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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4>후고려기(後高麗記)(7)
2009/04/25 06:25

발해라는 나라의 성격상, 그들은 고려라는 나라의 계승자이자 그들이 차지했던 옛 영토, 그리고 옛 풍속의 주인이었다. 그들이 변방 말갈인이든 평양성 고려인이든, 그들은 그들이 계승했다 자처하는 조상들의 옛 문화를 이어받고
조상들의 옛 땅을 이어받아야 할 의무와 사명이 있었다.
 
대중상, 그리고 그의 계승자라 하는 고왕 대조영, 대조영의 아들 무예에 이르기까지, 발해인들은 우선적으로 고려의 모든 것을 다물(수복)하는 것을 왕가의 지상과제이자 제1의 국시(國是)로 삼았다. 뒤에 얘기할 무왕의 국서에도 드러나지만, 발해인들에게 고려의 옛 땅과 옛 풍속을 수복하는 것은 온 나라를 풍요롭게 하고 백성들을 즐겁게 해주었다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또 다른 나라에까지 내세울만한 자랑거리였다.
 
[十四年春正月癸亥, 改封契丹松漠郡王李召固爲廣化王, 奚饒樂郡王李魯蘇爲奉誠王, 封宗室外甥女二人爲公主, 各以妻之. 二月庚戌朔, 邕州獠首領梁大海ㆍ周光等, 據賓ㆍ橫等州叛, 遣驃騎大將軍兼內侍楊思勖討之. 三月壬寅, 以國甥東華公主降於契丹李召固.]
14년(726) 봄 정월 계해에 거란의 송막군왕(松漠郡王) 이소고(李召固)의 봉호를 고쳐 광화왕(廣化王)으로 하고, 해의 요악군왕(饒樂郡王) 이로소(李魯蘇)는 봉성왕(奉誠王)이라 하였으며, 종실의 외조카딸[外甥女] 두 사람을 공주로 봉하여 각기 아내로 삼게 하였다. 2월 경술일 초하루, 옹주(邕州)의 요수령(獠首領) 양대해(梁大海), 주광(周光) 등이 빈(賓)ㆍ횡(橫) 등의 주를 거점으로 반역하니 표기대장군 겸 내시 양사욱을 보내어 토벌하게 했다. 3월 임인일에 국생(國甥) 동화공주(東華公主)를 거란의 이소고에게 시집보냈다.
《구당서》 현종본기 개원 14년(726)
 
이상 대당(大唐) 특파보고. 당조에서 거란과 해에 대해 유화책을 펴고 있는 모습 되시겠다.
 
14년(726) 4월 을축일에 대도리행이 와서 조회하자,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원외치(員外置)를 제수하고 머물러 숙위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인안 8년. 무왕은 태자 대도리행을 보내 당 조정에서 숙위시킨다. 태자는 곧 나라를 이어받을 왕위서열 1위, 발해 말로는 부왕(副王)이다. 가독부라 불리는 왕의 자리에 버금가는 지위라는 의미다. 전에도 고려의 고국원왕과 영류왕이 세자를 연과 당에 보내서 천자를 알현시켰고, 광개토태왕에게 복수할 생각에 눈이 벌개져있던 백제 아신왕은 전지태자를 왜국에 '인질'로 보냈다.
 
태자를 다른 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던지, 다른 나라에 머물러두게 하고 다른 나라 왕의 옆에서 머무르게 한다던지 하는 것은 별로 좋은 성질의 것은 아니다. 고려 때는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여섯 명의 국왕들이 '둘루게(인질)'라고 해서 세자시절부터 원에 가서 살다가 왕이 죽거나 물러나거나 하면 본국으로 돌아와 즉위했는데, 충선왕과 공민왕을 빼면 제대로 된 왕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 때문에 고려 문화가 몽골풍 따위에 오염되기도 했다 (물론 고려 문화가 몽골문화를 오염시키는 일도 숱했지만). 다음 왕이 될 왕자들이 자신들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처음부터 싹을 잘라놓으려는 일종의 세뇌작업인 셈이다.
 
