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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3>후고려기(後高麗記)(6)
말갈족은 기록된바 아홉 부족이 있었다. 《구당서》에 보면 말갈의 하나인 백산부는 고려에 복속되어 있다가 평양 함락 이후 대거 당조로 사민되었고, 골돌부ㆍ안거골부ㆍ호실부 같은 부락은 고려가 패망한 뒤 "점점 쇠약해져 나중에는 그 존재조차도 들을 길이 없었으며[奔散微弱, 後無聞焉]" 결국 발해로 모두 흡수되기에 이르렀다고 적었다. 남은 것은 흑수부(黑水部)뿐이었다.
흑수부에 대해서 《구당서》는 "가장 북쪽에 있는데 더욱이 굳세고 건장하다 일컬어지며 매번 그 용맹함을 믿고 의지하였기에 항상 이웃한 부족들의 근심거리가 되었다[最處北方, 尤稱勁健, 每恃其勇, ○爲○境之患]."고 설명했다. 통일된 국가가 없어 일부는 고려로, 일부는 수로, 일부는 돌궐로 가서 살았으며, 다른 말갈 부락이 해체과정을 겪으면서
혹은 발해의 건국을 도우면서 그들에 흡수되는 와중에도 흑수부는 강한 독자세력을 유지했다.
북송시대의 문헌집성서인 《책부원귀》에 보면 개원 8년, 즉 인안 2년(720) 9월에 좌효위낭장 섭낭중 벼슬의 장월을 말갈에 보내어 당의 '은의'를 저버린 해족과 거란족을 토벌하는 것을 협력해 줄 것을 청하는 대목이 나온다.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는 여기서 말한 '말갈'은 흑수말갈이거나 아니면 발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무렵 당의 입장에서 만주 지역을 잠재우려면 발해와 말갈, 이 양대 세력을 우선적으로 포섭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발해의 경우는 무예왕이 즉위한 그 시점부터 이미 당에 대해서 다소 적대적인 노선을 견지하고 있던 터였다.
[開元十年, 黑水靺鞨使者入朝. 唐玄宗以其地建黑水州, 置長史.]
개원 10년(722) 흑수말갈(黑水靺鞨)의 사자가 당에 갔다[入朝]. 당 현종이 그 땅에 흑수주(黑水州)를 세우고 장사(長史)를 두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4년 임술(722)
《신당서》에 보면, 흑수말갈의 추장 예속리계(倪屬利稽)가 와서 조알하므로 현종이 그에게 발리주자사(勃利州刺史)라는 벼슬을 주었다고 한다. 마침 안동도호로 있던 설태(薛泰)도 흑수말갈의 땅에 부(府)를 설치해 그 추장들을 도독과 자사로 임명하자는 건의를 했고, 당조에서는 장사(長史)를 보내어 흑수부를 감독하게 했다.
당으로부터 유주도독 휘하 발리주자사 운휘장군(雲麾將軍)ㆍ영흑수경략사(領黑水經畧使)라는 작위에, 이헌성(李獻誠)이라는 번듯한 이름까지 수여받아가면서, 예속리계라는 저 흑수말갈 수장은 발해를 제치고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당으로서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발해의 바로 북쪽에 있는 흑수말갈을 포섭해서 발해 북쪽에 우방국을 만들어놓으면, 발해가 이상한 낌새를 보일 때에 그들을 시켜 후방을 치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은가.
뭐 아무튼, 흑수말갈이 당에 사신을 보낸 것에 대해 《신당서》에는 인안 4년(722), 《구당서》에는 인안 8년(726)으로 차이가 있는데(어떤 것이 옳은지는 나중에 따로 더 조사를 해봐야 되겠다.) 예속리계로부터 비롯된 말갈족의 동요는 결국 월희나 철리, 불열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말갈 제족 수령들은 앞다투어 당에 입조해 조공을 바치고 장군호를 받는 등 발해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시작했다. 그리고 당은 그런 말갈족의 동태를 적절하게 이용해먹으며 발해가 딴 맘 못 먹게 잘 길들이려 했고.
