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bbs_id=BBSMSTR_000000000200&ntt_writ_date=20111208&parent_no=1
발해는 3대 문왕 시기에 당과의 관계개선을 이뤘으며,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등 내실 있는 국가체제를 운영했다. 이후 10대 선왕 시기에 이르러서는 최대 전성기를 맞아 5경 15부 62주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다. 이 시기의 영토는 고구려 전성기의 1.5배나 되는 광활한 영역이었으며, 당시 중국에서는 ‘해동성국’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정효공주묘지탁본. 아버지인 문왕을 황상이라 표현해 황제국의 위상을 보여준다.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에 있는 발해시대 수도 상경성.
<31>발해 문왕 치세·선왕 해동성국 완성
광활한 영토… 드높은 기상 … 海東의 빛 발해
2011. 12. 08 00:00 입력 | 2013. 01. 05 07:28 수정
중국 지린성 허룽현 룽수이향 룽하이촌 서쪽 룽터우산에 있는 발해 문왕의 넷째 딸 정효공주 묘.
발해는 3대 문왕 시기에 당과의 관계개선을 이뤘으며, 선진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등 내실 있는 국가체제를 운영했다. 이후 10대 선왕 시기에 이르러서는 최대 전성기를 맞아 5경 15부 62주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다. 이 시기의 영토는 고구려 전성기의 1.5배나 되는 광활한 영역이었으며, 당시 중국에서는 ‘해동성국’이라 칭송하기도 했다.
발해의 대당관계 개선
발해는 무왕 시기 등주 공격과 마도산 전투로 인해 당과의 관계가 악화됐으나 점차적으로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당을 측면에서 견제하던 돌궐세력이 약화돼 당과 계속 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발해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당도 발해에 대한 공격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동북아지역에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지 않는 현상 유지책으로 정책 방향을 바꿨다. 양국 간에 국교가 재개됐으며, 737년 무왕이 죽고 문왕이 즉위한 뒤에는 발해와 당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졌다. 수차례 당과 발해의 사신이 교류했으며, 발해에서는 당의 선진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해 내치에 힘을 쏟았다. 대흠무의 시호가 ‘문왕’인 것은 그의 문치주의 정책에 대한 표현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문왕 대흠무의 즉위와 북진정책 계승
발해의 3대 왕인 문왕 대흠무(大欽茂)는 737년에 즉위해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했고, 774년 보력(寶曆)으로 개원(改元)했다가 다시 대흥의 연호를 사용했다. 연호의 사용은 발해의 국력이 크게 신장돼 당과 대등한 위상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나타낸다.
문왕은 아버지 무왕의 북진정책을 계승했다. 741∼745년에 발해는 남아 있던 말갈부족인 불열·월희·철리말갈 등에 대한 복속을 완성했고, 불열지역에는 동평부(東平府), 철리지역에는 철리부(鐵利府), 우루지역에는 정리부(定理府)와 안변부(安邊府), 솔빈지역에는 솔빈부(率賓府)를 둬 말갈에 대한 복속과 지방통치에 심혈을 기울여 지방제도를 성립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이자, 당과 대등한 황제국
문왕시대에는 영토 확장과 체제 정비를 실시해 발해 사회의 발전을 이뤄냈다. 사회발전에 자신감을 표현한 것은 바로 ‘천손’과 ‘황상’이란 표현이다. 천손이란 표현은 일만복(壹萬福)을 대사로 한 발해사신단이 771년 일본에 도착해 이듬에 일본 국왕에게 전달한 발해왕의 국서에 등장한다. 발해가 천손 칭호를 사용한 것은 고구려의 천손 의식 계승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또한 발해 정혜 공주와 정효 공주의 묘지에 나타나는 ‘황상’ ‘대왕’이란 표현도 주목되는데, 이것은 바로 문왕을 지칭하는 것이다. 황상이란 단어는 신하가 황제를 부를 때에 사용하던 호칭으로 발해에서 황제 칭호가 사용됐음을 증명해 준다. 현재 중국 정부가 발해의 역사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인식하는 대목과 배치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발해는 엄연히 당과 대등한 자주독립국인 황제국가였다.
정효공주묘지탁본. 아버지인 문왕을 황상이라 표현해 황제국의 위상을 보여준다.
