲ. 압록강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2
        Ⅳ. 요하 유역 성곽방어체계      http://tadream.tistory.com/5523
        Ⅴ. 결론                               http://tadream.tistory.com/5521      
        참고문헌


현재 요하 유역의 고구려 성은 중하류의 동쪽 지역에서 주로 발견되고 있으며, 대평원지대보다 지류 연안의 하곡평지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 혼하와 태자하 유역에 가장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으며, 다른 지류 연안에는 대평원에서 하곡평지로 진입하는 길목 곧 대평원과 산간지대의 접경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분포현황은 고구려사의 전개과정 특히 군사방어체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余昊奎 1999a: 15-17).
 

1. 혼하 · 태자하 중상류의 산간지대
 
이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평지성을 포함하여 20기가 넘는 고구려 성이 확인되었는데 소형성보를 제외하면 대체로 하천 연안로를 따라 축조되어 있다.
 
요동평원과 압록강 중류일대를 왕래하던 주요 교통로였던 혼하~태자하 연안로를 살펴보면, 하류방면에서 요동평원과의 접경지역인 무순에 고이산성, 소자하 · 혼하 합류지점으로 소자하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철배산성, 소자하 · 혼하 합류지점~목기진 사이의 전략적 요충지인 득승보댐 일대에는 오룡산성, 소자하 하류 방면의 양안이 협소해지는 목기진 일대에는 하서촌고성, 환인 동북로와 서북로가 갈라지는 영릉진 일대에는 영릉진고성과 이도하자구노성 등이 각각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태자하 중상류에서도 나타난다. 즉, 태자하 양안의 연안로를 따라 하류방면에서부터 유관산성→하보산성→태자성→채송산성 등의 순으로 위치해 있다(田中俊明 1997: 35-37).
 
이 지역의 고구려 성이 하천 연안로를 따라 분포한 것은 지역특징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혼하~소자하 연안로는 고구려 초 이래 압록강 중류 일대와 요동지역을 잇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는데, 고구려는 현도군 등 중국 세력과 각축을 벌이면서 이 일대로 진출하였다. 1세기 말~2세기 초경에는 혼하 방면의 제2현도군을 몰아냈으며, 3세기 후반부터는 혼하 일대 진출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요동평원과의 접경지대인 무순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렇지만 4세기에도 여전히 전연과 요동지역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으며, 342년에는 혼하~소자하로를 통해 진공한 전연군에게 수도를 함락당하기도 했다(余昊奎 1995; 田中俊明, 金希燦(역) 1999).
 
이에 고구려는 신성을 비롯하여 남소성, 목저성 등을 축조하고 지배력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성은 기본적으로 전연 등의 침공을 방어하고 요동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 곧 군사거점의 성격이 강하였다. 그리하여 이 일대의 성은 혼하~소자하 연안로의 전략적 요충지에 축조되었고, 군사방어 기능이 우선시됨에 따라 철배산성과 같은 산정식산성, 포곡식산성이라도 오룡산성처럼 산간형 또는 고이산성처럼 산간형 · 돌출형의 과도기 형태인 산줄기형이 축조되었다.
 
이러한 산성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방어 기능에만 치중했던 압록강 중류일대의 산성식산성들과 달리 점차 포곡식으로 전환되었다. 태자성 내성과 외성이 성돌 · 옹성구조 등에서 뚜렷이 구별되며 상이한 시기에 축조되었다는 견해(無順市博物館 1992: 322-323)는 이러한 점에서 유의할 필요가 있다. 태자성 내성은 산정식이며, 외성은 포곡식이다. 따라서 내성과 외성이 다른 시기에 축조되었다면 이는 성의 기능 변화와 관련될 가능성이 높다. 즉, 산 정상부에 군사방어시설로 내성을 축조하였다가 지방통치조직이 정비되면서 계곡과 완만한 경사지를 포괄하여 지역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 외성을 축조하였다고 추정된다(林起煥 1998: 94-95).
 
