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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2>후고려기(後高麗記)(25)
2010/03/23 13:45  광인

원유왕의 연호는 영덕(永德). 영원한 덕행이라는 뜻이다. 《일본후기》에는 《일본기략》을 인용해 겨울 10월 계유 초하루에 사신을 보냈다는 얘기가 나오지만 이것이 어느 시대의 일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문헌 자체가 소멸되어 알 길이 없다. 《일본후기》 자체가, 전승되면서 중도에서 내용 일부가 멸실된 것을 당대의 같은 문헌들을 보고 짜집기하듯 메꿔넣은 것이라 완전한 책이라 말할 수가 없다. 
 
[定王諱元瑜, 康王子也. 改元永德. 元和四年, 唐冊王銀靑光祿大夫ㆍ檢校秘書監ㆍ忽汗州都督ㆍ渤海國王]
정왕의 휘는 원유(元瑜)이며 강왕의 아들이다. 연호를 영덕(永德)이라 하였다. 원화 4년(809)에 당이 왕을 책봉하여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ㆍ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ㆍ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ㆍ발해국왕으로 삼았다.
《발해고》 군고(君考), 정왕
 
이건 반칙이다. 분명 아버지 강왕은 금자광록대부(정3품)였는데, 아들 원유왕은 뜬금없이 은청광록대부(종3품)로 내려갔다. 갑자기 당조에서 원유왕의 관직을 깎아버린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추측이지만 당조에서 발해를 제의 동맹국이자 후방에서 지원해주는 세력으로 간주하고 '한통속'이라 못 믿겠다면서 관작을 깎아버렸을 수는 있겠다. 아무튼 이후 발해의 역대 가독부들은 모두 은청광록대부 작위를 받았고, 이것은 제가 패망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五年, 二遣使朝唐.]
5년(810)에 두 번 사신을 당에 보냈다.
《발해고》 군고(君考), 정왕
 
영덕 2년, 간지로 태세 경인(810)에 해당하는 당 헌종 원화 5년 한 해 동안에 원유왕은 두 번, 당에 사신을 보냈다. 《책부원귀》에 보면 첫번째로 온 사신은 고재남(高才南)인데 관직이 뭐였는지는 나와있지가 않다. 위치 때문에 그런 것인가는 모르겠지만 신라가 왕위에 오르고 2년 정도 지나서야 책봉받는 것에 비하면 발해는 즉위하고 바로 책봉사가 왔다. 제나 신라, 그리고 발해도 모두 당조로부터 책봉을 받았건만 유독 발해만이 지방정권이고 신라는 지방정권이 아니었다는 데는 아무래도 동의하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어디어디에 사신 보냈다'는 기록만 갖고는 발해라는 나라의 내부사정에 대해 정보를 얻고 싶어도 얻을 길이 없다. 대부분 정치적인 사건만이 문헌의 기록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夏四月庚午朔, 饗渤海使高南容等, 於鴻臚館.]
여름 4월 경오 초하루에 발해의 사신 고남용(高南容) 등에게 홍려관(鴻臚館, 고료칸)에서 잔치를 열어주었다.
《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 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기랴쿠)》권제18, 일문(逸文), 대동(大同, 다이토) 5년(810) 4월 경오 초하루
 
정왕이 일본에 보낸 사신 고남용의 관직은 화부소경(和部少卿) 겸 화간원사, 봉호는 개국자(開國子)였다. 발해의 '3성 6부'는 충인의지예신(忠仁義智禮信)의 여섯 가지 단어로 6부의 명칭을 정했는데 '화부'란 건 없으니 여기서는 아무래도 '화부(和部)'가 아닌 '지부(智部)'로 보는 것이 옳겠다. '지(智)'와 '지(知)'는 글자에 비슷한 획이 들어갈 뿐 아니라 그 뜻까지 비슷비슷해서 혼동되기 쉬운 한자인데, '지(知)'는 또 '화(和)'와도 글자가 비슷하다.(나도 한자 배울때 이것 구별 못해서 애먹었는걸) 처음에 쓰는 사람이 잘못해서 '지(知)'로 쓴 것을 전승과정에서 '화(和)'로 써버린 것이리라. 지부는 곧 병부이니 지부의 소경을 지낸 고남용도 어떤 의미에서는 무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강왕 때부터 원유왕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무관 혹은 무관직과 연관이 깊은 사람이 발해에서 일본으로 보내졌다. 
 
[丙寅, 渤海使首領高多佛, 脱身留越前国. 安置越中国, 給食. 即令史生羽栗馬長并習語生等, 就習渤海語.]
병인(27일)에 발해의 사신 수령 고다불(高多佛) 등이 몸을 빼어 월전국(越前国, 에치젠노쿠니)에 머물렀다. 월중국(越中国, 엣츄노쿠니)에 안치하고 먹을 것을 주었다. 곧 사생(史生) 우율마장(羽栗馬長, 하구리노 마나가) 및 습어생(習語生) 들에게 발해말을 가르치게 했다.
《일본기략(日本紀略, 니혼기랴쿠)》 인용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 권제18, 일문(逸文), 대동(大同, 다이토) 5년(810) 5월
 
고남용을 따라가지 않고 월전(에치젠)에 남은 고다불은 그 뒤 월중(엣츄)에서 일본의 사생 우율마장(하구리노 마나가)을 비롯한 일본의 습어생들에게 발해어를 가르치는 역할을 맡았고, 2년 뒤인 정력 4년(812년, 왜황 홍인 3년) 12월 임진(8일)에 고정고웅(高庭高雄, 다카바노 다카오)라는 이름까지 받는다. 일본에 아예 귀화한 것이다.
 