[臨總王召群臣謀曰 "黑水始假道於我, 與唐通. 異時請吐屯於突厥, 皆先告我, 與我使偕行. 今請唐官不吾告. 是必與唐謀, 腹背攻我也." 乃遣弟門藝及舅雅雅相, 發兵擊黑水.]
왕이 신하들을 모두 불러 대책을 논하였다. "흑수는 처음 우리에게 길을 빌려서 당과 통했다. 지난날에는 돌궐에게 토둔(土屯)이 되기를 요청했는데, 이 모두를 우리에게 먼저 보고하고서 우리 사신과 함께 갔었다. 지금 당에게 관직을 청하면서 우리에게는 알리지도 않았다. 이는 필시 당과 짜고 배반하여 우리를 치려는 것이 틀림없다." 이에 무왕은 그의 아우 문예와 장인[舅] 임아상[雅雅相]을 시켜 군사를 내어 흑수를 치게 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3년(722)
《발해고》에는 아아상(雅雅相)이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진짜 이름은 임아(任雅)이다. 《당서》에서는 그가 무예왕의 장인이었다고 기록했으니 발해에서 왕비의 외척으로서 벼슬하고 있던 자였던가?
[門藝曾充質子至京師, 開元初還國, 至是謂武藝曰 "黑水請唐家官吏, 卽欲擊之, 是背唐也. 唐國人衆兵强, 萬倍於我, 一朝結怨, 但自取滅亡. 昔高麗全盛之時, 强兵三十餘萬, 抗敵唐家, 不事賓伏, 唐兵一臨, 掃地俱盡. 今日渤海之衆, 數倍少於高麗, 乃欲違背唐家, 事必不可." 武藝不從.]
문예는 일찌기 인질로 경사에 왔다가 개원(開元: 713~741) 초년에 환국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무예에게 이르기를 "흑수가 당가의 벼슬을 청했으니 그를 치고자 하는 것은 곧 당을 등지게 되는 것입니다. 당국은 사람이 많고 군사의 강함은 우리보다 1만 배가 되니 하루 아침에 원수를 맺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일일 뿐입니다. 옛날 고려의 전성기 때는 강병이 30만이었지만 당조에 대적하며 섬기지 않자 당군이 한 번 이르러 땅을 쓸어 버린 듯 모두 죄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발해의 무리는 고려보다 몇 배나 적습니다. 이걸 가지고 당가를 등지고자 한다면 그 일은 반드시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무예는 따르지 않았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무예왕의 목표는 당 본국이 아니라, 흑수말갈을 치는 데에 있었음에도 문예가 그걸 반대하는 것도 나름 근거가 없진 않았다. 당에게 발해와 말갈 사이에 개입할 명분을 주지 말자는 것. 흑수말갈이 발해의 침공을 받고 당에 원병을 청하게 되면 당은 그걸 구실로 흑수말갈에 진주할 것이고, 발해는 두 나라와 싸워야 한다.
[門藝諫不從, 奔唐. 由是貳於唐]
문예가 간언했으나 왕이 받아주지 않으므로, 문예는 당으로 도망갔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3년(722)
아무튼지간에 발해를 제치고 당과 독자적으로 수교하려 한 흑수말갈을 단죄하는 문제를 두고 생겨난 형제간의 알력은 결국 당과 발해 두 나라 사이의 외교문제로까지 번지고 말았다.
[門藝兵至境, 又上書固諫. 武藝怒, 遣從兄大壹夏代門藝統兵, 徵門藝, 欲殺之. 門藝遂棄其衆, 間道來奔, 詔授左驍衛將軍.]
문예는 군사가 국경에 이르렀을 때 또 글을 올려 거듭 간하였다. 무예는 노하여 종형(從兄) 대일하(大壹夏)를 보내어 문예를 대신해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문예를 소환해 죽이려 했다. 문예는 마침내 그의 무리를 버리고 샛길로 내달아 도망쳐오니 조서를 내려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을 제수하였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흑수말갈과의 국경까지 가서 이딴 글이나 보내고 있는 아우놈이 얼마나 한심스럽게 느껴졌을까. (나같아도 그럴 거야) 밤낮 남의 눈치만 보면서 사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 더 싫은 일이다. 무예왕은 기어이 지휘부 수장까지 바꿔가면서 흑수말갈에 대한 정벌을 단행했고, 문예는 형을 피해 도망쳐버렸다. 당에서는 얼싸 좋구나 하고 도망쳐온 그에게 좌효위장군을 제수한다. 그것은 발해왕이 지닌 좌효위대장군 다음가는 지위였다.
