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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8>후고려기(後高麗記)(21)
2009/10/02 14:02 광인
<조선조의 오조룡배(五爪龍裴). 동아시아에서 용은 제왕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잠깐만, 지금까지의 발해사 연표를 짚고 넘어가보자. 보장왕 무진(668) 9월 고려 멸망부터,
-태세 경오(670) 4월 부흥고려왕 안승 신라 망명(보덕국 성립)
-태세 신미(671) 7월 안시성 함락.
-계유(673) 5월 호로하 패전
-정축(677) 2월 보장왕 요동 귀국
-신사(681) 당, 보장왕 공주로 소환.
-임오(682) 보장왕 사망
-계미(683) 10월 신라, 보덕왕 안승 금성 소환
-갑신(684) 11월 보덕국 반란 진압(고씨 왕통의 종언)
여기까지는 기록대로 적었고 앞으로도 기록대로,
태세 병신(696) 거란족 이진충의 반란, 고려 유민의 탈출시작
태세 무술(698) 발해 건국(일단은?)
태세 경자(700) 대조영, 천문령에서 이해고의 추격군 격파(《동사강목》고이 참조)
인안 원년(719) 대조영 사망, 무예왕 즉위
인안 14년(732) 발해 대장 장문휴, 당의 등주 공격ㆍ무예왕의 친위군 마도산 공격(임신서정任申西征)
대흥 원년 무인(738) 무예왕 사망, 흠무왕 즉위
흠무왕의 연호는 대흥인데 전왕의 죽은 해를 다음 왕의 원년으로 삼던 즉위년칭원법에 따라,
대흥 원년(1년)은 간지로는 태세 무인이자 서기로는 738년. 여기서부터 시간대 계산이 필요하다.
대흥 2년 기묘(739)
대흥 3년 경진(740)
대흥 4년 신사(741)
대흥 5년 임오(742)
대흥 6년 계미(743)
대흥 7년 갑신(744)
대흥 8년 을유(745)
대흥 9년 병술(746)
대흥 10년 정해(747)
대흥 11년 무자(748)
대흥 12년 기축(749)
대흥 13년 경인(750)
대흥 14년 신묘(751)
대흥 15년 임진(752)
대흥 16년 계사(753)
대흥 17년 갑오(754)
대흥 18년 을미(755)
대흥 19년 병신(756)
대흥 20년 정유(757)
대흥 21년 무술(758)
대흥 22년 기해(759)
대흥 23년 경자(760)
대흥 24년 신축(761)
대흥 25년 임인(762)
대흥 26년 계묘(763)
대흥 27년 갑진(764)
대흥 28년 을사(765)
대흥 29년 병오(766)
대흥 30년 정미(767)
대흥 31년 무신(768)
대흥 32년 기유(769)
대흥 33년 경술(770)
대흥 34년 신해(771)
대흥 35년 임자(772)
대흥 36년 계축(773)
보력 원년- 대흥 37년 갑인(774)
보력 2년 - 대흥 38년 을묘(775)
보력 3년 - 대흥 39년 병진(776)
보력 4년 - 대흥 40년 정사(777)
보력 5년 - 대흥 41년 무오(778)
보력 6년 - 대흥 42년 기미(779)
보력 7년 - 대흥 43년 경신(780)
보력 8년 - 대흥 44년 신유(781)
보력 9년 - 대흥 45년 임술(782)
보력 10년- 대흥 46년 계해(783)
보력 11년- 대흥 47년 갑자(784)
보력 12년- 대흥 48년 을축(785)
보력 13년- 대흥 49년 병인(786)
보력 14년- 대흥 50년 정묘(787)
보력 15년- 대흥 51년 무진(788)
보력 16년- 대흥 52년 기사(789)
보력 17년- 대흥 53년 경오(790)
보력 18년- 대흥 54년 신미(791)
보력 19년- 대흥 55년 임신(792), 보력연호 소멸
대흥 56년 계유(793)
대흥 57년 - 폐왕 갑술(794)
대충 이렇게 되는데, 《쇼쿠니혼키》에도 기재돼있다시피 문왕이 승하한 것은 대흥 57년.《발해고》에서는 이것이 당 덕종 정원 10년이라 했고 간지로는 태세 갑술에 해당하는 서기 794년이 문왕의 사망년도가 된다. 대흥 57년에 죽었다는 기록을 믿는다면 말이다.
