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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7>후고려기(後高麗記)(10)
2009/04/25 06:27

[秋七月乙卯, 洛水泛漲, 毀天津橋及上陽宮仗舍. 洛、渭之間, 廬舍壞, 溺死者千餘人. 突厥登利可汗死. 北州刺史王斛斯爲幽州節度使: 幽州節度副使安祿山爲營州刺史, 充平廬軍節度副使, 押兩番、渤海、黑水四府經略使.]
가을 7월 을묘에, 낙수(洛水)가 범람하여[泛漲] 천진교(天津橋)와 상양궁(上陽宮)의 장사(仗舍)가 무너졌다. 낙수와 위수 사이에 여사(廬舍)가 무너져, 익사한 자가 천 명이나 되었다. 돌궐의 등리카간[登利可汗]이 죽었다. 북주자사(北州刺史) 왕곡사(王斛斯)를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로 삼고, 유주절도부사(幽州節度副使) 안록산(安祿山)을 영주자사(營州刺史) 평로군절도부사(平廬軍節度副使) 압양번발해흑수사부경략사(押兩番渤海黑水四府經略使)로 삼았다.
《구당서》 현종본기, 개원 29년 신사(741)
 
안록산. 당조 역사에서 지울수 없는 한 획을 그은 남자. 이 자가 언제 태어났는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703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라고만 짐작한다. 한인도 선비족도 아닌 소그드인과 돌궐(투르크)의 혼혈인으로 '알렉산더'라는 이름을 음차한 이름이 '안녹산'이다.(혹 '전쟁의 신'이라는 뜻의 '알락산'을 음역한 것이라고도) 기록된 바 안록산의 아버지는 소그드인으로 당의 무장이 된 안연언(安延偃)인데 친아버지가 아니라 양아버지라는 설도 있고, 어머니는 돌궐족(투르크)의 무녀(巫女)였던 아사덕씨(阿史德氏). 원래는 지금의 베이징 동북쪽 영주ㅡ그러니까 대조영과 이정기 같은 고려 유민들이 거주하던 곳에서 무역업에 종사하던 호시아랑(互市牙朗), 중개무역상이었다.
 
소그드란 이란 지역에 걸쳐 살던 유목민족이다. 고대 파사국(페르시아) 속주 가운데 하나였던 소그디아나 출신으로,
넓은 의미에서는 그냥 아랍인 정도로 생각하면 쉽지 않을까. 중국에서는 그들을 '속특(束特)'이라고 적고 '소그드'라고 불렀는데, 신라 최치원의 시 《향악잡영》 5수 가운데
 
蓬頭藍面異人間   쑥대머리 남빛 얼굴 이 세상 것이 아닌데,
押隊來庭學舞鸞   떼지어 뜰에 와서 난새춤을 배우도다
打鼓冬冬風瑟瑟   둥둥거리는 북소리와 솔솔 부는 바람에
南奔北躍也無端   남북으로 뛰고 달리니 끝이 없어라.
 
라는, '속독(束毒)'이라는 무용 제목이 가리키는 종족이 곧 소그드다.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지역에 해당하는 소그디아나에서 살던 이들이 머나먼 신라 땅까지 와서 살게 된 것은 그들의 활발한 대외무역활동의 결과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장사하는 이민족[胡]'이라는 뜻의 '상호(商胡)'·'가호(賈胡)'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들은 멀리서부터 순전히 '이(利)'를 찾아 동쪽으로 통하는 비단길을 지나온 장사의 귀재들이었다. 신라인들이 당의 땅에 만든 신라방처럼, 전통적으로 나라와 나라를 누비며 국제무역에 종사하던 소그드인들은 그들이 장사하러 간 곳에다 집단거주지를 만들어 그곳을 기반으로 다시 또 장사를 했는데, 천산산맥 북쪽 기슭, 동투르키스탄, 몽골 고원 안에도 소그드인들의 집단거주지가 있었고, 중국의 경우는 지금의 감숙(甘肅) 성 북서부, 그리고 수도 장안(長安)의 서시(西市) 부근에도 많이 살았다.
 