대도리행은 무왕이 즉위하자마자 부왕(태자)으로 책봉되고 계루군왕의 임무를 행했는데, 성인 대접을 해주던 열다섯의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고 해도 숙위하러 당에 갈 때의 나이는 15+6=21. 스물 한 살이면 알것 다 알고 몰라도 될 것까지 다 아는 나이다. 양원왕 때에는 사춘기도 안 된 여덟살짜리를 왕위에 앉혀놓고 섭정하는 일도 있었으니 태자로 책봉될 당시의 대도리행의 나이를 지금으로서는 확실하게 알 방법은 없다. 하지만 태자로 봉해졌을 때, 그리고 당에 보내졌을 때의 나이, 그리고 식견만큼은 한참 어릴 때부터 본국이 아닌 이국에서 이국 풍속에 물들어 살아야 했던 고려 둘루게들보다는 자신의 지위와 역할,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은 확실하게 잡혀 있었을 것이다. 무왕이 자신의 태자를 당에 보낸 것도 어찌 보면 당시로서는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당에서 천자 주변의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거기서 배워 제왕의 자질을 갖춰오라는 것도 있지 않았을까. (마침 이 무렵에는 당 태종 시대의 정치철학을 담은 '제왕학의 고전' 《정관정요》가 형성되고 있었다)
 
어쩌면 대도리행을 당에 숙위시킨 것은 당에 가서 그들의 정세를 살피고 앞으로의 추이, 이를테면 '너는 즉위한 다음에 어떻게 다스릴테냐', '네가 보기에 당은 어떤 점이 우리와 다른 것 같으냐'라는 명제를 대도리행 스스로 생각해오라는 아버지 무왕의 의지였을 지도 모른다. 의외로 대도리행의 세력이 아버지 무왕을 능가할 정도로 커져서(조선조 영조와 사도세자, 인조와 소현세자처럼) 무왕이 그를 견제하고자 본국으로부터 떨어뜨려놓고자 했을 수도 있다. 추측은 자유지만 답은 하나뿐. 지금 그 답은 알 길이 없다. 그래서 답답하다.
 
다만 대도리행이 당에 도착한 4월 을축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 태자소사(太子少師)였던 기왕(岐王) 이범(李範)이 죽고, 신축일에는 돌궐족을 막기 위해서 정주, 긍주, 막주, 역주, 창주의 5주에 군을 설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5월쯤에 대당에서 실시한 인구조사결과 관호(管戶)가 706만 9565호, 관구(管口)는 4141만 9712구였다는 소식이 《구당서》에 실려 전한다. 이밖에 뭐 특기할 만한 것은 6월 무오에 나무가 뽑히고 집이 날아갈 정도의 강풍이 불었다는 것, 7월에는 전수(瀍水)라는 강물이 범람해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가을부터는 가뭄과 서리에 홍수가 있더니 겨울 10월에 대뜸 인주(麟州)가 폐쇄되고. 경신일에 현종이 여주(汝州)의 광양탕(廣成湯)에 행차했다가 기사일에 동도 낙양으로 돌아왔다.... 는 정도. 
 
[十一月甲戌, 突厥遣使來朝. 辛丑, 渤海靺鞨遣其子義信來朝, 並獻方物.]
11월 갑술에 돌궐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다. 신축에 발해말갈이 그 아들 의신(義信)을 보내어 내조하고 아울러 방물을 바쳤다.
《구당서》 현종본기, 개원 14년 병인(726)
 
《구당서》에 보면 발해의 왕자 의신이 당에 온 것은 11월 신축이라고 했고, 《책부원귀》에서는 11월 기해라고 해서 차이가 있다. 갑술이나 신축은 다 날짜인데, 돌궐 사신이 당에 오고 꼭 나흘 뒤에 발해의 왕자가 당도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15년(727) 4월 정미일에 칙명하였다. “대창발가는 오래도록 머물러서 숙위하였으니 석방하여 번국(藩國)으로 돌아가게 하라.” 경신일에 대창발가에게 양평현개국남(襄平縣開國男)을 책봉하고 비단 50필을 하사하였다. 수령 이하의 사람들에게 각각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대무예가 아들 대도리행(大都利行)을 보내어 와서 조알하고 아울러 초서피(貂鼠皮)를 바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대무예에게 교서를 주어 위로하고 채련(綵練) 1백 필을 하사하였다.
《책부원귀》 권제971, 외신부(外臣部) 조공4
 
인안 9년은 대도리행이 당에 간 바로 이듬해. 마치 대도리행이 당에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무왕의 아우(대도리행에게는 삼촌) 대창발가가 귀국한 것. 둘 사이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8월에 발해왕이 그의 동생 대보방(大寶方)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였다.
《책부원귀》
 
아무튼 넉 달 정도 지나서 무왕은 다시 아우 대보방(大寶方)을 당에 사신으로 보냈고, 이 과정에서 당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다.
 
