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key=20080912.22016201947
강인욱의 북방 역사 기행 <25> 연해주 산악지대의 고구려식 산성들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린 고구려 축성술의 흔적
고구려 멸망 300년 뒤에 쌓은듯
여진족이 남긴 것으로 추측되지만
고구려 유민들의 산물일 수도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국제신문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2008-09-11 20:21:14/ 본지 16면
연해주 북부 자볼로뜨노예 지역에서 발굴된 고구려계통 석성. 사진 제공=O.V. 디야꼬바
러시아의 시베리아·극동을 통틀어서 인구 밀도가 제일 높은 지역은 연해주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도시와 인구는 연해주 남부에 집중되어 있다. 그 이유는 연해주의 한가운데를 시호테-알린 산맥이 가로지르고 있어 사람이 거의 살지 않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와 나호트카 북쪽으로 가면 험준한 산들이 많고 바닷가에는 조그만 항구들만 있을 뿐 거의 인적이 드물다. 그러니 고고학적 조사도 별로 안되어 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연해주의 험준한 북부지역에서 고구려 계통의 성지가 남아있다는 조사결과가 발표됐다. 보고자는 디야꼬바 박사로 남편인 디야꼬프와 함께 상대적으로 소외된 연해주 산악지역을 30여 년간 조사해온 고고학자이다.
디야꼬바 박사는 필자가 공부한 노보시비르스크 출신이라 이름은 많이 들었으나 정작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한 학술대회에서 처음 만날 수 있었다. 험한 산악지역을 수십년 조사한 사람치고는 아주 온화하고 차분한 풍모가 인상적인 분이었다. 당시 디야꼬바 선생의 발표주제는 말갈토기로 석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사는 쉬는 시간에 필자에게 지난 몇 년간 시도로프, 사끄마로프 등의 연구원들과 함께 연해주 북부 지역의 연구성과를 소개했다. 디야꼬바 박사가 보여주는 자료를 본 순간 필자는 전율이 오는 듯했다. 도저히 길도 없는 험한 지역들을 조사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고, 또 산을 둘러싸는 포곡식의 대형 산성이 지금도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에 다량으로 분포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산성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들 석성의 고구려 관련유무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연해주 북부 산악지역에 대형 산성들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의 고고학' 편집장인 황규호 선생에게 그 사실을 알렸고 그 다음해 봄에 한국에도 소개되었다.
현재 연해주에서는 약 10개의 석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슈 끌류치 자볼로뜨노예성 등은 시베리아 호랑이로 유명한 시호테-알리안 산맥 중앙지대와 동해에 연접한 연해주 동북해안가에 위치한다. 이들 석성은 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적당한 산의 정상부에서 비교적 평평한 지역을 중심으로 돌벽을 쌓은 것이다. 석성을 쌓기 전에 2~6㎡ 넓이로 평평하게 기반을 잡고, 그 다음에 피라미드처럼 위로 갈수록 좁게 쌓아올렸다. 사진으로 볼 때 돌은 따로 가공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쌓아올린 듯 보인다. 또 성벽 곳곳에는 성문과 치가 있어서 적의 공격을 쉽게 막을 수 있게 되어있다.
현재까지의 자료만으로 본다면 연해주 북부의 산성이 직접 고구려 산성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두 지역의 산성은 입지조건이 비슷하긴 하지만 고구려는 좀더 정돈된 돌을 가지런히 쌓아올렸으며 주변의 평지에도 성을 쌓았던 데에 반해서 연해주 북부의 산성은 거친 돌을 피라미드처럼 쌓아올렸기 때문이다. 연해주 북부의 산성들은 대체로 여진족들이 남긴 것으로 그 시대는 서기 10~13세기대로 추정된다. 고구려가 망한 지 300여년 후에 등장하는 셈이니 시간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직접적인 유사성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오히려 연해주 북부의 산성이 주는 의의는 고구려의 발달된 문화(성 축조기술, 철제 무기 제작, 토기) 등이 극동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극동지역이 거란-여진으로 이어지는 발달된 문화를 영위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는 데에 있다.
여전한 의문은 험한 산악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힘들게 산성을 구축하면서 살아야 할 정도로 외적의 침입이 많았는가 하는 점이다.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주변 주민집단과 충돌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유독 연해주 북부의 산악지역에만 석성이 많은가도 의문이지만 혹시 고구려 계통의 문화를 이어받은 주민 집단이 여진의 주세력을 피해서 고구려와 비슷한 산악지형에 정착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연해주 북부지역에 본격적으로 조사가 된다면 뭔가 답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발굴과 조사를 하면 새로 밝혀지는 것보다 더 많은 의문이 생기는 점은 고고학의 매력이자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부경대 사학과 교수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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