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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발해 무왕 적극적 대외정책

영토 넓히는 `氣센 행군' 등주만 상륙 당나라 공격 `氣찬 진군'

2011. 12. 01 00:00 입력 | 2013. 01. 05 07:26 수정



장문휴의 등주만 상륙작전 상상도.


산동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이었던 등주만의 전경.


무왕 대무예의 즉위와 영토확장

719년 고왕 대조영이 죽은 뒤 그의 아들 대무예(大武藝)가 왕위에 올라 무왕(武王)이 됐다. 무왕은 연호를 인안(仁安)이라 하면서 적극적인 대외 확장을 시도해 영토를 크게 넓혔다. 당시 발해의 영토 확장 범위는 727년 일본과 처음 통교하면서 보낸 국서에 잘 나타나 있다. “무예가 외람되이 열국을 주관하고 제번을 거느려,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잇게 되었습니다.”(‘속일본기’) 이러한 표현은 발해가 대국의 맹주가 됐음을 과시하려는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이 무렵 발해가 중동부 만주지역 일대의 고구려 유민과 속말부·백산부·백돌부·안거골부·호실부 등 다수의 말갈 부족들을 복속시키고 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무왕 때에는 ‘구당서’의 기록을 통해 이 시기의 강역이 사방 2000리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동모산에서 건국된 이후, 동으로 목단강을 건너 두만강 지역에 이르고, 서쪽으로 압록강 하구와 길림 및 장춘을 넘어섰으며, 북으로 철리, 월희와 인접했으며, 남으로 신라와 접경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무왕의 대외 확장 정책은 주변 종족과 국가에 위협이 되어 이들의 관계는 줄곧 긴장상태가 됐다. 726년 무왕은 군대를 보내 북쪽의 흑수말갈로 진격해 말갈의 여러 부를 통일하려고 시도하기에 이른다.

당의 흑수말갈 포섭작전

당은 거란·해·돌궐이 일시 쇠퇴한 틈을 이용해 발해의 배후에 있는 흑수말갈을 포섭하려 했다. 726년 흑수부(黑水府)를 설치하고 당의 관리를 파견해 흑수말갈을 감독·조종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했다. 당은 또다시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이용해 흑수말갈을 통해 발해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당과 흑수말갈이 연결된다면 그것은 앞뒤에서 발해를 압박하는 형세가 될 수 있었고, 만약 이를 용인하게 되면 발해의 세력 하에 있는 다른 말갈 부족들까지도 이탈해 나가 당의 영향권 안으로 귀속될 수 있었다. 이는 발해의 존립에 치명적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무왕은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단행키로 했다.

무왕은 그의 동생인 대문예(大門藝)와 외삼촌인 임아(任雅)로 하여금 군사를 징발해 흑수말갈을 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동생 대문예는 이를 반대했다.

대조영의 둘째 아들인 대문예는 705년 당에 볼모로 보내져 장안에 숙위하면서 당의 선진 문물과 학문을 익힌 인물로, 713년에 발해로 돌아와 정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문예는 친당적 입장을 고수하면서 당의 세력이 강대함을 이유로 흑수말갈 토벌을 반대했다. 무왕은 동생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된 강경책을 고수하며 공격을 명령하자, 대문예는 군사를 버리고 당으로 망명하기에 이른다. 

