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46547338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5>후고려기(後高麗記)(8)


<발해의 투구. 중국 상경유지박물관 소재.>
 
공자님 말씀에 이런 게 있다.
"천하에 도가 행해지면 예악과 정벌이 천자에게서 나오고,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예악과 정벌이 제후에게서 나온다.
그것이 제후에게서 나오면 대체로 10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는 일이 드물고,
그것이 대부로부터 나오면 5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는 일이 드물며,
그것이 가신에게서 나오면 3대 안에 정권을 잃지 않는 일이 드물다.
천하에 도가 행해지면 정권이 대부에게 있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행해지면 일반 백성들이 정치를 논하지 아니한다."(이상 《논어》계씨편)
 
《논어》에서 이 구절을 보고 나는 이렇게 해석을 했다. 공자가 '천하'라고 한 것은 응당 주 왕실 즉 중국을 말한 것일테고, 제후니 대부니 가신이니 하는 것은 주로부터 분봉받은 다른 나라를 가리키지만 좀더 확장하면 중국 주변의 여러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될 수 있다.
 
'도가 행해진다', 제후가 천자에게 예를 차릴 때는 천자도 제후에게 예를 받는 만큼 처신을 해야 되겠지. 즉 제후에게 받는 만큼 천자가 제 할 일만 다 한다면 제후의 반발을 사는 일도 없고 제후가 예악이나 정벌을 거론할 일도 없다. 풀어서 얘기하면 애더러 '애답게 굴어라'라고 말할 때는 그렇게 말하는 어른도 '어른답게' 굴어야 한다는 말이다. 어른이 어른답지 못한 짓을 하면 아이는 어른을 무시하고, 자기 행동은 고치지도 않은 채 어른이랍시고 으스대는 걸 '애만도 못한 짓'이라고 부른다. 그런 인간은 애한테 욕먹어도 할 말이 없다. 어른 대접 받고 싶으면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야지. 이것이 공자가 말한 정명(正名)이다.
 
당이 자기들을 천자국으로 생각하든, 발해를 제후국으로 취급하든 그건 아무 상관없다. 중요한 게 뭐냐면 두 나라 사이에 어느 만큼 '예의'가 지켜지고 있느냐는 거지. 적어도 어른이랍시고, 윗사람이랍시고 온갖 폼 다 잡으면서 뒤로는 애만도 못한 꼴사나운 짓이나 하고, 그게 내 눈에 띄었다? 나는 그 순간부터 그 새끼 어른으로 인정 못 한다. 어른이면 단가? 어른답게 굴어야 어른이지. 
 
"대국이면 대국답게 신의를 보이셔야지 어떻게 속일 수가 있습니까?"
무예왕이 당 현종에게 한 말은 그러한 공자의 정명론을 들먹이며, 천자국이랍시고 폼잡던 당에게 날린 절묘한 한방이었다. 제후(발해)가 천자(당)에게 하듯 천자가 제후에게 지켜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셔야지, 잘못한 사람을 돌려보내지도 않고 숨겨놓고 멀리 보냈다고 거짓말하는 게 무슨 천자국이고 황제의 품위야.
 
천하에 도가 행해지듯 '천자'요 '중국'이라는 것들이 잘하면 제후가 정치하겠다 나설 일도 없고, 백성들은 정치를 몰라도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법. 자신의 주인이자 형인 무예왕을 버린 것은 유교적인 입장에서 신하로서의 '충(忠)'과 아우로서의 '의(義)'를 저버린 패륜행위로 비칠 수밖에 없다. 당으로 도망쳐온 발해의 대무예를 받아주고, 무예왕이 돌려달라는데도 그걸 돌려주지 않고 '없다'고 거짓말한 현종의 작태를 훤히 꿰뚫어본 무예왕에게 현종은 더이상 천자가 아니었다. 멀리서 천자랍시고 폼 잡고 있는 노망난 늙은이일 뿐이었지.
 
2월 기미에 발해가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정조를 하례하니, 장군을 제수하고 백(帛) 1백 필을 하사한 다음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인안 12년ㅡ태세 신미(731)까지 발해는 참았다. (노래 가사처럼 '참을 만큼 참았고 갈때까지 갔다'.) 조공 사신도 꼬박꼬박 보냈고, 자존심도 좀 꺾어가며 당을 천자국이라고 깍듯이 모셨다. 그런데도 천자국으로서 제후국에게 추태를 보인다면 그걸 보고도 참아야 할까? 옳지 못한 것을 보고도 참으면 그건 용기도 뭐도 없는 꼬라지다 하고 공자께서 말씀하셨는데도?
 
10월에 왕이 대취진(大取珍) 등 120인을 파견해서 조회하니, 모두 과의를 제수하고 각각 백(帛) 서른 필씩 내린 뒤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책부원귀》
 
경고는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開元二十年, 遣大將張文休, 率海賊越海攻登州. 殺刺史韋俊. 謂之雪先王之○, 其實恨門藝事也. 玄宗大怒, 命右領軍將軍葛福順, 發兵討之.]
개원 20년(732) 대장(大將) 장문휴(張文休)를 보내어 해적(?)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쳤다. 자사 위준(韋俊)을 죽였다. 선왕의 치욕을 갚는다고 했으나 사실은 문예의 일을 원망한 것이었다. 현종은 대노하여 우령군장군(右領軍將軍) 갈복순(葛福順)에게 명하여 병사를 내어 토벌하게 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13년 임신(732)
 
인안 13년 태세 임신(732) 9월.
장문휴의 등주(登州) 공격(개인적으로 임신서정壬申西征이라 부르고 있다)은, 고려의 영양왕이 요서를 선제공격한 이래, 우리 역사에서 두 번째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외국을 선제공격한 사례였다. 혜풍 유득공은 내용 정제를 안 해서 장문휴가 거느린 발해의 수군을 중국 사람들이 욕해서 부른 '해적'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썼지마는 기실 이들은 발해가 양성한 수군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니면 정말 그 근방 해적들까지 동원해서 당으로 가는 물길을 튼건가 무왕이? (갈복순은 《구당서》에서는 개복순으로 나온다ㅋㅋ)
 