일본과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발해의 사신들은 당대 '공용어'인 '한문'으로 된 외교문서를 서로 교환하거나 필담을 주고 받는 데만 그쳤지만, 이 무렵에는 아예 일본 사람들 본인들이 발해어를 배워 사신과 직접 교역할 필요성을 느꼈던 듯. 일본으로 오는 발해 사신들이 도착하는 지점인 월중(엣츄)과 월전(에치젠) 지역에서 특히 그러했는데, 이곳이 수도로 들어가기 위한 중간거점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운좋게 수도로 들어가면 좋은데, 재수없게 수도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그러거나, 수도로 들어가더라도 귀국하려면 이곳에서 주로 머물러야 했으므로 발해말을 할줄 아는 사람을 찾게 된 것이다. 사신 대접을 해야 되니까. 게다가 사신들 따라온 사람들이 사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갖고 있던 물품을 맞바꾸는 등의 교역도 이루어졌기에, 발해 사람들을 상대로 장사해서 한몫 잡아보자는 사람들도 늘어났겠지.
 
[丙寅, 渤海国遣使獻方物. 其王啓云 "南容等廻, 遠辱書問, 悲切三考, 慰及藐孤。捧讀之時。無任哀感。伏承先帝。仙馭昇遐。太上天皇, 怡神閑舘, 萬機之重 早識所歸. 孟秋尚熱, 伏惟天皇, 起居萬福. 即此元瑜蒙免, 天皇繼登寳位, 置命惟新, 歡洽兆民之心, 頼及一方之外. 在於文好, 休□攸同, 事貴及時, 不可淹滯. 重差和部少卿兼和幹苑使開国子高南容等奉啓, 用申慶賀之礼, 兼上土物, 具在別録. 况南容等, 再駕窮船, 旋渉大水, 放還之路, 恐動不虞. 伏望遠降彼使. 押領同來, 實謂當仁, 伏惟照諒. 封域遥隔, 拜賀未由."]
병인(27일)에 발해국이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쳤다. 그 왕의 계(啓)에서 말하였다. “남용(南容) 등이 돌아와서는 멀리서 서(書)을 더럽혔으나 자비로우심은 선고[三考]에게 절실하였고 위로하심이 藐孤에 미치니 봉독(捧讀)을 하는데 哀感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엎드려 소식을 들으니[伏承] 선제(先帝)께서 선취(仙馭)하여 승하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상천황(太上天皇)께서는 세상을 떠나셨으나[怡神閑舘] 만기(萬機)의 소중함과 돌아가야 할 곳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초가을이지마는[孟秋] 아직 덥습니다. 엎드려 비노니 천황(미카도)께 만복(萬福)이 기거하시기를. 이 원유(元瑜)는 은혜를 입어 죄를 면했고[蒙免] 천황(미카도)께서 보위(寳位)를 이어 명을 새롭게 하시니[惟新] 많은 백성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든든함이 바깥의 한 나라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글로서 사귀는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때맞춰 일을 처리함을 귀하게 여기니 지체하여 머물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금, 지부소경[和部少卿] 겸 화간원사(和幹苑使) 개국자(開国子)인 고남용 등에게 부쳐 계를 올립니다. 경하(慶賀)의 예와 함께 토물(土物)을 바쳤으니 별록(別録)으로 갖춰두었습니다. 헌데 남용 등이 다시금 작은 배를[窮船] 타고서 큰 물을 건너가니 돌아오는 길에 뜻하지 못한 일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멀리서 그곳의 사신을 동행시켜주시기를. 그것은 실로 인(仁)이라 할 것이니 널리 밝게 살펴주소서. 봉역(封域)이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저 축하드리는 것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0, 홍인(弘仁, 코닌) 원년(810) 9월
 
이 해 여름에 귀국한 고남용은 다시 동해를 건넜다. 9월 말에 일본에 도착한 그는 발해에서 가져온 방물과 계서를 바치고, 왜황 환무(간무)의 붕어 및 왜황 차아(사가)가 즉위한 것을 조문하고, 축하했다. 우선순위는 물론 왜황 차아(사가)에 대한 즉위 축하에 있었다.