당조가 한창 성당(成唐)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태평성대를 구가할 무렵, 수도 장안의 여러 술집에서는 콧날이 오똑하고 눈이 푸른 이국의 무희(舞姬), 호희(胡姬)들이 모여서 추는 호선무(胡仙舞)라는 춤이 특히 인기였다. (이런 말 하기는 뭐하지만 그 TV에 보면 유흥업소 같은데 나가는 러시아 댄서들, 소위 '백마'와 같은 이미지였을듯) 당조를 지나 고려에도 들어온 이들 무용은 고려기(高麗技)라는 이름으로 다시 당에 역수입되어 당의 궁중무용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워낙 이민족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다보니 이들 소그드인이 능력을 인정받아 정계에 등용되는 경우도 많았다.
 
안록산의 경우는 무려 6개국의 언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하니(우리말도 포함되려나?) 이 정도면 거의 상인이 아니라 외교관이라고까지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정계에 발을 들였을 때 나이가 30대쯤 되었는데, 당시 유주절도사였던 장수규(張守珪)에게 발탁되어 그의 양자가 되었고, 그때부터 무관으로서 지내다가 당 현종 개원 29년-천보 원년(741년)에 처음, 영주자사 겸 평로군절도부사 압양번발해흑수사부경략사라는 관직을 제수받은 것.
 
현종에게 뇌물까지 써가면서 평로절도사로 승진하는 것은 이듬해인 천보 2년(742)의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이 자가 절정에 달한 당조의 태평성대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될 줄은 누구도 예상 못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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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 741년. 당 현종은 개원에서 천보로 연호를 바꾼다.
 
[天寶中, 累加特進太子詹事賓客. ]
천보 연간에 거듭 태자첨사빈객(太子詹事賓客)으로 특진시켰다.
 
당에서 연호를 천보로 바꾼 그 해(741)에, 문왕은 수도를 현주로 옮겼다.
 

<발해의 중경현덕부가 있었던 중국 길림성 화룡현 서고성자. 문왕은 742년경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신당서》발해전에는 수도를 천보 연간에 옮겼다고 했는데, 이르면 742년경에 수도를 옮겼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천보 말년(756) 무렵에 상경으로 천도했다고 했으니 14년 정도 발해의 수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지만, 《무경총요》에서는 천보 이전에 이미 중경으로 수도를 옮겼다 했으니 14년이란 기간보다 더 오랫동안 발해의 수도였을 개연성이 있다. 발해 조정이 이곳을 부수도로 운영했을 지도 모르고, 문왕이 즉위할 때부터 수도를 옮길 작정을 하고 5년 정도 기초공사를 실시했을 수도 있고.
 

<서고성 왕궁터 평면도. 정방형의 도성구조를 하고 있다>
 
원래의 수도인 구국(동모산)에서 새로이 현주를 수도로 택한 것은 발해의 정책이념 변화가 크게 작용했다. 고왕과 무왕이 추진하던 무치에서 문치로 전환한 문왕은 나라의 힘이 커지고 인구가 점점 증가하면서, 처음부터 군사요새로 조성된 구국은 더이상 수도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두도 평원의 넓은 들판과 두만강이란 큰 강을 끼고 있는 현주를 새로운 수도로 택했다.
 
문왕은 옛 고려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하는 한편, 고왕과 무왕 두 선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커진 무인세력을 견제하고 문치정책을 펴고자 했다. 서고성이 있는 화룡현에는 발해 시대의 하남둔고성과 해란고성이 있고, 문왕의 공주였던 정효공주의 무덤이 있는 용두산고분군이 있으며, 발해삼채가 발굴된 북대고분군도 있었다. 이 일대의 평원으로는
해란강과 부르하통하, 두 강이 흘러 물을 끌어오기 편리했다. 훗날 이곳은 발해 5경의 하나인 중경현덕부의 수주(首州)가 된다.
 