[庚寅, 渤海郡王使首領高齊德等八人, 來着出羽國. 遣使存問, 兼賜時服.]
경인(21일)에 발해군왕의 사신 수령(首領) 고제덕(高齊德) 등 여덟 명이 출우국(出羽國, 데와노쿠니)에 와서 닿았다. 사신을 보내어 온 이유를 묻고 겸하여 시복을 주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권제10, 신귀(神龜, 진키) 4년(727) 9월
 


출우국(데와노쿠니)이라고 하면 대충 저기쯤 된다. 지금의 일본 야마가타와 아키타 현에 해당하는 곳이라는데, 이때 일본의 수도가 평성경(平城京, 헤이죠쿄), 지금의 나라 현 나라 시에 있었으니까 이 무렵에는 촌구석도 저런 촌구석이 없었을 터다. 그런데 곧장 나라로 가지 않고 왜 저기로 갔지?

[渤海郡王使高齊德等八人, 入京.]
발해군왕의 사신 고제덕 등 여덟 명이 서울[京, 미야코]로 들어왔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0, 신귀(神龜) 4년(727) 12월 정해(20일)
 
석 달 뒤, 수도 평성경에 입성한 발해 사신들은 거의 꾀죄죄한 몰골이 되어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한마디로 거지꼴을 하고 있었다. 명색이 한 나라의 사신인데 어쩌다가 저런 개꼴이 됐는지 《속일본기》에 기록된 그들의 사연은 이러했다.
 
[丙申, 遣使賜高齊徳等衣服冠履. 渤海郡者舊高麗國也. 淡海朝廷七年冬十月, 唐將李勣伐滅高麗. 其後朝貢久絶矣. 至是渤海郡王遣寧遠將軍高仁義等廿四人朝聘, 而着蝦夷境, 仁義以下十六人並被殺害, 首領齊德等八人僅免死而來.]
병신(29일)에 사신을 보내어 고제덕 등에게 의복과 관(冠), 신발[履]을 주었다. 발해군은 옛 고려국이다. 담해(淡海, 오우미) 조정 7년(668년) 겨울 10월에 당의 장수 이적(李勣)이 고려를 쳐서 멸했다. 그 뒤로는 조공이 오랫동안 끊어졌었다. 이때에 이르러 발해군왕(渤海郡王)이 영원장군(寧遠將軍) 고인의(高仁義) 등 24명을 보내어 조빙(朝聘)했는데, 하이(蝦夷, 에미시)의 땅[境]에 닿는 바람에 인의 이하 16인은 모두 살해당하고 수령 제덕 등 여덟 명만이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왔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0, 신귀(神龜) 4년(727) 12월
 
하이(에미시)의 땅이란 곧 훗카이도를 말한다. 지금은 일본령에 편입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일본에서도 미지의 땅으로 간주되던 곳. 무엇보다도 한반도에서 가야와 백제의 도래인들이 건너오기 전에 이 일본열도를 지배하던 원주민ㅡ
아이누라 불리는 종족들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송서》왜국전에서 왜왕 무(武)가 보낸 상표문 중에 "동쪽으로 털보[毛人]의 나라 55개국을 정벌하였고" 라고 말한 털보 즉 모인이 이들 하이(에미시)족. (참고로 <모노노케히메>에 나오는 주인공 아시타카도 저 하이족의 일원이다.) 
 

<아이누족. 1904년경에 찍은 것으로 지금의 일본인과는 인종 자체가 달랐다.>
 
발해와 일본이 한창 교역의 물꼬를 트던 8세기 아이누족 즉 하이는 지금의 일본 혼슈까지 그들의 활동 영역으로 삼고 있었다. 왜왕 무가 그들을 털보[毛人]라고 불렀듯(毛人의 일본어 훈독도 '에미시'이다), 아이누족 남자들은 대부분이 턱수염을 길렀고 얼굴의 입 주변이나 손등에서 팔꿈치까지 문신을 새겼다. ('蝦夷'라는 말도 그들의 덥수룩한 수염이 흡사 새우를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표기했다는 설이 있음) 그리고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넣은 옷을 입었는데 대체로 나무껍질이나 가죽으로 만들어서 온통 늘어지게 했다.