등주라면 지금의 산동반도 봉래 동북쪽에 있는 곳. 당이 동방으로 진출하는 해양진출의 거점이자, 신라나 일본과도 교류하기 위한 해양무역의 거점이기도 했다.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 장문휴를 위시한 발해의 수군은 수백 척의 전선을 압록강에 띄웠다. 무예왕은 아마 당이 고려를 공격했던 전술ㅡ후방상륙작전을 통해 당의 후방을 공격하여 의표를 찌르려고 했던 것 같다. 여기에 옛 고려인들이 자주 쓰던 기동성을 바탕으로 한 배후습격전략을 덧붙여, 요동의 해안에 돌아다니는 당의 척후선이 발해 수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찌감치 요동 해안을 벗어나 근해항해로 장산군도의 바깥쪽 해역을 통과, 묘도 군도의 중간쯤에서 노철산 물길을 따라 곧바로 등주항에 상륙ㅡ. 무왕(武王)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대담하기 그지없는 전술이었다.


<발해의 대당 침공루트. 외교전으로 일관하던 발해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당의 등주를 선제공격했다>
 
대성공이었다. 발해가 바다 건너 산동반도까지 수군을 보낼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녔음을 대내외에 확인시켰다는 것보다도, 발해가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의 무력행사 정도는 얼마든지 할수 있음을 당에게 주지시켜 주었다는데 의의가 있다.
 
발해의 힘과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저들이 우리를 더이상 깔보지 못하게 한다ㅡ. 그칠 '지(止)' 오른쪽에 창 '과(戈)'가 합쳐진 글자가 '무(武)'자라는 설명이 새삼 떠오른다. 일찌기 《설문해자》에서 춘추시대 5패의 한 명이었던 초 장왕의 말을 빌려서 이르기를, "무릇 '무'라는 것은 천하를 평정하여 병사들을 쉬게 함이니, 곧 전쟁을 그치게 함이 무이니라[夫武,定功戢兵, 故止戈爲武]."라고 했다. 정공(定功)과 집병(戢兵)이라는 단어는 《춘추좌씨전》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는 전쟁을 행하는 자, 즉 무력을 가진 자가 지켜야 하는 일곱 가지 덕(德)을 들고 있다.
 
첫 번째가 '금포(禁暴)'로 난폭한 자를 억누르는 것,
두 번째가 '집병'으로 싸움을 그치게 하는 것,
세 번째가 '보대(保大)'로 넓은 영토를 보유하는 것,
네 번째가 '정공'으로 천하를 잠잠하게 하는 것,
다섯 번째는 '안민(安民)'으로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
여섯 번째는 '화중(和衆)'으로 만민을 화락하게 하는 것,
일곱 번째는 '풍재(豊財)'로 재물을 풍족하게 하는 것.
 
이 중 두 가지인 '정공'과 '집병'을 《설문해자》에서 거론하고 있으니, 곧 '전쟁을 종식시키는 존재'라는 것이 바로 '무'가 가진 의미로써, 궁극적으로는 '전쟁을 방지한다'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의미다. 한 번 전쟁으로 99번의 전쟁을 막을 수 있다면 다들 그 한 번에 목숨을 걸겠지. 그리고 그 한 번에 모든 것을 걸고 그 한 번을 끝으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으려고 하겠지.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게 어렵기 때문에 저렇게 아직도 치고받고 싸우는지도.
 

<장문휴의 등주 공격. 우리 역사에서 두 번째로 외국을 선제공격한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무예왕이 장문휴를 보낸 것은 어디까지나 발해가 약하지 않음을 적국 당에게 확인시켜서, 다시는 당이 발해를 깔보거나 침략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경고성 이벤트'였다. (이벤트 치고는 상당히 살벌한 이벤트였지) 원래 빈수레가 더 요란하고, 초식동물일수록 위헙해보이는 뿔과 커다란 덩치를 갖고 있으며 '약자'라는 열등감에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큰소리치고 다니는 사람들도 허다하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불합리나 허풍스러운 위세조차도 최소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 나라를 책임지고 있는 위정자로서 그에게는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가
냉혹한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끈질기게 살아남아 천년만년 이어질 수 있도록, 때로는 가장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필요가 있고 그럴 권리가 있었다. 그는 군주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강한 척 위세를 떠는 모습이 반대로 자신의 약함을
부각시키는 꼴이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자신과 연관된 것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된 것.
 
[冬十月丙戌, 命巡幸所至, 有賢才未聞達者舉之. 仍令中書門下疏決囚徒. 辛卯, 至潞州之飛龍宮, 給復三年, 兵募丁防先差未發者, 令改出餘州. 辛丑, 至北都. 癸丑, 曲赦太原, 給復三年. 十一月庚午, 祀後土於脽上, 大赦天下, 左降官量移近處. 內外文武官加一階, 開元勳臣盡假紫及緋. 大酺三日.]
겨울 10월 병술에, 영하기를 순행하여 이르는 곳마다 현재(賢才)가 있으되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자가 있으면 천거하게 하였다. 이에 중서문하(中書門下)에서 죄수[囚徒]들을 너그럽게 처결하도록[疏決] 하였다. 신묘에 노주(潞州)의 비룡궁(飛龍宮)에 이르러, 3년 동안 부역을 면제해주고[給復], 병모(兵募)의 정방(丁防)으로서 먼저 뽑아놓고 미처 출발하지 않은 자들은 나머지 주로 개출(改出)하도록 하였다. 신축에 북도(北都)에 이르렀다. 계축에 태원(太原) 지역의 죄수들에 한해 사면을 내리고 3년 동안 급복하였다. 11월 경오에 수상(脽上)에서 후토(後土)에 제사지낸 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좌강관(左降官)의 군량을 근처로 옮겼다. 내외 문무관에게 1계씩 더 올려주고, 개원의 훈신(勳臣) 모두 임시로 자(紫)와 비(緋)를 내렸다. 사흘 동안 크게 잔치를 열어주었다.
《구당서》 권제8, 본기제8, 현종본기 상(上), 현종 개원 20년(732)
 