반역자가 된 무왕의 동생, 대문예

무왕은 대일하를 흑수말갈과의 전선에 파견해 대문예의 임무를 대신케 하고 대문예를 소환해 제거하려 했다. 그러나 신변의 위협을 느낀 대문예는 당으로 도피해 당 현종에게 보호를 부탁했고, 당 현종은 대문예를 좌효위장군으로 임명해 그를 보호했다. 반면 무왕은 친당적 입장을 고수한 대문예를 제거하지 못함으로써 흑수말갈과의 전쟁에 국력을 집중시킬 수 없게 됐다. 결국 흑수말갈 토벌군을 철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무왕은 당에 마문궤·총물아를 사신으로 보내 당 현종에게 수차례 대문예의 죄상을 알리고 대문예를 죽이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당 현종은 발해의 사신들을 당 장안에 머물도록 하고 이원복을 발해로 파견해 무왕에게 “대문예는 곤란에 처하여 당에 투항했으니 죽일 수 없다. 현재 그를 이미 영남으로 귀양보냈다”고 말하며 무왕을 달래려고 애쓰기 바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 큰 사건이 발생했다. 당에 인질로 가 있던 무왕의 큰아들 대도리행이 갑작스럽게 죽는 일이 발생했다(728년 4월). 대도리행은 차기 보위를 이어받을 왕위계승자의 신분이었다. 그러한 대도리행이 이유도 불분명한 채 사망하게 되자 발해의 왕위계승 구도는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무왕은 더욱 은밀하고 적극적인 계획을 세웠다. 곧 당나라의 요지를 직접 선제공략하기로 한 것이다. 공략의 대상이 된 곳은 바로 산동반도에 있는 당의 국제무역항 등주(登州·지금의 봉래)였다. 

대외관계의 돌파구, 발해의 등주만 상륙작전

732년 드디어 무왕은 당의 전략적 요충지인 등주를 공격하기에 이른다. 등주는 산동반도 북부 해안, 묘도해협(廟島海峽)에 접하는 항구도시로 발해와 신라의 해상교역 요충지이기도 했다. 신라는 이곳에 사신·상인·유학생들을 위해 신라방·신라소·신라관 등을 지어 머물 수 있게 했으며, 발해 또한 등주에 발해관을 두기도 했다. 

이처럼 한반도와의 교역 요충지인 등주는 중국에 의해서도 주요한 무역항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 진출의 군사적 요충지로 긴요하게 활용됐다. 대체로 중국 수군의 출병지가 바로 이 등주였기 때문이다.

수문제가 598년 육·해군 30만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수군총관 주라후(周羅喉)는 등주에서 출항해 서해를 건너 평양으로 침공했었다. 수양제의 2차 고구려 침략, 당 태종과 고종의 고구려·백제 침공도 바로 이 등주로부터 출발하는 서해횡단항로를 이용했다.

발해의 무왕은 육로를 통해 군사를 이동시키면 당에 발각될 여지가 있어 대응할 시간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은밀히 군사를 이동시켜 기습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이 등주를 목표로 삼았다. 드디어 무왕은 장수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발해의 수군을 거느리고 등주만에 상륙해 자사 위준(韋俊)을 살해하고 등주를 점령했다.

당 현종은 갑작스러운 기습작전에 당황했지만, 망명온 대문예를 유주(幽州)에 파견해 군사를 징발토록 하고 이를 막도록 대응시켰다. 한편으로는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을 신라에 보내 군사를 징발해 발해의 남쪽 지역을 공격하게 했다. 이에 대해 신라는 김유신의 손자인 김윤중을 비롯해 그의 아우인 김윤문 등 4장군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군사와 회맹해 발해를 치도록 명했다. 하지만 겨울에 출병해 추운 날씨와 험한 도로 사정 때문에 신라는 군사의 절반 이상이 사망하는 등 참담한 실패를 겪으며 철수하기에 바빴다.

신라와 당의 연합군 공격을 받게 된 발해 무왕은 겨울이 지나면서 이들의 공격이 무력화되자 다시 마도산(하북성 산해관 부근) 일대를 공격했다. 이번 공격은 당시 돌궐과 거란이 당과 대립하는 형세 속에서 이뤄졌다. 발해는 거란을 지원하면서 마도산에서 당과 격돌했지만, 연합세력의 한 축인 거란군이 당 토벌군에 섬멸되면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이처럼 2년여에 걸친 발해의 대당 정벌은 비록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내부적으로는 친당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계기가 됐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왕권을 강화해 왕조 초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해동성국의 기반을 마련할 만큼 발해왕조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강성봉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수료)>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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