여담이지만 이곳이 본격적으로 조사된 것은 20세기 초반, 그것도 일제가 주도한 발굴조사에 의해서였다. 1909년에 처음 소개된 이래 1935년과 37년, 1943년과 45년에 일본인들 주도하에 발굴조사가 실시되었고, 도리야마 키이치라는 일본 학자에 의해 이곳이 옛 발해의 중경현덕부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던 것이 1980년에 정효공주묘가 발굴되면서 이곳이 중경현덕부였음이 확실시되었고. 지금은 중국에서 또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주장하면서 조사를 벌이고 있다니 참, 우리가 손 안대면 뭐든 잃어버리고 만다니까.
 
7월 계해에 발해왕이 그 아우 대번(大蕃)을 파견하여 와서 조회하니, 좌령군위원외대장군(左領軍衛員外大將軍)을 제수하고 머물면서 숙위하게 하였다.
《책부원귀》
 
대흥 7년 태세 계미(742), 그러니까 수도를 현주로 옮기고 중경성을 조영한 이듬해의 일이다. 그리고 3년 뒤인 대흥 병술(746) 3월에도 사신을 보내서 조회했다고 《책부원귀》에 나오기는 하는데, 사신을 보냈다고만 하고 별로 붙여놓은 것이 없어 그냥 그 정도만 설명하고 넘어갈란다. 흠.
 
[是年, 渤海人及鐵利惣一千一百餘人, 慕化來朝. 安置出羽國, 給衣粮放還.]
이 해에 발해인 및 철리 사람 모두 1100여 명이 덕을 사모하여[慕化](?) 내조(來朝)하였다. 출우국(出羽國, 데와노쿠니)에 안치하고 옷과 양식을 주어 돌려보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쇼쿠니혼키)》권제16, 천평(天平, 덴표) 18년(746)
 
천 명이 넘는 발해인과 철리인(철리말갈?)이 일본에 도해한 이듬해 정월, 발해는 사신을 다시 당에 파견해 정조를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遣阿湌貞節等, 檢察北邊. 始置大谷城等十四郡縣.]
아찬 정절(貞節)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검찰(檢察)케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大谷城)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삼국사> 권제9, 신라본기9, 경덕왕 7년(748)
 

천 명이 넘는 발해인과 철리인(철리말갈?)이 일본에 도해한 이듬해 정월, 발해는 사신을 다시 당에 파견해 정조를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遣阿湌貞節等, 檢察北邊. 始置大谷城等十四郡縣.]
아찬 정절(貞節) 등을 보내 북쪽 변경을 검찰(檢察)케 하였다. 처음으로 대곡성(大谷城) 등 14개의 군현을 두었다.
<삼국사> 권제9, 신라본기9, 경덕왕 7년(748)

이 무렵 신라의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한 경덕왕은 아버지 성덕왕의 친당외교를 이어받은 사람이면서, 당풍(唐風)으로 대표되는 외래문화에 심취한 사람이었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왕권강화'. 당조와 같은 강력한 왕권을 세우는 데
그 목표가 고정되어 있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경덕왕은 신라에 존재하던 고유의 이름을 모두 한자식으로 바꾸었다. 관직이면 관직, 지명이면 지명, 관청의 이름도 모두 한자식으로 고쳐 신라를 작은 당으로 만들려고 하면서, 발해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 즉위 7년에 이르러 아찬 김정절을 보내서 신라의 북변을 순찰하게 한 것이 그것인데, 이때에 이르러 신라 조정이 직접 관리를 보내 통치하는 14개의 군현을 이곳에 설치한다.
 