어찌 보면 이는 마치 고려 말년에 있었던 연씨 형제들의 불화를 떠올리게 한다. '형제싸움'이라는 점에서는 고려 말년의 연씨 형제들 불화를 떠올릴 수 있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연남생과는 달리 무왕은 발해 내부의 정권을 모조리 장악하고 있었으니까. 내부에서 분열이 생길 틈이 없는 것이다.
문예를 지지하는 반대세력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무예왕의 카리스마에 비할 바는 못 되었을 터, (괜히 시호를 '무왕'이라고 지어 올렸겠어?) 형제 사이에 누구 편을 들고 안 들고는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누구 입김이 더 센지 벌써 판가름났잖아. 더구나 선대의 '반면교사'를 생각한다면 연씨 형제들같은 망국의 내분이 두번씩이나 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말씀.
[武藝尋遣使朝貢, 仍上表極言門藝罪狀, 請殺之. 上密遣門藝往安西, 仍報武藝云 "門藝遠來歸投, 義不可殺. 今流向嶺南, 已遣去訖." 乃留其使馬文軌 · 葱勿雅, 別遣使報之.]
무예가 얼마되지 않아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고, 표를 올려 문예의 죄상을 상세히 말하면서 그를 죽여줄 것을 청하였다. 상은 몰래 문예를 안서(安西)로 보내고 무예에게 답하여 말하였다. "문예는 멀리서 귀순해 왔기에 도의상 죽이지는 못한다. 지금은 영남으로 유배보냈는데 이미 보냈으니 거의 도착했을 것이다." 이에 그 사신 마문궤(馬文軌)와 총물아(葱勿雅)는 머무르게 하고서 따로 사신을 파견해 그렇게 대답하였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무예왕의 태도는 의연하고, 자주적이며, 당당하다. 다른 걸 자주적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우리가 찾아야 될 것, 당연히 요구해야 될 것, 그것을 당연한 듯이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자주적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무예왕이 연호로까지 제정하며 내세웠던 유교사상을 떠올려보자. 분명 현종에게 보내는 국서도, 충(忠)과 성(誠), 그리고 형제간의 지켜야 할 도리 같은 유교 논리를 들며 문예의 '죄'를 말하고, (한 대 맞기 싫으면)빨리 잡아서 보내달라고 했을 것이다.
당은 사방 여러 나라의 수많은 학생들을 국자감에 불러모아 앉혀놓고 밥도 먹여주고 잠도 재워주고 하면서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학문이었던 유교ㅡ공자의 가르침을 설파하고 가르쳤지만, 정작 그들 자신이 유교적인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에는 진짜, 치사하다 싶을 정도로 인색했다. 유교적인 관습에 구애받지 않는 선비족 유풍이 당 황실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까닭이기도 했지만, 아들의 여자를 취해서 부인으로 삼고(그것도 거의 손녀뻘이었지) 유교에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도교 술법을 여기저기 행하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그토록 설파하던 유교의 가르침을 스스로 어기는데 그런 당 조정에게 발해라고 유교적 격식 차려가면서 굽실거릴 필요도 없었으려니와, 그래도 명분상으로는 발해보다는 좀더 큰 나라이기에 나름 예의 차려가며 저렇게 말을 걸어보신다.
[俄有洩其事者, 武藝又上書云 "大國示人以信, 豈有欺○之理? 今聞門藝不向嶺南, 伏請依前殺却."]
얼마 되지 않아 그 일을 누설한 자가 있었다. 무예는 또 글을 올려 말하였다. "대국은 믿음으로서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야지 어떻게 속일 수 있습니까? 지금 문예가 영남으로 향하고 있지 않다고 들었으니, 엎드려 청하건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죽여버리십시오!"