장문휴의 등주공격, 즉 임신서정이 있고 한 달 뒤의 당조 사정을 보면 10월 신묘에 노주 비룡궁에 행차했을 때 현종이 3년 동안의 부역을 면제해주면서 병모의 정방으로 먼저 뽑아놓고 미처 출발하지 않은 자들에게 나머지 주로 개출시키라는 명을 내렸다고 나온다. 노주(潞州)는 지금의 중국 산서성 남동쪽에 있는 장치(長治)를 가리키는데, 웅진대백과사전 9권에 실린 중국지도에서 장치하고 산동성 연대(장문휴가 공격한 등주)까지 거리가 정확하게 직선으로 4cm. 환산하면 800km 되더라.
 
당조의 군사제도에 대해서 말하자면 우선 중앙군으로 12위(衛), 동궁솔부(東宮率府)가 6개 있었는데 평상시에는 황실과 수도 창안을 방위하다가 유사시에는 새로 군대를 편성했단다. 변방에는 도독부 휘하에 진(鎭)과 수(戍)를 두었고 기내(機內) 즉 수도권 인접지역에는 절충부(折衝府)를 두었는데(일종의 군사훈련소인 셈) 이 절충부의 병사를 부병(府兵)이라 불렀다. 지금의 국민개병제처럼 관할 지역 농민들을 절충부에서 뽑아서 훈련을 시키는데 그 산하에 800명 내지 1200명이 있었고, 이들은 사는 집과의 거리에 따라 순번제로 중앙군인 위나 부, 지방군인 진이나 수에 배치되어 복무하는 식이다. 많을 때는 전국에 630개 내지 650개가 있었다고 하니 굉장하기는 하다만 그것이 수도권에 너무 밀집되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 12위나 절충부 제도는 나중에 가면 거의 해체되고 이것이 부병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원인이 되었다고 지적받고 있지만 그것은 현종 때는 고사하고 숙종 때인 정원 10년(749년)에 가서의 일이다. 이 부병들 말고도 전쟁이 일어나면 진과 수에서는 따로 급료를 주고 추가로 군인을 모집하는데 이걸 병모(兵募)라고 했다. '병모'가 모병 행위를 의미한다면 이 '병모'를 통해 모은 군사들을 가리키는 말이 정방(丁防)이다. 돈 보고 온 군인들.
 
개원 초년까지는 부병제가 잘 운행되었고 병모는 부병제에 '가미'되는 조미료 정도에 불과했지만 나중에 가면 이 전세가 뒤집힌다. 하지만 그건 안록산의 난 이후 당조가 어지러울 때의 일이고 보면 아직까지 '병모'의 '정방'이 나올 일은 없는 것이다. 당조에서 근처 부병 말고도 또 '병모'를 해서 '정방'을 모아야 할 일이 있었다는 말일까?
 
[二十一年, 又遣門藝, 發幽州兵擊之. 又遣內史高品何行成, 太僕員外郞金思蘭, 使新羅, 授新羅王金興光開府儀同三司持節充寧海軍使鷄林州大都督, 諭曰 "渤海外稱藩翰, 內懷狡猾. 今欲出兵問罪. 卿亦發兵擊其南鄙." 又勅新羅名將金庾信孫允中爲將, 賜金帛. 新羅王遣允中等四將, 率兵會唐師來伐.]
 
21년(733)에 다시 문예를 보내 유주의 병사를 뽑아 치게 했다. 또한 내사고품(內史高品) 하행성(何行成), 태복원외랑(太僕員外郞) 김사란(金思蘭)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신라왕 김흥광(金興光)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지절충녕해군사(持節充寧海軍使)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의 직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효유하였다. "발해는 겉으로는 번한(藩翰)이라 하면서 속으로는 교활한 마음을 품었다. 지금 병사들을 보내어 그 죄를 물으려 한다. 경도 군사를 내어 그 남쪽 변방을 치라." 또한 명하여 신라의 명장 김유신의 손자 윤중(允中)을 장수로 삼고 재물을 내려주었다. 신라왕은 김윤중 등 장군 네 명에게 병사를 이끌고 가서 당군을 만나 발해를 토벌하게 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14년 계유(733)
 
꼴에 천자국이랍시고 지고는 못 산대요. 《삼국사》신라본기에 보면 신라에서는 당이 사신을 보내 발해 출병을 요청하기 1년 전인 성덕왕 31년(732) 겨울 12월에 각간 사공(思恭)과 이찬 정종(貞宗), 윤충(允忠), 사인(思仁) 등을 장군으로 삼았다고 나온다. 이 가운데 한 명인 윤충이 곧 윤중으로 보이는데, 《삼국사》김유신열전에는 이 윤충과 함께 윤문(允文)이 신라군을 이끌고 발해를 쳤다고 하지만 거기서는 그것이 성덕왕 32년(733)의 일이라고 했다.
 
출병은 733년인데 하필 그 바로 전에 윤충이 장군으로 임명된 것은 무슨 까닭일까. 김사공과 김정종, 김윤충, 김사인 꼭 네 명이 장군으로 임명되었다고 했으니 이것은 《삼국사》나 《발해고》에서 성덕왕이 네 명의 장군에게 발해를 치게 했다고 한 구절과 묘하게 맞는다. 《삼국사》를 지으면서 김부식 이 영감태기가 살짝 맛이 가서 733년의 일을 732년의 일로 바꿔 적었나? 그렇게 본다고 해도 출병은 7월에 있었는데 출병하고 나서 장군을 임명했다는 건가. 웃긴 일이다.
 
