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key=20081024.22017204019
이노켄티예프카 성지에서 바라본 우수리강. 발해 성지는 이 강을 따라서 북쪽으로 확장됐다.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29> 발해의 경계는 어디까지였을까?
발해 경계 해석 분분… 연해주 경내 기록에 없는 성터만 수십개
한국은 다민족 지배형태로 보고
러시아는 독자대항세력으로 판단
中은 영유권 주장 유리하게 해석
여섯빛깔 문황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2008-10-23 20:41:16/ 본지 17면
이노켄티예프카 성지에서 바라본 우수리강. 발해 성지는 이 강을 따라서 북쪽으로 확장됐다.
약 천 년 전에 극동의 한 부분을 차지하던 발해. 멸망 이후 거의 잊혀진 나라가 되었다가 요즘 우리에게 아주 큰 의미로 다가오는 나라다. 하지만 발해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얼마 전 연해주의 콕샤로프카 성지에서 한·러 공동발굴 조사를 한 결과 발해의 왕궁이 발견됐다는 신문기사가 나왔는데, 이는 오해이고 성 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관청지 같은 건물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올해 발굴한 구역은 극히 일부이고 향후 좀 더 심도 있는 조사를 기대해본다.
콕샤로프카 성의 의의는 발해의 북쪽 경계를 확인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유적이기도 하다. 사실 발해의 북쪽 경계도 통일된 의견이 없다.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연해주를 넘어서 아무르강 유역까지 쭉 뻗어있다. 하지만 실제로 발해의 유적은 대체로 한카호수가 경계이다. 가장 북쪽은 마리야노프카라고 하는 성지이다. 필자는 2004년에 유학시절 동기였던 콜로미예츠, 양시은(서울대 박물관), 김재윤(극동과학원 박사과정) 등과 함께 이전에 발해의 가장 북쪽 성지로 알려진 마리야노프카에서 북쪽으로 더 50㎞정도 떨어진 이노켄티예프카 성지를 시굴조사한 결과 발해계로 추정되는 토기와 다양한 유물을 발견했다. 정확한 결과는 발굴조사를 하면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우수리강을 따라서 발해의 성지가 어디까지 분포했을까하는 문제는 무척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현재 연해주 경내에서 발견된 성지 중에 역사기록에 그 이름이 남아있는 성은 크라스키노(염주)가 유일하다. 그런데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크라스키노보다 규모도 큰 발해성이 수십 개가 알려져있다. 이들도 행정구역의 중심지였지만 단지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발해의 전성기 때에 연해주 북쪽으로 확장해나가면서 각지에 행정중심지인 성을 쌓았고 그 범위를 계속 확장했을 것이다. 발해의 실제 경계는 이들 성지가 제대로 조사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콕샤로프카 성과 같은 규모의 성지는 연해주에서 이미 수십개가 발견되었다. 과연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발해 중심지에서 파견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현지인이 발해화된 것일까? 대부분의 발해성지는 지표조사로만 알려졌을 뿐 그 자세한 양상은 모르기 때문에 아직도 의문이 많다.
하지만 발해성지와 발해 경계는 조금 다르다. 당시의 경계라는 것이 요즘같이 말뚝박고 철책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성 중심의 거점을 지배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발해의 경계를 밝히는 일은 앞으로 수십년의 작업을 통해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특히나 발해는 다민족국가였기 때문에 그 경계에 대해서 러시아와 한국학계는 견해가 다르다. 한국학계에서는 아무르지역까지 발해가 직접지배 내지는 각 지역의 우두머리를 인정하는 일종의 간접지배형태로 장악했을 것으로 본다. 반면에 러시아는 연해주에 발해는 점차적으로 진출했으며 발해에 대항하는 말갈이나 거란같은 세력들이 발해에 맞서서 성을 쌓고 대항했다고 본다. 즉, 발해와 유사한 문화는 발해의 지배하에 든 이민족인지(한국), 아니면 그에 대항한 독자적인 세력(러시아)인지로 보는 가에 따라 견해가 양분된다.
발해의 북쪽경계를 아무르강 너머까지 보는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중국에게 발해는 '한족(漢族)의 역사'이기 때문에 향후 연해주와 극동에 대한 중국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의 역사논리에 따르면 바이칼 동쪽의 시베리아와 극동은 모두 중국의 땅이 된다. 중국에 조공을 했던 모든 민족은 중국에 복속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걱정되는 것은 연해주의 발해는 현재 러시아의 영토라는 점이다. 물론 러시아는 한국의 공동연구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지만 한국에서 지나치게 큰 관심을 보이며 사회 이슈화된다면 러시아의 태도도 바뀔 수 있다. 이는 결코 우리에게 이익은 아니다. 그나마 우리가 우리의 옛 역사를 직접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땅은 연해주다. 이마저 러시아를 자극해서 그 연구 터전을 잃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이 무엇일까? 좀 더 신중하고 차분한 연구가 필요하지 않을까. 어쨌거나 우리가 조사할 수 있는 발해유적은 남한에 없다. 안타깝지만 우리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서 조사를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해외발굴은 두 나라의 이해를 잘 조정해야하고 또 상충될때는 우리가 양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자본과 시간이 드는 작업이기도 하다. 한 발 양보하고 한걸음 늦추어서 걷는 여유가 필요한 게 발해연구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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