<황해도 평산의 태백산성. 고려 때의 대곡성에 경덕왕 7년 신라 직할군현을 설치했다.>
 
지금 황해도(북한식 지명으로는 황해북도) 평산에 남아있는 태백산성은, 원래 고려 때의 대곡성이라 불리던 곳이다. 광개토태왕이 백제와의 전쟁을 대비하면서 남쪽에다 쌓았다는 '국남7성'의 하나로서, 유래가 상당히 오래된 곳이긴 하지만 지금 남아있는 것들은 대부분 조선조에 이르러서 개축된 것. 다른 이름으로는 성황산성이라고도 불렸다던가.
 

 
<대곡산성 실측도>
 
《삼국사》를 봐도 이때에 경덕왕이 설치한 14군현이 대체로 어디에 어떤 식으로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대곡성 이외에는 잘 찾기가 어렵다. 그냥 신라 북쪽 변경에 있었던 것으로 지금의 강원도와 황해도 일대에 있었던 것만 열네 곳 추스리자면 저기 새로 대곡성에 설치된 영풍군을 포함해서 철성, 부평, 토산, 우봉, 송악, 개성, 해구, 해고, 폭지, 중반, 서암, 오관, 취성의 군이 황해도와 강원도 일대에 있었고, 철성과 부평을 빼면 나머지는 전부 황해도에 퍼져 있다. 이때에 새로이 신라의 군으로 편재된 곳 중에는 송악과 개성, 훗날 고려의 수도로서 새로운 나라의 중심지가 될 곳도 포함되어 있었지.


<대곡산성 성벽. 고구려 때의 성벽이 잘 남아있다.>
 
발해가 재지세력가인 수령을 매개로 도독과 자사가 지방을 다스렸던 것과 비슷하게, 신라 역시 지방의 재지세력가인 촌주를 매개로 중앙에서 파견한 도독이니 태수니 하는 관리들이 지방을 다스렸다. 내가 알고 있는 이 시기 지방지배의 모습.



<평산소놀음굿>
 
지금 황해도 평산에는 소놀음굿이라고 해서 농사나 사업이 잘 되고 자손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굿을 벌이는데, 단순히 개인의 굿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온 마을의 축제가 되어 이 굿을 통하여 마을의 협동과 화합을 다지며, 개인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놀이였다.
 

<진설된 신음식. 신이 드실 음식이다.>
 
굿상에는 각종 시루며 떡, 과일, 과자, 술, 정화수 등이 올려진다. 시루는 대개 제석신을 위한 제석시루, 성수신을 위한 성수시루, 조상신을 위한 조상시루 등을 준비하고, 시루 위에는 얇은 나뭇가지에 하얀 종이를 이렇게조렇게 오려 만든 서리꽃[霜花]을 꽂는다 (시루는 고려 벽화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역사가 오래되었다).
 
서리꽃은 보통 굿상의 시루 위에 꽂아 굿상을 장식하지만, 여기에 정화수를 묻혀서 굿판의 단골을 뿌리면서 축원하기도 한다. 굿상 윗편에는 각종 무신도(巫神圖)를 두는데, 만신들은 무신도를 마지(맞이), 혹은 환이라고 부른다.(우리나라 속어에 아무렇게나 낙서하듯 그린 그림을 '환'이라고 함) 황해도 굿에서는 모시는 신의 숫자가 많기 때문에 보통 20~30장 정도의 무신도를 설치한다.
 

 
평산소놀음굿은 해질 무렵에 시작해서 동이 트는 새벽까지 계속되었다. 동원되는 만신은 모두 여섯 명. 순서는 신청울림→당산맞이 및 성수거리→초가망(초부정)→칠성조→제석거리→소놀음굿→성주굿(지정닦기)→장수거리(쌍작두와 작두날 위에서는 그네타기)→타살거리→대감거리→조상거리→터주거리→말명거리→사냥굿→마당굿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제석거리까지는 집의 마루에서 열고, 소놀음굿부터는 마당에서 여는데, 이때 마당에는 커다란 물동이에다 물을 담고 바가지 여덟 개를 띄워 하늘의 8선녀가 내려오셔서 목욕할 수 있는 욕조를 만든다. 여덟 선녀는 하늘에서 내려와 물동이에서 목욕을 하고, 개운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복을 나눠준 뒤 다시 승천하는데 이 장면을 굿에서 연출한다. 이어서 상제의 명을 받들어 제석이 지상에 내려와 인간을 탄생시키고 조선국을 개국한 내력을 제석역을 맡은 만신이 타령으로 부르고, 이를 나졸들이 만수받이로 받는다.
 