한편 일본의 정사류인 ‘속일본기’에는 759년 발해 사신을 ‘고려번객’으로 표기했고, 이후 778년까지 발해를 고려와 함께 병용해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은 발해가 727년 일본에 처음 사신을 보냈을 때부터 발해는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하였다”라고 표현한 것과 연결되는 것으로, 문왕 때에 실시된 체제정비에 따라 국력이 크게 신장해 고구려의 위상에 버금가는 국가였음을 강조한 것이라 하겠다.
안록산(安祿山)의 난과 발해의 천도
발해는 2대 무왕 시기(732년 전후)에 구국인 동모산(돈화시 일대) 일대에서 중경의 현주로 천도했고, 문왕이 즉위한 후 756년 무렵에는 상경으로 천도했다. 한편 당에서는 755년 11월 안사(安史)의 난이 발발해 이후 8년간 혼란 상황에 빠졌다. 이를 계기로 변경에만 설치됐던 번진들이 내지로 확산됐다.
중국 흑룡강성 영안시에 있는 발해시대 수도 상경성.
안록산은 일찍이 당의 발해 방면 책임자로서 신라와 함께 발해를 견제했기 때문에, 발해는 안사의 난을 예의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발해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은 난에 대한 파동이 일본에까지 미칠까 두려워 신라침공 계획을 강구하기도 했다. 일본도 안사의 난에 따른 대비책을 강구한 것으로 보아, 발해의 문왕도 안록산이 동진해 발해를 공격해 올 수 있다는 판단을 염두에 뒀을 것으로 생각된다.
발해는 건국한 이래로 60여 년 동안 동북쪽으로 영토확장을 이뤘다. 따라서 통치의 중심지를 동북쪽으로 옮길 필요성이 제기됐다. 항상 문제시 된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를 위해 수도를 상경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농후하다. 무왕의 북진정책을 계승한 문왕대 초반에는 불열·월희·철리말갈을 복속했다. 하지만 여전히 흑수말갈의 복속이 최대 과제였다. 발해의 배후에 위치한 흑수말갈은 732년 발해의 등주 공격 이후 10년간 대당교섭을 중단했다. 문왕 즉위 이후 발해와 당나라의 관계가 개선됨에 따라 흑수말갈은 다시 741~752년간에 7차례 당에 조공했다. 발해로서는 당과 흑수말갈의 접근을 또다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발해가 수도를 상경으로 옮긴 후 문왕 말기까지는 흑수말갈의 대당조공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발해가 상경 천도를 통해 흑수말갈의 통제를 강화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이렇게 볼 때, 상경 천도의 목적은 안사의 난에 대한 대비태세 목적과 함께 당의 약화를 틈타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왕 대인수(大仁秀) 해동성국을 완성
발해의 영역 확장은 문왕 전반기에 일단락됐다. 문왕 대에는 왕권 강화를 수반하는 지배체제의 정비와 상경으로의 천도 과정을 겪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발생했고, 이는 문왕 사후 권력투쟁의 양상을 띠고 25년간 지속됐다.
문왕이 죽은 이후 성왕·강왕·정왕·희왕·간왕이 25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왕위를 계승하게 된 것도 치열한 권력투쟁의 결과였다. 이런 혼란 속에서 간왕에 이어 그의 종부이며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 대인수가 선왕으로 즉위했다.
선왕은 즉위 직후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말갈제부(靺鞨諸部)를 공략했다. 북쪽의 말갈제부는 발해의 내분기를 틈타 독자적으로 당과 교섭을 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왕은 먼저 이들을 복속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월희말갈 지역에 회원부(懷遠府)와 안원부(安遠府)가 설치됐다. 한편 남쪽으로는 신라를 공격해 영역을 넓혔다. 신라에서는 이러한 발해의 남진을 막기 위해 826년 패강(浿江)에 300리나 되는 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선왕은 흑수말갈을 비롯한 대부분의 말갈세력을 복속시키고, 또 요동지방에 대한 당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 요하 유역까지 진출해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娠州)를 설치했다. 이후 요동 진출을 본격화해 10세기 초에 거란이 이곳으로 진출하기까지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계속 유지했다.
선왕의 대외정복을 바탕으로 발해는 고구려의 1.5배가 되는 최대의 판도를 형성했으며, 이에 맞춰 5경 16부 62주의 지방제도가 완비됐다. 그 결과 발해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받기에 이른다.
<강성봉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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