'아이누'라는 말은 그들 언어로 '사람'이라는 뜻이지마는, 뭐랄까 자신과 좀 다르면 일단 '야만인'으로 취급하고 보는
인간의 특이한 습관 탓에 아이누족은 일본뿐 아니라 우리 나라와 중국에까지 야만스럽고 징그러운 야만인의 모습으로 비친다. 오늘날에는 일본의 북해도(홋카이도)뿐 아니라 러시아의 사할린, 쿠릴 열도 등지에 퍼져 사는데, 북해도(훗카이도)의 아이누 족은 대부분 일본인과의 혼혈로 순수혈통은 극히 적다(어쩌면 거의 없다고 해야 할지도). 지금이야 번듯하게 '훗카이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그 땅의 원래 이름은 '하이지(蝦夷地, 에조치)', 즉 '하이(에미시)의 땅'이라는 뜻이다. 자신들과는 다른 족속이라는 차별의 뜻이 가득 담겨있는 이름이다.
 
15세기, 늦어도 18세기까지도 아이누족은 훗카이도를 중심으로 동쪽으로 캄차카 반도 남쪽, 북쪽으로 사할린 남쪽, 남쪽으로 지금의 일본 본주(本州, 혼슈) 동북쪽까지 퍼져 살고 있었다. (발해 사신들이 도착한 출우국도 엄밀한 의미로는 아이누의 땅으로 '하이지'였다는 말이지.) 이 무렵에는 발해의 권역에 속했던 흑룡강 유역에까지 교역하고 있었다니 그 활동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고도 남지만, 지역에 따라서도 사할린과 쿠릴 열도, 북해도(홋카이도)의 아이누족이 문화적으로 차이가 많단다.
 
아이누족은 일본뿐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었다. 소련 정부는 연해주의 까레이스키(고려인)를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면서 그들도 포함시켰다.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정부를 수립한 일본도, 아이누를 무슨 원시인이나 미개인 수준으로밖에 여길 뿐이었다. 아이누족의 전통적인 생활 관습을 강제로 금지시키고, 그들이 원래 생업으로 삼아온 어업을 금지시키고 강제로 목축과 농경을 하게 했다. 미국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한 것처럼
북해도(훗카이도)를 개척한다며 아이누족의 땅을 빼앗았다. 아이누족이 겨우 그들의 생활방식을 보존할 기회라도 얻게 된 것은 1997년에 일본 정부가 발표한 '아이누 문화진흥과 아이누 전통 등에 관한 지식의 보급 및 계발에 관한 법률', 소위 '아이누문화진흥법'이 생겨나면서부터.
 
《속일본기》에 보면, 이때 일본으로 들어온 발해의 사신들은 하필 하이(에미시)의 땅에 도착하는 바람에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이(에미시)는 발해에서 온 이방인들(하필이면 일본인들과 생김새가 닮은 것들)을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하고 모두 잡아 죽이려 했다. 이 과정에서 발해 사신단의 총책임자 즉 대사였던 고인의와 16명의 발해 사신들은 본국은커녕 원래의 목적도 수행하지 못하고 잡혀 죽었고, 살아남은 몇몇 사람들만이 간신히 평성경에 들어왔다. 이들은 정월 3일에 이르러 평성경의 태극전(太極殿, 다이쿄쿠덴)에서 일본의 여러 왕족과 신료들과 함께 왜황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보름이 조금 안 되어 무예왕의 국서를 왜황에게 전한다.
 
[甲寅, 天皇御中宮, 高齊徳等上其王書并方物. 其詞曰 "武藝啓. 山河異域, 國土不同, 延聽風猷, 但増傾仰. 伏惟大王, 天朝受命, 日本開基, 奕葉重光, 本枝百世. 武藝忝當列國, 濫惣諸蕃, 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 但以天崖路阻, 海漢悠悠, 音耗未通, 吉凶絶問, 親仁結援, 庶叶前經, 通使聘隣, 始乎今日. 謹遣寧遠將軍郎將高仁義, 游將軍果毅都尉徳周, 別將舍航等廿四人, 齎狀, 幷附貂皮三百張奉送. 土宜雖賎, 用表獻芹之誠. 皮幣非珍, 還慚掩口之誚. 主理有限, 披瞻未期, 時嗣音徽, 永敦隣好." 於是高齊德等八人並授正六位上, 賜當色服. 仍宴五位已上及高齊德等, 賜大射及雅樂寮之樂. 宴訖賜祿有差.]
 