이 지역의 성들은 石城이 비교적 많은 편인데, 석성은 대체로 낭떠러지나 절벽을 끼고 있어 지세가 험준하며 이를 천연성벽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즉, 지형이 험준하면서 석재를 구할 수 있는 지역이면 어느 곳이든 석성을 구축했음을 알 수 있다. 석성이 토성이나 토석혼축성보다 일찍 출현하였고, 특히 토축성벽은 4세기 이후(辛占山 1994: 34-37) 또는 요동평원 진출 이후(李殿福 1994: 220-222)에 비로소 축조하였다고 보기 때문에 시기적으로 이 지역의 성들이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혼하 · 태자하 중상류 일대의 산성은 기본적으로 국내성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중류일대를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서 축조되었다. 이들은 혼강 우안의 흑구산성, 마안산성 등과 상호 연계되어 4세기 전반 국경지대에서 수도에 이르는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였다(余昊奎 1998). 그리고 645년 국내성과 신성의 군사 4만을 동원하여 요동성 구원에 나선 것이나 666년 남생이 당에 투항할 때 당군이 남소성을 비롯하여 목저성, 창암성 등을 차례로 격파한 다음 국내성에 웅거하고 있던 남생과 회합한 것을 보면 혼하~소자하 연안로의 군사방어체계는 고구려 멸망시까지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혼하 · 태자하 중상류 일대에는 소형성보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소형성보는 소자하 연안의 경우 영릉진고성 · 이도하자구노성, 혼하 연안의 경우에는 노동공원고성 · 고이산성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다. 이를 통해 봤을 때 혼하~소자하 일대에서 가장 중요한 요충지인 영릉진과 무순 일대에 지역거점성을 중심으로 하는 위성방어체계가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667년 당의 이적이 신성을 함락시킨 다음 주변의 16성을 한꺼번에 격파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위성방어체계를 반영하는 기록이라 하겠다(권오중 2005: 38).
 
 
2. 요하 하류~천산산맥과 요동평원
 
이 지역에는 10기 가량의 성이 분포하고 있다. 고구려가 요동평원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대체로 4세기 말~5세기 초이기 때문에 이 지역의 성들은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5세기 대에 구축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盧泰敦 1996). 문헌자료상 이 지역의 성은 주로 7세기 전반 고-수, 고-당 전쟁에 등장하지만 백암성은 547년 신성을 수축할 때 함께 개축하였으며 551년에는 돌궐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는 백암성이 6세기 중반 이전에 축조되었음을 보여주며 안시성으로 비정되는 영성자산성에서는 5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는 적갈색 연운문와당편이 출토되기도 하였다(林植樹 1994: 55).
 
둘레 2.5㎞인 영성자산성은 5㎞에 이르는 고려성산성(건안성으로 추정)에 비해 규모상 작을 뿐 아니라 지방제도상으로도 한 단계 아래였다. 그러므로 고려성산성을 비롯한 이 지역의 주요 산성은 늦어도 영성자산성이 축조되는 시기에는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고구려의 요동진출 시기, 영성자산성의 축성시기 등을 고려한다면 이 지역의 대체로 5세기 중반을 전후하여 동시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이 지역의 성이 일정한 계획 아래 구축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 성은 요하 도하로 및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와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요하 도하로는 세 갈래가 있는데(王綿厚·李建才 1990: 140-152) 북로를 통해 요하를 도하한 다음 번양을 거쳐 천산산맥으로 나아가는 길목에는 심양 탑산산성과 본계 변우산성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중로를 도하한 다음 천산산맥으로 진입할 경우에는 북쪽의 요양이나 남쪽의 해성을 통과하는 두 루트가 있는데, 북쪽에는 요동성, 백암성, 고수산성이 남쪽에는 영성자산성이 있다. 그리고 남로를 도하하여 천산산맥으로 나아가는 루트에는 영성자산성을 비롯하여 마권자산성, 고려성산성 등이 위치하였다.
 