이어 천상의 놀이가 끝나고 지상의 놀이가 시작되면 농신(農神)과 산신(産神), 수신(壽神)을 겸한 제석을 중심으로
마부를 상대로 타령과 대화로 엮어 나가면서 마부는 소를 끌고 다니며 발갈이를 하고, 애미보살(愛味菩薩)은 씨를 뿌리고, 지장보살(地藏菩薩)은 김매기를 하며, 신농씨(神農氏)는 농사일을 감독하는 동작을 흉내내며 노는데, 여기서는 농사지을 소를 길들여 부리는 요령이며 쟁기에 보습을 맞추는 법을 가르치는 대목 등이 재현된다. 농경의례의 굿일 뿐더러 제석님이 인간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방아를 찧고, 재수와 복을 주기 위하여 지경다지는 놀이도 있고, 출산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일기도 점지해준다.
 

<평산소놀이굿 기능보유자 고(故) 장보배(1915~1991). 1947년에 월남해서 강화도에 정착, 1985년 평산소놀이굿을 전했다.>
 
무당을 만신(萬神)이라고 하는데, 이는 ‘만가지 신을 모시는 무당’이라는 의미이다. 평산 소놀음굿의 예능보유자는 평산 출신의 만신 이선비(1934년생, 여)이다. 해주 출신으로 옹진으로 이주했고, 6.25 때에 월남해 인천에 살면서 새우젓 장사를 했다. 28세에 신이 내렸고,‘돌깨’라는 이름의 만신에게서 내림굿을 받았다. (새우젓 팔다가 신내림 받았다고 황해도 굿판에서는 '새우젓만신'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내림굿을 해준 돌깨만신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황해도 평산 출신의 장보배(1915-1991, 여)에게서 소놀음굿을 포함한 황해도 굿을 배웠다. 이 외에 전수조교인 윤정화(1924년 생, 여), 전수교육보조자인 안금순(1943년생, 여), 송경옥(1932년생, 여), 김은옥(1948년생, 여), 김학단(1936년생, 여) 등이 소놀음굿의 만신으로 활약한다.
 

<평산 소놀음굿 절차의 하나인 장군놀이>
 
황해도 굿에서 무복과 무구는 신을 상징하는 의물 그 자체다. 매 굿거리마다 신을 상징하는 무복을 입고 무구를 쓰며,
굿거리마다 신에게 바치는 굿상이 또 달라진다. 일일이 다 적자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지만, 굿거리 때마다 입는 저 옷은 뭐랄까, 일본의 무녀복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들게 만든다. 빨갛고 파랗고 노란 삼원색의 조화는 주변 사람들이 입은 흰 옷에 의해 더욱 부각된다. 오랜 옛날 무당으로서 정치까지 주관하던 통치자들은 저렇게 자신을 눈에 띄게 하는 의상을 입고 춤을 추며 자신의 특별함을 사람들에게 과시했을 것이다. 사람에게만 보이려고 입었겠는가. 하늘의 신과 땅의 신도 마땅히 한눈에 알아보셔야 한다. 천박해보인다고 탓할 필요도 없다.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온갖 색깔들이 이것저것 뒤섞인 지상에서 보이는 것들은 다 거기서 거기. 하늘의 시선에서는 천박한 것도 고귀한 것도 관여치 않는다.
 