갑인(17일)에 천황(天皇, 미카도)이 중궁에 행차하였다. 고제덕 등이 그 왕의 글과 함께 방물을 바쳤다. 그 글에서 말하였다. "무예(武藝)가 아룁니다. 산하(山河)는 이역이고 국토(國土)는 같지 않기에, 풍교(風敎)와 덕화(德化)에 대해서 듣고는 우러르는 마음만 더하였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왕께서는 천조(天朝)에서 명을 받아 일본에서 나라를 열어 성스러운 덕을 대대로 이어 빛내었으며, 자손들이 창성해서 대대로 쇠하지 않았습니다. 저 무예는 열국(列國)의 자리에 있으면서 외람되이 제번(諸藩)을 다스려 고려의 옛 강역을 수복하였고, 부여의 남은 풍속을 이어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만 하늘 끝에 있어서 길은 막히고 큰 바다는 끝없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소식을 통할 수 없었던 탓에 길흉(吉凶)을 묻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어진 이웃 나라와 선린(善隣) 관계를 맺는 것은 옛날의 법도를 따르려고 하였습니다만, 사신을 보내어 통호하는 것이 오늘에서야 시작되었습니다. 삼가 영원장군(寧遠將軍) 낭장(郞將) 고인의(高仁義), 유격장군(游擊將軍) 과의도위(果毅都尉) 덕주(德周), 별장(別將) 사나루(舍那婁) 등 24인을 파견하여 서장(書狀)을 싸 가지고 가게 하고, 아울러 표피(豹皮) 300장을 받들어 싸 가지고 가게 합니다. 보내는 토산물이 비록 천하기는 하지만, 이것으로써 하찮은 것이나마 바치는 정성을 표합니다. 예물이 진귀하지 않아서 도리어 비웃지나 않을까 부끄럽습니다. 다스림을 주관함이 한계가 있어 우러러뵈올 기약은 없지만, 때때로 소식을 받들어 올려 영원토록 우호를 두텁게하고자 합니다." 이에 고제덕 등 여덟 명에게 아울러 정6위상을 내리고 해당하는 색복을 주었다. 이에 5위 이상과 고제덕 등에게 잔치를 열어주고 대사례[大射]를 열어주었으며 아악료(雅樂寮)의 악을 연주하였다. 잔치가 끝나고 녹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제10, 신귀(神龜) 5년(728) 정월
 
무예왕은 국서 안에서 왜황 즉 성무(聖武, 쇼무) 천황을 '대왕(大王)'이라 부르고 있다. 발해와 마찬가지로 일본도 당의 책봉을 받고 있는 나라라고 인식하면서, 발해와 일본을 동격으로 보고 왜황을 대하는 것이다. 국서와 함께 왜황에게 준 표피, 즉 담비 가죽 300장은 나중에 발해에서 당에 보낸 사신이 바친 것(바다표범가죽 다섯 장, 담비가죽 세 장)에 비하면 제법 많은 양인데, 바다 건너 일본으로의 길을 뚫고 일본과 수교함으로서 흑수말갈과 신라를 견제하고자 한 무왕의 의도가 깔려 있다 할 것이다. 점차 친당노선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 흑수말갈과, 발해와의 변경에 장성을 쌓고 발해를 가상적국으로 간주하는 신라, 그리고 서쪽의 당까지.
 
<발해국 흥망사>라는 책을 쓴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는 이 사실을 가리켜, 이때의 동해는 발해와 말갈, 신라와 일본을 갈라놓는 해역이 아니라 각국 사이의 상호견제와 제휴의 내해(內海)였다고 평가한다. 동해를 통해 발해는 일본과 오갔고, 그들의 활로를 뚫고, 일본에서는 또 진경진사(津經津司, 츠가루노츠카사)가 말갈의 풍속을 보고자 바다를 건너고 말갈과 하이(에미시)와의 연합은 없는지를 조사한다. 발해와 일본 사이의 모든 외교 흐름이 8세기의 동해를 통해 이루어졌던 것이다.
 