또한 이들 성은 요동평원에서 천산산맥을 넘어 압록강 일대로 향하는 교통로와도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다. 먼저 본계~봉성로의 북쪽 진입로인 심양~본계로에는 탑산산성과 변우산성, 요양~본계로에는 요동성, 백암성, 고수산성이 각각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해성~수암로의 길목에는 영성자산성, 개주~장하로의 길목에는 고려성산성이 각각 위치하였으며 대청하에서 수암으로 나아가는 산간로 입구에는 마권자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처럼 이 지역의 성은 요하를 건너 요동평원을 거쳐 천산산맥을 횡단하여 압록강 일대로 나아가는 각 교통로의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였다. 고구려는 5세기 이후 요하와 요동평원에서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으로 향하는 교통로에 튼튼한 요새를 구축하였던 것이다. 요하하류~천산산맥 구간의 고구려 성은 기본적으로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을 방어하기 위해 축조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 성을 고구려 서북방어체계의 전연방어성으로 파악한 북한학계의 견해는 경청할 만하다(사회과학원 력사연구소 1979: 122-130).
 
천산산맥 횡단로에는 진입로 입구뿐 아니라 초하연안(본계~봉성로), 대양하연안(해성~수암로), 벽류하연안(개주~장하로) 등 동남방면에도 성곽이 조밀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는 전연방어성과 종심방어성이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국경지대에서 수도에 이르는 지역에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축하였음을 의미한다. 즉, 요하하류~천산산맥의 성은 국경지대에서 중후기 수도인 평양성에 이르는 입체적 군사방어체계의 일부로 구축되었으며, 그 가운데 전연방어성의 기능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요하하류~천산산맥의 성은 전연방어성 상호간에, 또 후방의 종심방어성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입체적 군사방어체계를 구성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실제 645년 당 태종이 백암성을 함락하고 안시성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적에게 군사 방어력이 견고한 안시성보다 미약한 건안성을 먼저 공격할 의사를 비추자 이적은 안시성을 건너뛰어 곧바로 남쪽의 건안성을 공격했다가 북쪽의 요동성과의 보급로가 끊기게 될 것을 우려해 반대했다. 또한 당에 투항한 고연수 · 고혜진이 오골성을 거쳐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하자고 건의하자 장손무기는 오골성으로 곧바로 향하면 건안성, 신성의 고구려군이 배후를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역시 반대하였다.
 
645년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당군이 각 성을 차례로 함락시키지 않고 당 태종의 말처럼 어느 성을 건너뛰어 다른 성을 공격하거나 고연수 · 고혜진의 건의처럼 진입로 입구에 위치한 성을 함락시키지 않고 곧바로 압록강 일대로 진격할 경우에는 보급로를 차단당하거나 배후에서 기습공격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리하여 당군은 세 갈래의 요하 도하로를 통해 요동평원으로 진공한 다음, 이적이나 장손무기의 말처럼 개모성 → 마미성 → 요동성 → 백암성 → 안시성 등 위쪽 루트에 위치한 성부터 차례로 함락시킨 다음 압록강 일대로 진격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余昊奎 1999b).
 
한편, 이 지역의 성들은 대부분 충적평지 방향으로 뻗어 나온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돌출형 포곡식산성이다. 산성 내부에는 평탄한 대지가 비교적 넓은 편이며 성벽 안쪽의 산비탈에는 계단식 대지를 많이 조성하였다. 영성자산성의 경우 둘레 2.5㎞로서 비교적 대형 산성에 속하는데 산성 내부에는 골짜기를 따라 평탄한 대지가 넓게 자리 잡고 있으며, 산등성이 안쪽의 완만한 경사면에는 계단상 대지를 조성하여 주거용 공간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개주 고려성산성도 총둘레 5㎞를 넘는 초대형 산성이면서 내부에는 아주 넓은 평지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의 산성은 군사방어뿐 아니라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성으로서 지류 연안의 충적평지 일대를 관할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건안성의 전신인 평곽에는 한대에 ‘鹽官’과 ‘鐵官’이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고려성산성 앞쪽에 요동만이 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고구려 때에도 주변 일대의 소금과 철을 총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요하 중상류~길림합달령산맥
 