대조영이 언제 나라를 세웠는지는 어느어느 연호를 쓰던 때라고 하면서 뭉뚱그렸지만 그 사망년도는 719년이라는 것을 밝힌 이상 여기서부터 기년을 잡고 적어도 대흥 57년이 서기 몇년이냐 하는 정도는 충분히 계산을 짚어낼 수가 있다. 바깥에 나가는 것을 싫어하다보니 웬만한 것, 특히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 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인터넷 백과사전을 통해서 자료를 찾곤 하는데 문왕의 경우는 《발해고》에 기록된 794년보다 1년 앞당겨서 793년이 사망년도라고 적어놔서 의문스러웠다.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높고 여러 정보를 많이 접한 선진들께서 정리하신 정보를 바탕으로 적은 것이라서 분명히 근거없이 1년을 앞당기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과연 근거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대구 도서관들은 희한하게 얻을 수 있는 자료들이 한양에 비해 많지 못해서 이 이유를 설명해줄 책을 찾지 못했다. 옛 기록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원칙 비스무리한 룰을 세워놓고 역사이야기를 짓는 입장에서 안정복 영감이 《동사강목》에서 주장한 내용을 따라 698년과 700년을 동시에 발해 건국 기사에 적었지만, 《발해고》나 《쇼쿠니혼키》가 시기를 정확히 명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왕의 죽음에 대해서만은 쉽게 옛 기록을 따를 수만도 없었던 것이 옛날 기록이라고 항상 정확한 것을 수록하는 것이 아니며 후대에 와서 그때 틀리게 적은 것을 새롭게 밝혀내는 일도 적지 않은 까닭이었더랬다. 내가 날짜계산을 잘못했나, 싶어서 대흥 원년부터 57년까지 서력연대를 쭈욱 적어내려가기까지 했다. 저런 식으로 말이다.
《구당서》나 《신당서》모두가 문왕이 졸한 시기를 언제라고 콕 집어 적어놓은 것은 아니고 대흥 57년이 정원 10년이라고 《발해고》에서 말한 것은 아마 《쇼쿠니혼키》의 기록을 보고 《당서》의 연표에 맞춰서 계산한 것 같은데 《쇼쿠니혼키》에서 말한 내용이 틀린 것인지, 중국 사람들의 날짜기록법이 틀리지 않은 이상에야 《발해고》가 틀렸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무엇보다도 대흥 57년을 《쇼쿠니혼키》에서 운운한 것은 문왕의 손자로서 6대 가독부로 즉위한 강왕 대숭린의 입을 빌려서 전하고 있는 것이라(대숭린 본인이 자기 할아버지가 그때 죽었다고 국서에서 말했다) 그 가치는 이미 증명된 것이다. 하지만 무왕이 죽자마자 문왕이 연호를 대흥으로 바꿨을까? 그건 결코 확신할 수 없다. 무왕이 죽고 못 되어도 1년(신라의 경우는 3년)이 지나서야 느즈막이 연호를 바꿨을 수도 있고 보면 대흥이라는 연호의 사용시기를 두고 또한번 논란이 일 수 있겠지만, 나도 일단 배우는 입장이라 이것은 이러하다고 확언할 수 없는 탓에 대흥이라는 연호가 문왕의 즉위 시점부터 사용되었다고 하는 종래의 설명을 따르는 것이다.
[廢王諱元義, 文王族弟也. 文王子宏臨早卒, 元義立.]
폐왕의 휘는 원의(元義)이며 문왕의 족제다. 문왕의 아들 굉림이 일찍 죽어서 원의가 즉위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中 폐왕(廢王)
족제라는 말은 국어사전에 보니까 먼 동생뻘을 가리키는 말이라 했다. 《신당서》에 보면, 문왕이 붕어하였을 때에 그에게는 굉림(宏臨)이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일찍 죽었기 때문에 원의가 즉위했던 것이고....문왕에게도 장남이나 차남(정효공주의 오라비뻘 되는)이 있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첫째부터 넷째까지 다 딸이었는지 모르지만 아들복은 지지리도 없었던 사람인 듯 하다. 유교에서 말하는 대의에 따르면 아들이 죽었으면 그 아들의 아들에게, 그 아들이 없으면 다른 아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상례이고 먼 친척뻘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다른 여러 황자들을 제치고 대원의가 즉위한 것은 그의 즉위가 정상적인 것과 거리가 멀었다는 뜻ㅡ이젠 이런 말을 쓰기도 귀찮다ㅡ.
[一歲猜虐, 國人弑之.]
한 해도 못 넘기고 성격이 포악하다 하여 국인이 죽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中 폐왕(廢王)
이이화 교수는 왕위에 앉은지 1년도 안 되어 원의왕이 살해당했다는 기록을 가리켜 그가 문왕의 황자들을 죽이고 지위를 찬탈했다는 증거라고 했다. 백제 때에 침류왕이 죽은 뒤 그의 원자인 아화가 왕위에 올라야 함에도 침류왕의 아우였던 진사가 아화의 나이가 어리다는 점을 들어 그 자리를 가로채서 꿰차고 앉은 일도 있지만, 동성왕은 찬탈과정도 없이 정식 절차 밟아서 즉위해놓고도 결국 말년의 폭정 때문에 국인들 손에 제거당하지 않았던가.