소놀음굿 자체가 농사와 관련된 놀이다. 농사에 꼭 필요한 소를 등장시켜 노는 놀이이면서, 가정과 마을의 액운을 쫓고 풍농을 기원한다. '굿'이라는 우리 나라 제천의식이 지닌 종교적 성격과 연희적 성격,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보여준다. 지금은 농사를 짓는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고 소를 볼 기회가 많지 않아 찾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서울 왕십리, 노량진을 비롯한 경기도 북부, 멀리는 황해도와 평안도까지 널리 연행되었던 놀이다. 여러 지역의 소놀이굿 중에서 황해도 평산 소놀음굿(중요무형문화재 제90호)과 경기도 양주 소놀이굿(중요무형문화재 제70호)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평산 소놀음굿은 규모가 큰 굿이라서 동원되는 만신도 많고, 반주악기도 장구, 징, 제금(바라), 피리, 호적(태평소) 등이 쓰인다. 대개 피리는 만신이 무가를 부를 때 연주하고 호적은 만신이 춤을 출 때 연주한다. 크게 신을 굿청에 청하는 청배무가, 신을 축원하는 축원무가, 신을 놀리는 오신무가, 그리고 신을 보내는 송신무가로 나눌 수 있다. 청배무가로는 주로 '만세바지', '긴만세바지', '자진만세바지' 등을 굿거리에 따라 부른다. 춤은 반주 장단의 이름을 붙이는데, 주로 신에게 절을 할 때 추는 재배춤, 신에게 상을 올리는 거상(擧床) 장단에 맞추는 거상춤, 신을 놀리는 삼현장단에 맞추는 삼현춤, 벅구장단에 맞추는 벅구춤, 칠성거리에서 칠성칼을 들고 추는 칠성칼춤과 바라를 들고 추는 바라춤, 신이 내리기 위해 막장단에 맞춰서 도무(跳舞)하는 막춤, 제자리에서 돌면서 추는 연풍대춤 등이 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나는 황해도와 평안도, 나아가 한강 이북까지를 하한선으로 잡아도 그 이북 지역의 전통민속은 모두 고구려 문화의 권역에 놓고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 신을 모시는 만신이 되는 굿을 내림굿이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 전하는 내림굿의 절차와 제도는 모두 황해도의 것이다. 남아있는 절차를 보면 무당이 되기 위해서 치르는 의식 가운데 칼이나 방울, 부채 같은 무구(巫具)나 옷을 어딘가에 감춰놓고 감으로 찾아내게 하는 일종의 '시험'이 있는데, 고려의 유류왕은 아버지 추모왕을 찾기 위해 추모왕이 숨겨놨던 칼조각을 찾는 시험을 치렀으니 양자를 비교하면 이 정도이고, 제정일치 사회였던 부여의 풍속을 고구려가 이어받았다고 한다면 추모왕이나 그 아들 유류왕은 한 나라의 지배자이면서 또한 같은 신을 모시는 무당 즉 만신인 것이다. 지금도 내림굿을 해주는 만신과 내림굿을 받는 만신들 사이에는 신어머니-신딸 하는 식으로 혈연이나 지연이 아무 것도 없이 오직 굿을 내려주고 받은 그 관계로 해서 식구관계가 형성되니 신을 이어받는 절차를 통해 혈연이 이어지는 체계는 소급하자면 고구려 때까지도 소급할 수 있지 않을까?
 