[甲子, 黑水靺鞨遣使來朝獻.]
갑자에 흑수말갈(黑水靺鞨)이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고 방물을 바쳤다.
《구당서》 현종본기 개원 16년(728) 봄 정월
 
한편 흑수말갈은 또다시 사신을 당(그것도 얼마 전에 티베트에게 패한)에 보내면서 무예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二月壬午, 以從六位下引田朝臣虫麻呂, 爲送渤海客使.]
2월 임오(16일)에 종6위하 인전조신(引田朝臣, 히키타노아손) 충마려(虫麻呂, 무시마로)를 송발해객사(送渤海客使)로 삼았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0, 신귀(神龜) 5년(728) 2월
 
《신당서》를 뒤적거려봤는데 발해 사신들이 가지고 있던 장군호 가운데서 일부는 대개 당의 제도에도 있는 것들이었다. 당의 무산계(武散階) 가운데 정5품하(下)가 영원장군(寧遠將軍) 회화낭장(懷化郎將), 즉 사신단의 수장이자 대사(大使)였던 고인의가 지니고 있던 장군호이고, 덕주의 장군호인 유격장군(游擊將軍)은 종5품하(下)인데 당의 경우는 유격장군과 함께 귀덕낭장(歸德郎將)의 칭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과의도위나 별장의 경우, 제위절충도위부(諸衛折沖都尉府)마다 절충도위의 직속으로 좌ㆍ우 과의도위가 한 명씩 배속되었는데 상부(上府)는 종5품하, 중부(中府)는 정6품상(上), 하부(下府)는 정6품하였다. 당 태종 정관 10년에 별장을 과위도위로 고쳐서 둔 것으로 과의도위 바로 아래 계급이 별장(別將)이며, 상부는 정7품하, 중부는 종7품상, 하부는 종7품하였다고 《신당서》에 나온다.
 
인전충마려(히키타노 무시마로), 즉 《발해고》에서 말한 조신충마려(朝臣蟲麻呂)가 발해 사신을 본국까지 바래다줄 임무를 맡았다.
 
[壬午, 齊徳等八人, 各賜綵帛綾綿有差, 仍賜其王璽書曰 "天皇敬問渤海郡王. 省啓具知, 恢復舊壤, 聿修曩好, 朕以嘉之. 宜佩義懷仁監撫有境, 滄波雖隔, 不斷往來, 便因首領高齊徳等還次. 付書并信物綵帛一十疋, 綾一十疋, ■廿疋, 絲一百■, 綿二百屯. 仍差送使發遣歸郷. 漸熱, 想平安好.]
 
임오(16일)에 제덕 등 여덟 명에게 각기 채백(綵帛)과 능면(綾綿)를 차등있게 내려주고, 인하여 그 왕에게 보낼 새서를 내렸다. "천황(天皇, 미카도)는 공경히 발해군왕에게 묻소이다. 계를 살피고 지를 갖추어 널리 옛 영토를 회복하고, 드디어 앞서의 우호를 닦아오니 짐은 이를 기쁘게 생각하오. 마땅히 의(義)를 지니고 인(仁)을 품어 국경[境]을 살피고 어루만져야 할 것이오. 창파(滄波)가 비록 멀다 하나 왕래를 끊을 수는 없으니, 마땅히 수령 고제덕 등을 돌려보내겠소[還次]. 글에 부쳐 신물(信物)로 채백 열 필(疋), 능(綾) 열 필, ■ 스무 필, 실[絲] 백 묶음, 면(綿) 2백 둔(屯)을 보내오. 거듭 송사(送使)를 뽑아 보내어 나라로 돌려보내겠소. 봄[漸熱]에 평안히 우호하기 바라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0, 신귀(神龜) 5년(728) 4월
 
원문을 찾는 것도, 해석하는 것도 참 어렵다.....
 
 
<'발해사'묵서명 목간. 나라 시대의 황족이었던 장옥왕(長屋王, 나가야왕)의 저택터에서 발견되었으며, 글씨 연습을 하기 위해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해 사신과 일본 황족 사이에 행해졌던 교역의 내용을 설명해주는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동해는 웬만해서는 건너기 힘들다. 한겨울에 동해를 건너려면 대형 범선이 아니면 안 된다. 발해가 동해를 건너 일본과 교류한 것은 일본이 신라와는 적대적인 사이에 있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적의 적은 곧 나의 친구. 게다가 일본에는 고려와 백제의 망명객들도 많으니 이들을 잘 달래면 우호관계를 맺는 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겠지.
 