[三十二年, 秋七月, 唐玄宗以渤海靺鞨, 越海入寇登州, 遣太僕員外卿金思蘭, 歸國仍加授王爲開府儀同三司寧海軍使, 發兵擊靺鞨南鄙. 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死者過半, 無功而還.]
32년(733), 가을 7월에 발해말갈(渤海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쳐들어갔다. 태복원외경(太僕員外卿) 김사란(金思蘭)을 보내어 귀국시켜 왕에게 관작을 더해 주어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영해군사(寧海軍使)로 삼고, 군사를 일으켜 말갈의 남쪽 변방을 치게 하였다. 때마침 큰 눈이 내려 한 길 남짓 되었으므로 산길이 막히고 군사 중 죽은 사람이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 없이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성덕왕
 
《삼국사》의 기록에서 주요 문헌에 대한 고증자료라던가 그 기사가 형편없다는 것은 단재 선생께서 밝혀놨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삼국사》는 실제 사실 관계와 맞지도 않는 부분까지 나온다. 《삼국사》가 말한 발해말갈이 등주를 어쩌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장문휴의 발해 원정을 말하는 것일 테고, 그것은 《구당서》가 말한바 9월의 일이었는데 《삼국사》는 두 달이나 앞당겨 7월로 적어놨다. 게다가 김사란이 귀국한 것은 《책부원귀》에서
 
당 현종 개원(開元) 21년(733) 1월 경신일에 태복경(太僕卿) 원외치동정원(員外置同正員) 김사란에게 명하여 신라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다. 김사란은 본디 신라에서 사신으로 온 사람이었는데, 공손하면서도 예의가 있어 사신으로 온 일로 인하여 머물러서 숙위하였다. 이때에 미쳐서 그에게 강역을 나가 사신으로 가는 임무를 맡겨 돌아가기에 편하게 한 것이다.
 
라고 말한 대로라면 개원 21년 즉 성덕왕 32년 1월의 일인데 가을 7월 기사 뒤에 적어놔서, 누가 보면 꼭 발해가 등주를 친 뒤의 일인 것처럼 적어놨다. 일단 《삼국사》를 따르는 것이 옳지만 그래도 발해와 직접 전쟁한 당사국인데
설마 언제 싸웠는지도 헷갈려서 틀리게 적었을까. 장문휴가 등주를 공격한 것, 적어도 햇수만큼은 《구당서》를 따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저 《삼국사》의 문장에서 가을 7월[秋七月]을 가을 9월[秋九月]로 바꾸더라도, 그 앞에다 처음[初]이라는 글자를 덧붙여서 장문휴의 등주원정이 앞서 있었음을 구분해놓고 현종이 김사란을 돌려보낸 것이 1월의 일임을 부식이 영감이 표기해놨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들이 성덕왕 32년 7월에 있었던 일인양 뭉뚱그려놨으니 참, 부식이 영감태기가 역사인식은 고사하고 문장실력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저기서 다 드러난다. 유득공 본인은 《발해고》를 지으면서 중국의 《당서》나 《책부원귀》도 다 읽었을텐데 왜 저걸 구별하지 못했는지. 오류로 따지자면 유득공도 할말은 딱히 없는 셈이다.
 
그래 김부식 영감의 《삼국사》의 오류를 중국의 《당서》나 《책부원귀》, 신라 최치원의 문집을 갖고 바로잡는다면 장문휴가 등주를 친 것은 당 현종 개원 20년, 신라 성덕왕 31년 임신(732) 가을 9월의 일이 틀림없고, 당이 발해에게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신라는 국방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더욱이 덩저우를 포함한 중국의 해안 지대는 신라 사람들이 많이 건너가 살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발해가 덩저우를 치고 석 달 뒤인 12월에 김유신의 손자까지 포함해
네 명의 귀척에게 특별히 장군직을 맡기는 등 혹시 모를 발해의 침공에 대비하다가, 1월에 당으로부터 원병파병을 요청하는 국서를 갖고 김사란이 귀국했다. 신라는 미리 임명해두었던 김윤중 등의 장수에게 명하여 발해를 치게 했다ㅡ. 그렇게 되어야 일의 인과관계가 들어맞는다. 어디까지나 신라가 장수 네 명을 특별히 새로 임명한 것을 발해의 위협을 의식한 것으로 해석할 때 성립하는 이야기다.
 
[會大雪丈餘, 山路阻隘, 士卒凍死過半. 皆罷歸.]
눈이 한 길이 넘게 내려서 산길이 막혔고 얼어 죽은 병사들이 절반을 넘었다. 모두 그만두고 돌아왔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14년 계유(733)
 
신라까지 끌어들여 발해를 치려던 현종. 허나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계셨으니, 추운 겨울에는 결코 요동 땅으로 군사를 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발해고》가 말한 내용 그대로. 당군은 발해군과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눈때문에 패했다. (라고 적어놨지만 저 뒤에 도대체 얼마나 덮고 숨겼을까. 두 나라 사이에 있었던 전쟁이나 당의 처참한 패배를....)
 
여기서도 《삼국사》의 오류가 또 보인다.(이이화 교수가 지적한 것이다) 당의 출병 요구를 앞에 적고 폭설 기사를 바로 뒤에 적어 놨는데, 잘못 읽으면 신라군이 폭설을 만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눈이 어쩌고 하는 것은 《자치통감》에도 나오는 이야기인데, 부식이 영감이 《자치통감》에서 신라 관련기사를 보고 적으면서 주어를 당에서 신라로 잘못 해석해 적어버린 것. (멍청한 영감태기 같으니....) 《동국통감》이나 《동사강목》, 《해동역사》에서도 부식이 영감의 이런 멍청한 실수를 답습해 그냥 그대로 적어버렸다.(그 빌어먹을 영감태기, 죽어서까지 도움이 안 되고 속썩이네.) 이때의 사정은 오히려 9세기 사람인 최치원이 말한 것이 더 사실에 가깝다.
 