폐왕 원의가 죽고 대화여가 성왕으로 즉위했다가 다시 대숭린으로 발해의 왕위가 넘어가는 데에는 1년, 너무 빠른 전개상황이 벌어진다. 발해 국인들은 대원의를 폐한 뒤 죽이고, 대신 문왕의 증손에 해당하는 대화여를 새로운 발해의 국왕으로 즉위시켰다. 그가 바로 성왕이다.
[成王諱華璵, 宏臨子也. 國人弑元義推立王.]
성왕(成王)의 휘는 화여(華璵), 굉림의 아들이다. 국인이 원의를 죽이고 왕으로 세웠다.
<발해고> 군고(君考) 中 성왕(成王)
《발해고》 군고에서는 가볍게 한 줄로 넘겼지만, 성왕이라는 시호에서 미루어 추정해볼 때 발해역사에서 가볍게 넘길만한 인물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유교사상에서 왕에게 '성(成)'이라는 시호를 올리는 것은 국가의 체제라던가 조직 같은 것을 정비했을 때에만 적용되는 엘리트급 시호거든. 아마 성왕 때에 이르러서 발해의 기본조직이 모두 완성되고, 고려나 조선의 성종이 그랬던 것처럼 율령이며 관청, 갖가지 문물 제도 같은 것이 정비되었으리라.
[改元中興, 還上京.]
중흥(中興)이라 개원하고 상경(上京)으로 돌아왔다.
<발해고> 군고(君考) 中 성왕(成王)
연호에서도 보이듯, 성왕은 나름대로 나라를 일신하려는 의도를 갖고 수도를 다시 북쪽의 상경으로 옮겼겠지만, 수도를 옮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성왕은 죽어버렸다. 짧은 재위기간을 누리고 생을 마감한 가독부에게 발해 조정의 신료들은 성왕(成王)이라는 묘호를 지어 올렸다. 그리고 당 덕종 정원 11년(795) 2월에 대숭린에게 발해국왕의 계승을 승인(?)한다는 내용이 전해졌지. 즉 아무리 늦어도 정원 11년 2월까지는 중흥 연호가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봐야 한다는 얘기다. 정원 10년 3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두 명의 가독부가 다툼을 벌였다고 하는 것인데, 나 자신은 일단 정원 10년, 그러니까 대흥 57년(794) 3월 4일에 문왕의 승하, 폐왕 대원의의 즉위와 피살을 고한 기록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一歲猜虐, 國人弑之.
《발해고》에서 말한 것으로 《당서》를 참조한 것인데 앞부분에서 '일세(一歲)'라고 말한 부분이 폐왕 대원의의 즉위기간이고 1년 365일(당시에는 362일)을 꽉 채웠거나 거의 다 채웠다는 뜻으로 해석할 경우 다음 왕인 성왕의 즉위기간은 없어지게 된다. 문왕의 사망년도를 793년으로 끌어올린 것은 그런 이유가 아닐런가. 하지만 만약 '一歲'라는 저 단어를 '1년'이라는 기한이 아니라 다른 뜻으로 해석해볼 수는 없는 것인가. '1년'이라는 단어를 바로 이듬해까지 잡는 것이 아니라, 폐왕 원의가 즉위했던 794년 바로 한 해 안에 시간을 한정하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한 해'란 즉위한 그 해 자체를 의미하며 즉위한 시간을 의미하진 않는다. 즉 '1년만에'가 아니라 '1년도 못 되어'라는 뜻으로 794년에 즉위한 폐왕 원의는 794년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쫓겨났고 794년 그 해에 피살당했다는 말이다. 늦어도 794년 말엽에. 그리고 화여왕의 즉위와 중흥 연호의 선포, 그리고 강왕의 즉위는 794년 말엽과 795년 2월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동안에 일어난 과정을 뭉뚱그려 서술한 것이다.
국왕이 일찍 죽는다ㅡ는 것은 흔히 비정상적인 죽음이 대부분이고 폐왕 원의나 화여왕의 죽음도 비정상적인 죽음인가 하는 물음이 나올 수도 있겠고 그걸 내가 '그렇다'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찍 죽는다'는 사건 자체가 그리 드문 것은 아니다. 후대의 일이긴 하지만 신라의 신무왕도 즉위한 그 해에 죽었는데 즉위한지 석 달 만이었고, 고려의 순종도 즉위 석 달만에 죽었다. 폐왕 원의는 '국인에게 살해'라는 비정상적인 죽음으로 오래 재위하지 못했지만, 화여왕은 그와 달랐다. 폐왕 원의를 죽인 국인들이 막상 즉위시켜놓고 보니 몸이 골골하는 약골이라 제 명에 못 살고 갔거나, 아니면 즉위시켜놓고 보니 마음에 안 들어서 죽였다거나, 하지만 그랬다면 굳이 그에게 성왕이라는 최고의 묘호를 올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냥, 발해 문왕 사후의 정계의 혼란상이 원의왕의 폐위와 화여왕의 요절이라는 두 가지 사건으로 나타났고 숭린왕이 즉위하면서 그 혼란이 안정되었다는 정도로만 알면 충분할 것이다. 사실 정계가 어떻게 돌아가든 그건 백성들, 민생에 그리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정계가 개판이 돼도 백성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도둑질을 하던 구걸을 하던 입에 풀칠은 하고 살 테니까... 그걸 '산다'고 말할 수 있는지 어떤지는 별개의 문제지만 말이다. 위에서 말한 것대로 '성왕'이라는 묘호에 맞춰 발해에서 정비했다고 전하는 중앙관제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하고 넘어가고자 이 잡문을 쓴다.