16년(728) 4월 계미일에 대도리행이 죽었다[卒]. 특진(特進) 겸 홍려경(鴻臚卿)을 제수하며 비단 3백 필, 곡식 3백 석을 하사하고, 해당 관청[有司]에 명하여 장례에 조문하게[弔祭] 하였으며, 관청에서 영여(靈轝)를 만들어 번국(藩國)으로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참척(慘慽)이라는 말이 있다. 아들이나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는 것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다. 인안 10년. 무왕은 태자 대도리행의 죽음이라는 비극을 겪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악상(惡喪)이었다. 공자께서도 아들 이(鯉)를 일찍 떠나보내고, 그 아들만큼이나 귀하게 여기던 제자를 둘이나 잃었다. 자기가 죽는 것보다 자기가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죽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더 괴로운 일임을 사람들은 잘 안다. 그렇기에 자기와 가까운 사람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구할 수 있다면 구하려는, 굉장히 상투적이고 식상한 이야기가 동서고금에 여럿 등장한다.
 
9월 임인에 발해의 어부수계(菸夫須計)가 와서 조회하니, 과의를 제수하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책부원귀》
 
하지만 무예는 왕이다. 발해의 왕으로서 그가 가장 먼저 우선시해야 할 것은 어디까지나 발해의 종묘와 사직이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다. 태자 대도리행의 죽음은 자기 아들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괴로움 이전에 무왕 다음의 후계가 불투명해졌음을, 그리고 그것이 무왕 사후의 계승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라가 세워진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국에 태자가 죽은 것을 마냥 슬퍼하고 있을 수만도 없었으리라.
 
2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매[鷹]를 바쳤다. 이달에 또 사신을 파견하여 숭어[鯔魚]를 바쳤다. 3월 갑인에 왕 대무예가 그의 동생 대호아(大胡雅)를 사신으로 보내 와서 조회하게 하니, 유격장군(游擊將軍)을 제수하고 자포(紫袍)와 금대(金帶)를 하사한 다음 머물면서 숙위하게 하였다. 계묘에 사신을 파견하여 숭어를 바치니, 백(帛) 스무 필을 하사하여 보냈다. 8월 정묘에 왕이 그의 동생 대림(大琳)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니, 중랑장(中郞將)을 제수하고 머물면서 숙위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개원 17년, 무왕 인안 11년 기사(729)에 무왕은 다시 사신을 당에 보냈다. 《신당서》에 기록된 바, 발해의 말은 솔빈부의 것이 유명하고 잉어는 미타호에서 잡은 것이 유명하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숭어나 잉어나 다 물고기니까. 발해 15부의 하나인 솔빈부는 문왕 때에 이르러서야 완비되는 행정구역으로 화주(華州) · 익주(益州)  ·건주(建州)의 세 주를 속주로 다스렸는데, 그 위치는 대략 지금의 러시아령 연해주 우수리스크나 중국 흑룡강성 동령현의 대성자고성(大城子古城)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말은 훗날 이정기가 산동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군수물자로 유입될 만큼 명마로 이름을 날렸다. 미타호는 지금의 흥개호(興凱湖)인데 그 크기가 우리나라 전라북도 정도로 크다네. 러시아와 중국 두 나라가 나누어서 관리하고 있고, 지금도 물고기를 잡으려나? 아니, 물고기가 나긴 나는 걸까.
 
정월 무인에 발해가 동생 대랑아(大郞雅)를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면서 정조를 하례하고 방물을 바치니, 백(帛)을 차등있게 내렸다.
《책부원귀》
 
무왕이 파견하는 사신들은 대부분이 아들... 이거나 동생이다. 내가 본 것만 해도 네 명이 동생이었는데, 외자 이름인 림(林)이나 번(蕃), 보아, 낭아처럼 아(雅)자 돌림을 쓴 것도 있고 보방(寶方)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발해고》에서 발해 신료들의 기록을 모은 신고(臣考)는 한권짜리 《발해고》와는 달리 네권짜리 《발해고》에서 제2권으로 항목이 나뉘어 있는데, 여기에는 한권짜리에 수록하지 않은 32명의 발해 관료들을 추가로 더 적어놨다. 대낭아도 한권짜리 《발해고》에는 없다가 네 권짜리 《발해고》에서는 딱 등장한다는 것. 문헌 섭렵의 폭이 《책부원귀》에까지 옮겨간 것일까. 네 권짜리 《발해고》를 더욱 더 빨리, 읽어보고 싶어졌다.
 