[開元二十年, 怨恨天朝, 將兵掩襲登州, 殺刺史韋俊. 於是, 明皇帝大怒, 命內史高品 · 何行成 · 太僕卿金思蘭, 發兵過海攻討, 仍就加我王金某, 爲正太尉持節充寧海軍事雞林州大都督, 以冬深雪厚, 蕃·漢苦寒, 勅命廻軍.]
 
(발해는) 개원 20년(732)에 중국을 원망하고 한스럽게 여겨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를 갑자기 습격해 자사 위준을 죽였습니다. 이에 명황제(明皇帝)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고품(內史高品) 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징발해 바다를 건너서 칠 때, 우리 왕 김 모를 태위지절(太尉持節) 충영해군사(充寧海軍事)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에 임명하여 참전하게 하였으나, 깊은 겨울이라 눈이 많이 쌓이고 양국 군사가 추위에 시달리므로 회군을 명하셨습니다.
상태사시중장 中,
《삼국사》 권제46, 열전제6, 최치원
 
이 글은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이라고 해서, 신라 진성여왕 7년(893)에 당의 태사시중에게 전례대로 신라 사신에게 당 조정에서 물품 공급을 해줄 것을 호소한 무척 절박한 글이다.(이 글에서 최치원은 신라의 입장에서 발해를 깎아내리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받지만, 이 글을 쓴 목적 자체가 신라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기에 발해는 자연스럽게 깎여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최치원의 말은 완곡하긴 해도 《삼국사》보다는 훨씬 사실에 가까운 내용을 담고 있다.
사건의 순서도 《삼국사》의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즉, 당은 신라에 출정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신라는 머뭇거리면서 실제로 출정하지는 않았고, 그러던 차에 당군이 폭설을 만나 절반 이상이 죽는 큰 피해를 겪고 나서 '출정하지 마'라고 말을 한 거지. 이런 거다. 엄마가 간장이 간당간당하게 남은 걸 보고 '가서 간장 사와라'하고 시켰다가 '아니 됐다 그냥 가지마'라고 말해서 안 간 것과 같다. 간장을 사오라고 해서 진짜로 갔든 안 갔든 시키면 짜증나고, 그러다가 가지 말라고 하면 '앗싸'하고 그냥 있으면 되는 거지. 어느 쪽이든 귀찮긴 매일반이지만. 어쨌거나 신라를 이용해 발해를 견제하려던 당의 이이제이 정책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흠.)
 
보통 적이 스스로 물러갔다고 하면 다들 그냥 알아서 '다행이다'하고, 방어를 굳건히 하는 정도에만 그쳤겠지만, 무예왕이 누구야? '무'의 기치로 속을 꽉 채운 뼛속깊은 무골군주 아닌가. 당군이 물러가자 무예왕은 곧바로 친히 군사를 이끌고 육로로 당 공격에 나선다. 타겟은 유주의 마도산. 이 무렵 친당정책을 펴던 자신의 왕을 죽이고 돌궐에 투항한 거란족 가돌 한과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해족들이 당에 반란을 일으켜 날녹산을 공격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왕은 적절하게 활용했다. 거란족과 당 사이에 있던 요충지인 이곳을 공격해 살고 있던 당 사람들을 모조리 내쫓아버리고 성읍을 작살낸 것.
 
[勃海大武藝, 與弟文藝戰國中, 文藝來. 詔與太僕卿金思蘭, 發范陽新羅兵十萬討之, 無功. 武藝遣客刺文藝於東都, 引兵至馬都山, 屠城邑. 承玼窒要路, 塹以大石亘四百里, 虜不得入. 於是, 流民得還, 士少休脫鎧, 而耕. 歲省度支運錢.]
발해의 대무예가 동생 대문예와 나라에서 싸워 대문예가 당으로 도망쳐 왔다. 조서를 내려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과 함께 범양(范陽)과 신라 군사 10만을 동원하여 발해를 공격케 했지만, 아무 공적도 세우지 못했다. 대무예는 자객을 동도(東都)에 보내 문예를 습격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군사를 이끌고 마도산(馬都山)에 이르러 성읍을 공격했다. 승체(承玼)가 요충로를 틀어막고 큰 돌로 400리에 걸쳐 메우니, 적들이 들어오지 못했다. 이에 흩어진 백성들이 돌아올 수 있었고, 병사들이 조금 쉬면서 갑옷을 벗고 농사를 지었다. 이 해에 세금을 감면하였다.
《신당서》 권제136, 열전제61, 이광필(李光弼), 부(附) 오승체
 
발해 사람들이 쳐들어와 그야말로 목에 활 들이대고 있는 와중에 기적적으로(?) 마도산을 구한 것은 당의 장수 오승체였다. 그는 발해군이 당으로 올 것이라 예상되는 주요 길목을 틀어막고, 큰 바위를 가져다 400리에 걸쳐 성채를 구축했다. 길도 길이지만 사실 발해군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당을 위협하는 것이었지 당을 멸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무예왕은 그쯤에서 물러나 구국으로 돌아오신다. 하지만 그도 자신을 배신한 아우 문예를 죽이는 데에는 끝내 실패했다.
 

<마도산의 위성사진. 733년 윤3월에 거란족은 하북성 산해관 지역의 유관도산 즉 마도산에서 당군과 격전을 벌였고, 무왕은 거란족을 도와 당군과 싸웠지만 거란족은 당군에게 궤멸되었다.>
 
그런데 사건의 인과 순서가 어떻게 되던가.
장문휴 등주공격→대문예의 발해공격→김사란 귀국(신라파병요구)→폭설로 인한 당군 퇴각→마도산전투→대문예 피습.
 