《신당서》는 장건장의 발해 견문록인 《발해국기》(834)를 전거로 발해의 중앙관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삼성육부'란 곧 선조성ㆍ정당성ㆍ중대성의 세 성을 중심으로 충ㆍ인ㆍ의ㆍ지ㆍ예ㆍ신의 여섯 부를 거느렸고 그밖의 다른 부수적 기관들을 산하에 설치해 관리했다는 것임을 앞서 말한바 있다. 여기서는 발해 성왕 때에 발해의 기본제도가 '법령'으로 정착되었음을 전제하고 글을 쓰는 것임을 밝혀둔다.
3성 6부와 함께 7사(寺)ㆍ1대(臺)ㆍ1국(局)ㆍ1원(院)ㆍ1감(監), 군사조직으로 10위(衛)가 설치되었는데, 대체로 중국 제도를 본따서 설치했다. 소위 '5경 15부 62주'로 대표되는 발해의 행정구역 구획도 당조의 제도를 모방한 것인데, 《신당서》에는 개주와 숭주를 제외한 60주의 이름만을 수록하고 있다. 일본 학자 하마다 고사쿠는 741년을 마지막으로 발해에서 말갈인 고유의 이름을 띠고 있는 사신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점, 약홀주니 목저주니 하는 고려식 지명들이 759년까지 확인되다가 갑자기 834년에 이르면 당의 그것과 같은 한 글자식 지명으로 이름이 바뀌며, 그 변화가 759년에서 834년 사이에 이루어졌음을 지적한다. 문왕 시대를 기점으로 지명과 인명에 대한 당풍화(唐風化)가 강하게 진척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문왕이 연호를 '대흥'에서 '보력'으로 바꾼 것(773)과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웃나라 경덕왕의 경우처럼 경덕왕이 한문식으로 바꾼 우리나라 고유지명이나 관직명 및 기구 같은 것은 경덕왕 사후에 즉위한 혜공왕 때에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갔는데, 보력에서 다시 예전의 연호 '대흥'으로 되돌린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로 발해의 당풍화정책이 국내의 압력과 반발에 부딪쳐 결국 수포로 돌아갔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문왕이 실패한 당풍화정책을 다시 완성시켰거나 절충시키는 시도가 화여왕 때에 있었고, 그것이 화여왕으로 하여금 '성왕(成王)'의 존호를 받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758년 8월에 관명을 당풍으로 고쳤다가 다시 복구했고 신라에서도 경덕왕이 죽자마자 옛 제도로 회귀했지만 발해에서만 그런 기록이 없는 것을 들어 하마다 고사쿠는 신라나 일본과는 달리 발해에서는 당풍화한 제도를 예전처럼 되돌려놓지 않았다고 했지만 그건 사실과 다를 것이다. 완전히 되돌리지는 않아도 약간의 '절충'을 통해서 당풍의 제도와 나란히, 발해 고유의 제도를 되돌려놓은 것일지도 모른다.
7사란 곧 전중시ㆍ종속시ㆍ태상시ㆍ사빈시ㆍ대농시ㆍ사장시ㆍ사선시를 말하고,
1대란 중정대이며, 1국은 항백국, 1원은 문적원이며 1감은 주자감이다. 이들 관서의 역할에 대해 찾아보니까
전중시는 가독부의 의복·가마·음식 같은 생필품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고,
종속시는 가독부의 일가 친척의 족보를 맡고(고려나 조선의 종친부처럼)
태상시는 국가 제사 및 예절 문제를 맡아보던 의부(예부)소속 관아이고,
사빈시는 앞서 소개했듯 외교를 맡아보는 관청(홍려관처럼)
대농시는 농업ㆍ곡식업무 수행 및 창고 관리를 맡아보고
사장시는 외국과의 교역 및 재화를 관리하던 인부(호부)소속 관청이며(발해에만 있었음),
사선시는 궁중의 술과 음식을 담당하던 관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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