《구당서》 발해말갈전
"어떻게 날 속일 수가 있어?"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 중국에 대해 단 한번도 나온 적이 없는 파격적인 표현. 거의 대놓고 당 조정에게 항의한다. 이에 대해서도 당 조정은 어떻다 할 대책 대신 발해에 대해서 변명으로 일괄하기 바빴다.
[由是, 鴻臚少卿李道邃 · 源復以不能督察官屬, 致有漏洩, 左遷道邃爲曹州刺史, 復爲澤州刺史. 遣門藝暫向嶺南以報之.]
이 일로, 홍려소경(鴻臚少卿) 이도수(李道邃)와 원복(源復)은 관리들을 제대로 감독하고 살피지 못해 사실이 누설되었다 하여 도수는 좌천되어 조주자사(曹州刺史)가 되고 복은 택주자사(澤州刺史)가 되었다. 사자를 보내 대문예를 잠시 영남(嶺南)으로 향하게 하고서는 이로서 그에게 답하였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게다가 그런 말을 듣고도 발해왕에게는 한마디 말 못하고 왜 애꿎은 당 관리들만 탓하는 건데?
홀한주자사(忽汗州刺史) · 발해군왕(渤海郡王) 대무예에게 칙한다. 경이 형제끼리 서로 다툰 탓에, 문예가 곤궁하여 짐에게 왔으니 어찌 따르지 않으랴. 허나 그를 서쪽 변경에 둔 것은 경을 위해서였으니 또한 잘못은 아니라 할 수 있으며, 나름 제 자리를 얻은 셈이다. 왜냐면 경은 바다 모퉁이에 있으면서 당의 문화를 항상 배워왔는데 형제간의 우애 같은 것을 뭐하러 더 배울 필요가 있겠는가? 골육간의 정이란 깊은 것이니 스스로는 차마 죽이지 못할 것이다. 문예가 비록 잘못을 했어도 또한 그 뉘우침을 받아들여야지, 경은 기어이 동쪽으로 데려가겠다 청해놓고 죽이려 드는가. 짐은 천하에 효성와 우애를 가르쳐 왔으니(?) 이런 일을 어찌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경의 명성과 행실을 아까워해서 그런 것이지 어찌 도망친 자를 보호하려 하겠는가? 경은 나라의 은혜도 모르고 기어이 짐을 배반하려 한다. 경이 믿는 게 여기서 거리가 멀다는 것 말고 또 다른 것이 있는가? 근래 짐은 관용을 품고 중원을 보살펴왔다. 명을 받들지 않으면 언젠가는 무슨 일이 생길 것이지만, 경이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을 바친다면 화는 복으로 바뀔 것이라. 말은 공손하지만 뜻은 여전히 완미하여, 문예를 죽이고 나서야 귀국하겠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경의 표문을 보니 또한 충성스러움이 있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만만치 않구나. 지금 내사(內使)를 보내어 짐의 생각을 알리되 일일이 다 구술하라 시켜놨다. 경의 사신 이진언(李盡彦)도 짐이 친히 처분했음은 모두 다 알 것이다. 가을이 차가워지는데 경과 아관(衙官), 수령(首領), 백성들은 모두 평안하기를. 아울러 최심읍(崔尋挹)도 함께 동행해 보낸다. 편지를 보내지만 그 뜻이 다 미치지는 못한다.
《해동역사》에 기록된, 이때 당 현종이 무왕에게 보낸 성명문 내용이다. 북송 초기(982년)에 편찬된 《문원영화》라는 책에 수록된 국서 내용인데, 어찌 보면 협박하는 것도 같고, 어떻게 보면 무왕을 달래는 것도 같고.... 그런데 현종 황제..... 문예를 돌려달라는 요청에 대답하는 거 아니었어? 중간에 갑자기 나라의 은혜가 왜 나와?
개원 13년(725) 5월에 발해왕 대무예[大武毅]의 동생인 대창발가가 와서 조회하자, 좌위위원외장군(左威衛員外將軍)을 제수하고 자포(紫袍), 금대(金帶), 어대(魚袋)를 하사한 다음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인안 7년 병인(726). 무왕은 일단은 강경책을 잠시 접기로 하고, 아우 대창발가를 당에 사신으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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