[武藝懷怨不已, 密遣使至東都, 假刺客刺門藝於天津橋南, 門藝格之, 不死. 詔河南府捕獲其賊, 盡殺之.]
무예는 원한을 품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은밀히 사자를 동도(東都)로 보내어 자객을 빌어 문예를 천진교(天津橋) 남쪽에서 습격했는데, 문예가 그들과 대적하여 죽지는 않았다. 조서를 내려 하남부(河南府)에서 그 도적들을 잡아들이게 하고 모두 죽였다.
《구당서》 발해말갈전
 
두 차례에 걸친 당과의 전쟁은 모두 발해의 승리로 끝났지만, 무예왕은 나라를 배신한 아우 문예를 끝내 용서하지 못했다. 당이 문예를 끝내 못 죽인다면 내가 직접 죽이겠다고 저렇게 자객까지 사서 아우를 죽이려는 왕도, 어찌 보면 결국 별수 없는 위정자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긴 위정자니까 저럴 수밖에 없지. 나라를 위협하는 것은 저런 식으로 누구든 잡아 죽여야 한다.
 
대문예와 관련된 기록은 저렇게, 무예왕이 자객을 시켜서 문예를 죽이려고 했다고 한 것이 마지막이고, 이후 그가 당에서 무슨 벼슬을 했는지, 얼마나 더 살다가 죽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형이 저렇게 자객까지 보내서 죽이려 드는 판인데 무서워서라도  못 돌아갔을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그렇다고 망명지인 당에서도 그리 순탄한 삶을 살았다거나 한 것 같지는 않다. 당 현종이 망명객인 그를 받아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이용해 발해의 내정을 흔들고 무예왕의 입지를 좁히려고 한 것이었지만, 두 번에 걸친 발해와의 전쟁은 그것이 얼마나 헛된 생각인가를 현종에게 가르쳐주었고, 나중에도 나오지만 이후 당은 발해와의 대립이나 무예왕에 대한 견제보다는 그를 좀 잘 구슬려보는게 어떨까 하는 방법을 찾는 듯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당연히 대문예는 이용가치가 없어질 수밖에.
 

<뤄양의 낙양교. 당의 천진교로 무왕이 보낸 자객이 이곳에서 대문예를 습격했다.>
 
발해의 자객들이 처형된 그 시점(733년경)과 맞물려, 마침 당에 와있던 발해의 사신 대낭아 등도 모두 영남으로 귀양보내졌는데, 이들을 구하기 위해서 무예왕은 곧 당조에 표문을 올려 사죄(?)하며 저자세를 보였다. 이에 현종은 대낭아 등을 사면하여 돌려보내고, 다음과 같은 답서를 보냈다.
 
경이 지난번에 잘못된 계책을 하여 화란이 일어날 뻔하였는데, 도를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의(義)를 듣고서 능히 맘을 바꾸었으니 어쩌면 그리도 지혜로운가. 짐은 다른 사람의 과오는 묻어 주고 상대의 성심을 받아들이니, 경이 마음을 씻은 것을 표하여 경의 뜻을 위로하는 바이다. 경이 이미 정성과 절개를 다하여 길이 동쪽 울타리를 견고하게 하였으니, 백대의 자손들에 이르기까지 다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사신이 바친 표문을 보고 그 정성을 다 알았다. 숙위(宿衛)를 바꾸게 해 주기를 청한 것에 대해서는, 역시 이미 그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대낭아 등은 앞서 국법을 범하였기에 남쪽 변경으로 쫓아냈는데, 이들 역시 모두 죄를 용서해 주고 이어 석방하여 번방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이는 경이 잘 알고 있듯 이는 모두 짐의 뜻이다. 초여름이라 날씨가 점차 더워지는데 경 및 수령과 백성들이 모두 평안하게 잘 지내기 바란다. 글로 보내는 것이라서 많은 말은 하지 않는다.
 
김육불의 《발해국지ㆍ장편》에서 보고 적은 것인데, 이때 돌궐이 발해에 사신을 보내서 함께 해족과 거란족을 공격하자고 했지만 무예왕은 이 돌궐 사신을 붙들어다 당에 보낼 생각으로 왕족 대성경(大誠慶)울 파견했다. 이 국서 속에서도 무예왕은 끝까지 아우 문예를 죽여줄 것을 당조에 요청했지만, 당조에서는 결국 무예왕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반역하고 순종하는 기미와 보존하고 망하는 조짐을 알지 못하면서 나라를 보유할 수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경은 지난해에 덕을 배반하여 이미 재앙에 이르렀지만, 근래에 잘못을 뉘우치고 신하의 절의를 잃지 않으며 질곡에 빠져 있다가 선을 회복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짐은 남의 장점만 기억하지 단점은 잊어버린다. 하물며 이렇게 돌아와 복종함은 가상히 여겨 감탄할 일이다. 영원히 동토로 됨이 좋지 않겠는가? 영을 내려 대성경 등을 입조시키고 벼슬과 상을 더해주었음은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요청한 교체할 사람은 그대에게 돌아가게 했다. 근래에 경이 보낸 표문을 보니 “돌궐(突厥)이 사신을 보내어 연합해서 두 번국(藩國)을 치자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해(奚)와 거란은 지금 이미 내속(內屬)되었는데, 돌궐이 사사로운 원한을 품고 이들 번국에 복수하고자 한 것이다. 경이 그들의 요청을 따르지 않으면 그만인 것으로, 사신을 보내는 것이야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사신을 잡아 묶으려고 한 것은 의리상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인정(人情)이니, 더구나 임금 된 도리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러고 보면 경이 충성심을 가지고 모든 사실을 반드시 아뢴다는 것을 알겠다. 영원토록 그런 정성을 간직하면 경사스러움이 끝이 없을 것이다.
 
《해동역사》에서는 이 국서를 보낸 시점에 대해서 상고할 수가 없다고 했지만, 《발해국지ㆍ장편》은 733년, 그러니까 임신서정이 있었던 해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이었다고 했다.
 