고려계 문화라면서 왜 불교적 색채가 나오고 하느냐에 대해서는 달리 말을 붙일 것도 없다. 우리 나라에서는 불교가 민속문화와 습합해 '폐단'을 일으킨 것이 많으니까. 제석을 세 명으로 잡고 굿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는데, 고래(古來)의 환인-환웅-단군 신앙이 불교의 제석신앙과 습합해 중국이나 일본에는 없는 '삼불제석'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신격을 만들어냈다는 근거는 고려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 단군의 할아버지인 환인을 가리켜 제석 혹은 석제(釋帝)라고 주석을 적어놓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름의 글자가 너무 닮아서) 무엇보다도 팔관회는 원래 불교의 행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신들뿐 아니라 전국 산천의 토속신에게 제사지내는 행사로 발전했으니, 불교의 행사가 민속행사로 퍼졌다면 당연히 민속문화와 불교문화 사이에 소통이 있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같은 예는 일본에도 있다. 일본의 전통신인 스사노오노 미코토만 해도 불교의 우두천왕과 동일시되었고, 지금도 일본의 신사 중에는 불교의 신을 모시는 곳도 있다.
 

 
고구려 때부터의 전통이라면 왜 고구려국이라는 언급 대신 조선국이 나오느냐의 문제에 대해서 말인데, 나는 지금 북한에서 가까스로 전해지는 우리 무속의 괴이한 형태에 대해서 말을 하고자 한다. 무속이라는 것이 봉건사회의 잔재로 치부되어 미신으로 몰려 거의 명맥이 끊어지다시피 한 북한에서는 공공연히 존재하는 무당들이 사주를 봐줄 때에 으레 '장군님'을 들먹인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장군님이란 북한 사람들이 그토록 떠받드는 김일성을 가리키는데, 혹시라도 단속에 걸리더라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들어놓기 위해서 그러는 것으로 이것도 북한에서 무속이 살아남는 한 방법인 것이다.
 
소위 '숭유억불'이 행해지던 조선조에는 '살아가는 세상의 일도 모르는 주제에 죽은 뒤의 일을 말할 수는 없다', '귀신을 공경하되 너무 믿지는 않는다'면서 개뿔도 모르는 유생들이 무속과 불교를 그저 괴이한 미신으로만 생각해 절에 불지르고 당집을 부수는 일은 수두룩했으니, 무당들이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놨을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가 조선으로 바뀌고, 환인이 제석으로 바뀌는 것은 물밀듯 밀려오는 불교문화의 홍수와 무속을 억누르고 탄압하는 조선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들 나름의 자구책이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본에서 메이지유신 때에 하던 것처럼 소위 신불분리령이라는 것을 내려 무속에서 불교적 색채를 걷어내고 불교에서 무속적 색채를 걷어내고 하면 우리 문화의 원형을 나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옷은 뭐.... 2천 년이나 되는 세월을 지나오면서 그 시대의 양식에 따라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까.
 

 
황해도 무악의 반주자를 ‘기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특별히 음악적 훈련을 받은 전문음악가라기보다는 굿판을 오래 다니면서 굿과 무악을 익히는 경험 많은 여성악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때문에 황해도 굿판에서는 장구잽이를 ‘상장구할머니’라 하고 징잽이를 ‘징할머니’라고 부른다. 제금은 대개 굿판에 참여한 무당 중에서 한 명이 치는 경우가 많다. 이선비가 연행하는 소놀음굿의 장구할머니는 일명 오째 할머니라고 하는 유준남(1928년생, 여)이고, 징할머니는 배순심이다. 소탈을 쓰고 노는 굿이다보니 소탈을 쓰는 탈꾼도 중요한데, 평산 소놀음굿에서 소를 담당하는 이는 전수조교인 이창호(1926년생, 남)가 있고, 송아지를 담당하는 차흥운(1926년생, 남)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무속들은 아직도 우리가 잃어버린 옛날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느낌을 한층 더 강하게 받게 됐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게 가지는 로망이랄까. 그래서 난 무속이 좋다.
 
3월에 발해가 사신을 파견하여 매를 바쳤다.
<책부원귀>
 
대흥 경인(750)과 신묘(751) 두 차례에 걸쳐, 3월이라는 기한까지 맞춰가면서 발해에서는 당에 사신을 보냈고, 이때 '매'를 바쳤다고 《책부원귀》는 적고 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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