이 지역에서도 10여기의 성이 확인된다. 성은 대부분 포곡식 산성으로 하천연안의 충적평지로 뻗은 산줄기의 끝자락에 위치한 돌출형의 비중이 높다. 이 지역의 성은 대략 세 지역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동북대평원에서 범하, 구하 등 지류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석대자산성, 최진보산성, 청룡산고성, 마가채산성, 용담사산성 등이다. 다음으로 길림합달령산맥 방면으로 40~50㎞ 정도 들어온 지점의 개원 고성자산성과 서풍 성자산산성 등이 있고 마지막으로 동요하의 발원지인 요원지구의 용수산성, 공농산성, 성자산산성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 이들 각 성의 입지조건이나 축성방식이 지역마다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먼저 서풍 성자산산성의 경우 토축 혹은 토석혼축이 아닌 석성이며 자연절벽을 천연성벽으로 삼기도 했다. 입지상으로도 돌출형이 아닌 산간형인데 이는 압록강 중류일대의 초기 산성에서 많이 확인된다. 특히 서문의 어긋문식 옹성은 국내성이나 오녀산성에서 확인되는 초기 옹성으로 분류되며, 남벽의 방형구멍도 초기 산성에서 주로 확인된다.
 
더욱이 이 지역의 산성이 충적평지에서 곧바로 산성으로 진입할 수 있는 반면, 성산자산성은 골짜기를 따라 깊숙이 들어온 다음 진입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산성은 둘레가 1~2㎞의 중형 산성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평탄한 대지가 비교적 넓고 산비탈에 계단상 대지를 많이 조성한 반면, 성자산산성은 둘레 4㎞의 초대형산성임에도 평지가 협소하고 산비탈도 가파르다. 이에 산성 서쪽의 골짜기에 둘레 5㎞에 달하는 외위성을 축조하였는데 토성으로서 본성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성자산산성이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군사 방어적 목적에서 축조되었다가 지방 지배를 위한 거점성의 기능을 강화하였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현상은 철령 최진보산성에서도 유사하게 확인되는데 이를 통해 봤을 때 최진보산성 역시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겠다.
 
특히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은 지리위치상으로도 유사한 측면이 발견된다. 성자산산성은 연반하 상류를 따라 길림합달령을 횡단한 다음 휘발하를 통해, 최진보산성도 범하 상류를 따라 길림합달령을 횡단한 다음 혼하-소자하를 거쳐 각각 압록강 중류일대로 진입할 수 있다.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은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요동평원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요하 중상류일대로 진출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한 것이다. 즉, 요하 중상류일대의 산성이 대체로 지류 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된 반면, 이들은 압록강 중류일대에서 휘발하나 혼하를 거쳐 요하 상류로 나아가는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은 고구려가 요하 중상류 일대로 진출한 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1세기 중반에 선비족의 일부를 복속시켰고, 2세기 전반에는 선비족과 연합하여 한군현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선비족의 본거지인 서요하 일대로 나아가는 중간지대인 이 지역과 일찍부터 관련을 맺었다고 파악된다. 특히 333~336년경 전연의 내분을 틈타 길림방면의 부여지역을 점령하였고, 346년에는 옛 부여지역으로 침공한 전연군을 물리친 것을 보면 4세기 중반에는 북류 송화강 일대와 함께 요하 중상류 일대를 장악하였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성자산상성과 최진보산성은 고구려가 요하 중상류일대로 진출하던 초기에 군사방어성으로 축조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산간형 · 산줄기형 포곡식산성인 성자산산성과 최진보산성이 이른 시기에 축조되었다면 지류 연안의 진입로에 위치한 돌출형 포곡식산성은 이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축성법, 입지조건, 공간구성, 분포양상 등이 요하하류 천산산맥과 요동평원 일대의 산성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슷한 시기에 유사한 목적에 의해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높다. 즉, 지류 연안으로 진입하는 길목을 봉쇄하는 군사 방어적 성격과 아울러 지류연안 일대를 지배 · 관할하는 거점성의 기능을 지녔던 것이다. 더욱이 요하 하류보다 중상류의 지류 연안에 충적평지가 더 많이 발달되어 있다는 점에서 지방 지배를 위한 성격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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