혹시라도 무예왕이 나중에나마 다시 한번 당에 문예 송환을 요구했다면 당 현종은 기어이 문예를 잡아보냈을 지도 모르지만, 무예왕도 그렇게까지 나오진 않았다. 발해의 적극적이고 당당한 외교책과 군사활동, 그리고 당 조정의 발해에 대한 입장선회, 두 나라 사이에 이렇듯 '화해 무드'가 조성되기 시작하면서 대문예라는 자는 발해와 당 양자에게 잊혀져 역사 속에서 매장되다시피 했다. 결국 이국에서 비참하게 목숨을 부지하다가 죽었던 것이다. 무예왕에게 쫓겨나고 당에게도 버림받은 그가 다시 복권된 것은 무왕이 죽은 뒤, 무예왕의 아들이자 문예의 조카뻘인 문왕 대흠무가 발해 3대 문왕으로 즉위하고, 당과의 우호관계 수립을 기념해 나라 안에 대사면령을 내리면서였다.
 
[明年新羅人金忠信, 上書於唐. 請奉旨歸國討渤海, 玄宗許之.]
이듬해(734) 신라인 김충신(金忠信)이 당에 글을 올렸다. 황명[旨]을 받들고 귀국해서 발해를 토벌하자 청하니 현종이 허락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15년 갑술(734)
 
당에 가있던 신라인 김충신의 국서 내용은 《삼국사》에 나와있다.
 
[入唐宿衛左領軍衛員外將軍金忠信上表曰 『臣所奉進止, 令臣執節, 本國發兵馬, 討除靺鞨, 有事續奏者. 臣自奉聖旨, 誓將致命, 當此之時, 爲替人金孝方身亡, 便留臣宿衛, 臣本國王, 以臣久侍天庭, 遣使從姪志廉代臣. 今已到訖, 臣卽合還. 每思前所奉進止, 無忘夙夜, 陛下先有制, 加本國王興光寧海軍大使, 錫之旌節, 以討凶殘, 皇威載臨, 雖遠猶近, 君則有命, 臣敢不祗? 蠢爾夷俘, 計已悔禍, 然除惡務本, 布憲惟新. 故出師, 義貴乎三捷縱敵, 患貽於數代. 伏望, 陛下因臣還國, 以副使假臣, 盡將天旨, 再宣殊裔. 豈惟斯怒益振, 固亦武夫作氣, 必傾其巢穴, 靜此荒隅, 遂夷臣之小誠, 爲國家之大利. 臣等復乘桴滄海, 獻捷丹闈, 効毛髮之功, 答雨露之施, 臣所望也. 伏惟, 陛下圖之.』 帝許焉.]
 
당에 들어가 숙위하던 좌령군위원외장군(左領軍衛員外將軍) 김충신(金忠信)이 황제에게 글을 올렸다. 『신(臣)이 받은 분부는 신에게 폐하의 신임표[節]를 가지고 본국에서 군사를 동원하여 말갈을 쳐서 없애고 일이 있을 때마다 계속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은 황제의 명령을 받고부터 장차 목숨을 바치려 맹세했는데, 마침 이때 교대하러 온 김효방(金孝方)이 죽었기에 제가 계속 머물러 숙위하게 되었습니다. 신의 본국 왕께선 신이 오랫동안 황제의 조정에 머물러 모셨다 하여 종질(從姪) 지렴(志廉)을 사신으로 보내 신과 교대하게 하였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이미 도착했으니 신은 어서 돌아가는 것이 합당하다 생각됩니다.
 
전에 받은 황제의 분부를 매양 생각하니 밤낮으로 잊을 수가 없습니다. 폐하께서 앞서 명을 내려 본국왕 흥광(興光: 성덕왕)께 영해군대사(寧海軍大使)의 관작을 더하고 신임표를 주어 흉악한 도적을 토벌케 하시니, 황제의 위엄이 닿는 데는 비록 먼 곳이라도 가까운 것 같고, 임금의 명령이 있는데 제가 어찌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준동(蠢動)하던 오랑캐들은 이미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리라 생각되나, 악을 제거함에는 근본을 다스려야 하고, 법을 펴는 데는 혁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사를 내는 데는 의리가 세 번의 승리보다도 더 귀중하지만, 적을 풀어놓으면 후환이 몇 대까지 끼치는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폐하께서는 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기회에 신에게 부사(副使)의 직책을 임시로 주시어 황제의 뜻을 가지고 먼 바깥으로 나아가 거듭 선포하게 해주소서. 그러면 이것이 어찌 황제의 위엄만 더욱 떨칠 뿐이겠습니까? 군사들 또한 응당 기운을 내서 반드시 그 소굴을 둘러엎고 거친 변방도 안정되어, 마침내 동쪽 신라의 신하인 신의 작은 정성이 이루어져 국가의 큰 이익이 될 것입니다. 신 등은 다시 푸른 바다에 배를 띄우고 전승의 보고를 대궐에 바칠 것이니, 터럭같은 공적이나마 드러내어 비와 이슬같은 혜택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라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도모하시기 바랍니다.』
황제가 이를 허락하였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성덕왕 33년(734) 봄 정월
 
발해를 치자는 내용인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유득공의 말은 그렇다.
 
[竟無功, 而黑水之地皆服於渤海矣.]
그러나 결국 공과가 없었고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게 정복당했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15년(734)
 
사실 신라로서는 발해가 먼저 쳐들어오지 않는 한 전쟁할 마음이 없었다. 정확히는 '먼저 공격할 생각이 없었다'고 해야 되겠지. 겨우겨우 백제와 고려를 멸하고 전쟁 위협에서 벗어난 줄 알고 좋아라 했는데, 또 전쟁하라니 미쳤나? 지금도 잘 먹고 잘 사는데. 게다가 신라가 뭐하러 당이 시키는 대로 발해와 전쟁을 하겠나. 발해야 망하든 말든 신라와는 아무 상관없었고,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일에 신라는 자기 힘을 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三十四年, 春正月, 熒惑犯月. 遣金義忠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少卿. 義忠廻, 勑賜浿江以南地.]
34년(735) 봄 정월에 형혹(熒惑)이 달을 침범하였다. 김의충(金義忠)을 당에 보내 새해를 축하하였다. 2월에 부사(副使) 김영(金榮)이 당에서 죽자, 광록소경(光祿少卿) 벼슬을 추증하였다. 의충이 돌아올 때 칙(勅)으로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주었다.
《삼국사》 권제8, 신라본기8, 성덕왕 34년(735)
 
