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content_id=cp020809000001

왕검성(王儉城)

고조선의 도읍지인 평양, 기성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1894)

이 칭 : 왕험성(王險城)
시 대 : 삼한
소재지 : 평양 일대
관련전투 : 왕검성전투(王儉城戰鬪)
관련인물 : 성기(成己)

고조선 때의 도성.

중국의 역사책 《사기》에 의하면, 중국 한나라 때 연나라에 있던 위만(衛滿)이 무리 천여 명을 이끌고 패수(浿水)를 건너 고조선에 망명하여 준왕(準王)의 아래에 있다가, 그 후 준왕을 몰아내고 왕검성에 도읍하였다고 한다. 당시 위만은 고조선의 영역을 그대로 차지한 것으로, 왕검성은 그 이전부터 고조선의 도읍지였을 것이다. 고조선 초기의 도읍지는 요동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되지만, 적어도 고조선 후기의 도읍지인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 지역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따라서, 왕검성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고조선의 흥망사와 관련하여 살펴볼 수 있다.

위만조선은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에 주변의 여러 종족들이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무역을 통하여 세력이 커졌다. 고조선이 한나라의 위협이 되자, 한무제는 북방의 흉노족을 정벌하고, 이어서 기원전 109년에 수륙의 양군을 동원하여 고조선을 침공하였다. 그러나 좌장군 순체(荀)가 거느린 육군은 고조선 군사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패수를 돌파하지 못하였고, 누선장군 양복(楊僕)이 거느린 5만의 수군 중 선발대 7천명은 왕검성으로 진군하였다가 위만조선 군사의 반격을 받아 대패하였다. 그 후 양복은 왕검성의 남쪽을 포위하였고, 순체는 왕검성의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왕검성의 수비가 견고했으므로, 여러 달이 지나도록 성을 함락할 수 없었다. 더욱이 양복과 순체의 갈등과 고조선의 분열 계책으로 인해 왕검성 공격은 여의치 않았다. 이에 한 무제는 다시 제남태수 공손수(公孫遂)를 보내 사태를 수습하였는데, 그는 양복을 체포하고 그의 군사를 순체의 휘하에 합병시켰다. 순체가 양군을 합쳐 조선을 공격하자 여러 조선의 대신이 항복하고, 이듬해에는 내부 반란이 일어나 우거왕을 살해하고 투항하였다. 그래도 대신 성기(成己)가 저항하여 왕검성은 항복하지 않았는데, 마침내 한의 회유책으로 성기마저 살해되고 왕검성은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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