3월 무인에 발해가 지몽(智蒙)을 사신으로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고, 또 방물과 말 서른 필을 바치니, 중랑장을 제수하고 견(絹) 스무 필, 비포(裶袍), 은대(銀帶)를 하사한 다음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5월 기유에 오라달리(烏那達利)를 사신으로 파견해 와서 조회하고 바다표범[海豹]의 가죽 다섯 장, 노랑가슴담비가죽[貂鼠皮] 다섯 장, 마류배(瑪瑠杯) 한 개, 말 서른 필을 바치니, 과의(果毅)를 제수하고 백(帛)을 하사한 다음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책부원귀》
 
지몽이니 오라달리니 하는 것은 모두 확실히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라기엔 발음이 참 기묘하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고려 이름을 중국 사람들 귀에 들리는 대로 발음을 적었다느니 하는 문제보다도, 말갈인이든 고려인이든 가리지 않고 발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포용하고자 했던 무왕의 포용성을 나는 찾고 싶다. 적어도 출신이나 국가를 갖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 시기 동아시아에서는 미개한 후진국에서나 할 짓이었다. 당은 이민족 가운데서도 능력있는 자는 누구든 뽑아서 벼슬을 주고 장교로 임명했고, 그러한 개방성이 최치원이나 장보고 같은 우리 역사의 걸출한 위인들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리. 폐쇄적이고 고집스런 성격은 예술가에게는 약이 될지 몰라도 정치가와 경제인에게는 결코 약이 아님을 역사는 가만히 말해주고 있다.
 
발해에서 당에 보낸 물건 중에는 《신당서》에 없는 특이한 물건들의 이름도 튀어나오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걸 어디서 수입해왔다고 싸잡아 말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다. 발해에서 보낸 물건 가운데 초서피, 즉 노랑가슴담비의 가죽은 일본에까지 알려진 최고급 특산물이었으니까. 바다표범의 가죽은 옥저에서 나는 특산품의 하나로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무렵 발해는 옥저 땅, 지금의 함경도에 있던 그 땅을 석권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당에 바다표범 가죽을 보낸 이 해가 발해가 옥저에 행정구역을 편재하고 완전히 차지한 그 해인지도 모르겠다. 그걸 기념해서 보낸 것일 수도....?
 
[辛亥, 遣渤海使正六位上引田朝臣虫麻呂等, 來歸.]
신해(29일)에 견발해사 정6위상 인전조신(引田朝臣) 충마려(虫麻呂) 등이 돌아왔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0, 천평(天平, 덴표) 2년(730) 8월
 
용케도 살아 돌아왔구나. 쩝.
 
[癸丑, 天皇御中宮, 虫麻呂等獻渤海郡王信物.] 
계축(2일)에 천황(天皇, 미카도)이 중궁에 행차하였다. 충마려 등이 발해군왕의 신물을 바쳤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0, 천평(天平) 2년(730) 9월
 
무예왕은 인전충마려를 본국 일본으로 돌려보내면서 여러 가지 물건을 딸려서 성무 천황에게 보냈는데, 이들 신물(信物)은 발해와 일본 두 나라 사이의 우호를 증명해줄 신표였고, 사신이 귀국한 뒤에는 일본 각지의 산료(山陵)나 지방의 이름난 신사에 봉납되었다. 발해가 보낸 견일본사를 고려의 사신이라 여기고 예전 고려와 일본 사이의 교류가 다시 재개되었다고 간주한 것이다. 다만 저것들은 발해의 물품이나 고려의 물품이나 다 하나같이 자기들한테 '바치는' 조공으로 간주해 거들먹거리며 자기네들 조상신과 산천신들에게 예물로 봉헌한 것이지.
 
[丙子, 遣使以渤海郡信物, 令獻山陵六所, 幷祭故太政大臣藤原朝臣墓.]
경자(25일)에 사신을 보내어 발해군의 신물을 산릉(山陵) 여섯 곳에 바치도록 명하였다. 아울러 죽은 태정대신(太政大臣, 타이죠다이진) 등원조신(藤原朝臣, 후지와라노아손)의 무덤에 제사지냈다.
《속일본기(續日本紀)》권제10, 천평(天平) 2년(730) 9월
 
발해의 무예왕은 왜황과 발해의 대왕은 서로 대등하다는 생각으로 일본과의 외교에 임했지만, 일본 조정은 달랐다. 형식적으로나마 '발해군왕'이라는 당의 책봉직을 받고 있는 발해를 일본은 결코 자기들과 동급으로 여기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야 이 사실을 알았겠지만, 아무튼 발해는 자신들의 우호적인 선린을 옛 고려의 조공으로밖에 보지 않는 저 몰상식한 것들을 상대로 참, 여러 가지 곤욕을 치를 수밖에 없었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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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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