발해만큼이나 신라도 실익을 톡톡히 챙겼다. 이듬해인 인안 16년 을해(735), 장안에 온 신라의 사신 김의충에게 부쳐, 당은 마침내 신라의 패강(대동강) 이남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히 인정했던 것이다. 그것은 처음 김춘추가 당 태종과 맺었던 밀약의 실현이자, 기회를 봐서 동쪽 땅을 모두 집어 삼키려던 야욕을 당조가 완전히 단념했음을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발해와의 전쟁에서 이렇다 할 전과를 거두지 못한 당으로서는 더이상 그 땅을 지배할 수도 넘볼 수도 없었다. 결국 고려를 무너뜨렸으나 그 땅과 백성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이겼다.
 
그리고 3월, 무예왕은 대무경 일행을 당에 보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우호의 뜻으로 돌궐이 발해에 사신을 보냈고 해와 거란을 공격하는데 협력해달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보고(?)했다. 해족과 거란족, 그리고 발해까지 돌궐 포위망에 편승시켜 돌궐을 견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던 현종이 무예왕의 사신을 받아들임으로서 두 나라 사이는 호전되었다.
 
3월 을유에 발해왕이 그의 동생 대번(大蕃)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니, 태자사인(太子舍人) 원외(員外)를 제수하고 백(帛) 서른 필을 하사한 다음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책부원귀》

인안 18년 정축(736), 신라의 성덕왕은 당에 사신을 보내 패강 이남에 대한 야욕을 포기한 당에게 감사(?)했고, 그 해 10월에 이찬 윤충과 사인 영술(英述)을 보내 평양(平壤)과 우두(牛頭) 두 주ㅡ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도, 강원도 지역의 지세를 살폈다. 《삼국사》에는 이때 개가 수도 재성(在城)의 북을 걸어놓은 누각에 올라 사흘 동안 짖었다고 한다.
 
[開元二十六年<舊唐書二十五年> 王薨. 八月辛巳赴唐.]
개원 26년(738)<구당서에는 25년(737)이라 하였다.> 왕이 승하하였다. 8월 신사에 당에 부고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무왕 인안 18년 정축(737)
 
《구당서》에 이른바 개원 25년, 인안 18년 겨울 10월 무인, 무예왕은 18년이라는 재위 기간을 마치고 눈을 감았다. 병사(病死)였다. (《구당서》에는 그가 '병으로 죽었다[病卒]'고 했지만 《신당서》는 사망원인을 밝히지 않고 그냥 '죽었다[死]'고만 적음) 《구당서》와 《신당서》의 차이는 발해 국왕의 죽음을 적을 때의 글자 선택에서도 나오는데, 무예의 죽음에 대해서 《구당서》는 '졸(卒)'이라고 적고 《신당서》는 '사(死)'로 적은 것이다. 고왕이 죽었을 때에도 '사(死)'라고 적은 《구당서》이지만(이 점은 《신당서》와 똑같다) 그에 비해 '졸(卒)'이라는 글자는 훨씬 더 격을 갖춰준 글자였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신분에 따라서 '죽음'을 표시하는 글자도 서로 달리하는데, 그 글자들을 모아보면
 
천자(황제)가 죽었을 때는 붕(崩).
제후가 죽었을 때는 훙(薨).
경대부(卿大夫)가 죽었을 때는 졸(卒).
일반 서민의 경우는 사(死).
 
《삼국사》에도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삼국 국왕들의 죽음을 '훙(薨)'으로 처리했고 (다만 삼국시대 당대에는 '붕崩'으로 적었음이 《삼국유사》및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된다)  당의 기록을 참조해서 쓴 《발해고》에서 유혜풍도 거기에 맞춰서 '훙'으로 고쳐적었는데, 하필 《구당서》에서는 '졸'이라고 쓴 것을 《신당서》에서는 무슨 이유로 격이 낮은 '사'로 적었을까. 아마도 발해라는 나라가 지녔던 지위를 《신당서》찬자들은 별로 좋게 보지 않았던 듯 하다.(더구나 무왕은 '제후의 예'를 무시한 채 '천자국' 당조를 두 번이나 공격하고, 협박까지 했던 왕이었으니)
 
무예왕을 끝으로, 《구당서》에는 더이상 '발해말갈'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무골군주 무예왕의 대당강경책이 주효한 점은 말갈 제족과 당의 교섭을 통제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이로서 당의 간섭이나 개입을 신경쓸 필요 없이 발해 조정은 말갈을 복속시키고 그들을 '발해'라는 이름 아래 통합하는 작업을 계속해 추진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고왕 때부터 시작된 당과의 알력이, 무왕 때에 이르러 사실상 그 종지부를 찍었다. 천자국 앞에서 주눅들지 않은 자주적이고 의연한 외교술과, 필요에 따라선 얼마든지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강인한 의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진작에 양성해두었을 발해의 강한 군사력을 당에 보여주었고, 당은 발해라는 나라를 더이상 말갈의 미개인이니 동쪽 땅의 반란자니 하고 부정하거나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어쩌면 무예왕은 자신의 뒤를 이어 나라를 다스릴 가독부들에게 물려줄 '영원한 제국'을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영원한 제국'을 위해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그리고 자기가 다스리는 이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여있고 주변 국가들의 동태는 어떠한지 무예왕은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무예왕의 강경책은 당과의 교섭에서 당이 발해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초반기선'을 확실하게 제압해주었지만, 무예왕 사후, 돌궐의 붕괴와 거란족과 해족의 이탈, 신라의 북진으로 발해는 결국 대당강경책을 포기하고, 문왕 때부터는 본격적으로 당과의 평화무드가 싹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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