[乙卯, 遣大納言正三位坂上大宿禰田村麻呂, 中納言正三位藤原朝臣葛野麻呂, 參議從三位菅野朝臣眞道等, 饗渤海使於朝集院, 賜祿有差.]
을묘(20일)에 대납언(大納言, 다이나곤) 정3위 판상대숙녜(坂上大宿禰, 사카노우에노다이스쿠네) 전촌마려(田村麻呂, 다무라마로), 중납언(中納言, 츄나곤) 정3위 등원조신(藤原朝臣, 후지와라노아손) 갈야마려(葛野麻呂, 카츠노마로), 참의인 종3위 관야조신(菅野朝臣, 스가노노아손) 진도(眞道, 사네미치) 등을 보내어 발해의 사신에게 조집원(朝集院)에서 잔치를 열어주고 차등있게 녹을 내렸다.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1, 홍인(弘仁, 코닌) 2년(811) 정월
 
정월 20일에 조집원(朝集院)에서 열린 발해 사신들의 송별잔치에는 낯익은 이름도 보인다. 에미시를 정벌할 때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 세이이다이쇼군)으로서 큰 공을 세웠던 판상전촌마려(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같은.
 
뿌리를 갖고 말하자면 판상(사카노우에) 집안도 한반도에 뿌리를 둔 집안이라는 설이 있기는 하지만, 정작 판상(사카노우에) 집안은 자신들을 중국 후한 황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헌제의 아들인 석추왕(石秋王)의 아들 아지왕(阿智王)이 오진 덴노 때에 귀화했고 지로직(志努直, 지로노아타이) 때에 판상(사카노우에)씨 성을 받았다는 것이다.

[丁巳, 渤海国使高南容歸蕃. 賜其王書曰 “天皇敬問渤海国王. 南容入賀, 省啓具之. 惟王資質宏茂, 性度弘深. 敦恵輯中, 盡恭奉外. 代居北涯, 與国脩好, 沃日滄溟, 企乃到矣. 接天波浪, 葦能乱之, 責深効精, 慶賀具礼, 眷彼情款, 嘉賞何止. 朕嗣膺景命, 虔承叡圖. 尅己以臨寰區, 丕顯以撫兆庶, 徳未懷邇, 化曷覃遐. 王念濬善隣, 心切事大, 弗難劬勞, 聿脩先業. 况南容荐至, 使命不墮, 船舶窮危, 謇志増勵, 雖靡來請, 豈能忍之. 仍換駕船, 副使押送. 同附少物, 至宜領之. 春寒. 惟王平安. 指此遣書, 旨不多及.”]
정사(22일)에 발해국의 사신 고남용 등이 귀국하였다[歸蕃] 그 왕에게 글을 내렸다. "천황(미카도)은 공경히 발해국왕에게 묻노라. 남용이 들어와 축하하였고 계를 통해 모두 알았습니다. 왕은 크고도 성한 자질에 품성과 도량은 넓고도 깊다는 생각이 들었소. 두터운 은혜를 나라 안에 모으고 극진한 공경으로 나라 바깥을 받드는구료. 대대로 북쪽 바닷가에[北涯] 살면서 다른 나라와 우호를 닦고 해가 큰 바다에 솟듯[浴日滄溟] 곧 이르기를 바랬소. 하늘에 닿을 듯한 파도는 힘없는 쪽배를 어지럽히지만, 스스로 깊이 책망하는 마음과 경하하는 예를 갖추었으니 그 정성 살피자면 가상함이 끝이 있겠소이까. 짐은 밝은 천명을 이어받아 경건히 거룩한 위업을 받았소. 스스로를 이기고 천하에 임하여 크고 밝은 덕으로 많은 백성들을 보살피고자 했지만, 덕은 가까운 곳도 품지 못했고 먼 곳까지 교화할 수도 없었소. 왕께서는 이웃 나라의 선린(善隣)을 생각하며 마음으로는 간절히 큰 나라를 섬기고(?), 힘들고 수고스러워도 어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선조의 업을 바로 닦을 수가 있었소. 하물며 남용 등이 거듭 이르러 사명(使命)을 떨어뜨리지도 않았고, 배들은 비록 궁색하고 위험했지만 올바른 뜻에 힘썼으니 비록 오지 말라고 사정한들 참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에 타고 갈 배를 바꾸고 사신을 보내어 압송합니다. 조그만 물품도 같이 부쳤으니 이르면 받으시기를. 봄이지만 아직 춥습니다. 왕께서는 평안하시길. 이 글만으로는 모든 뜻을 담을 수가 없군요."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1, 홍인(弘仁, 코닌) 2년(811) 정월
 
김육불은 《발해국지ㆍ장편》에서 국서의 틀린 글자들을 조목조목 지적한다. '해가 바닷물에 씻기듯[浴日蒼溟]'이라는 구절도 그에 따르면 '해가 바다에서 솟아오르듯[發日蒼溟]', '책심(責深)'도 '신침(신琛)'을 잘못 쓴 것이고
천(荐)도 '거듭 천(洊)'으로 적어야 옳다는 것이다.

[庚寅, 幸神泉苑. 右近衛府奉獻. 侍臣賜衣被. 是日, 遣渤海国使正六位上林宿祢東人等辭見, 賜衣被.]
경인(27일)에 신천원(神泉苑, 신센엔)에 행차하였다. 우근위부(右近衛府, 우콘에후)에서 봉헌(奉獻)하였다. 시신(侍臣)에게 의피(衣被)를 주었다. 이 날 견발해국사(遣渤海国使) 정6위상 임숙녜(林宿祢, 하야시노스쿠네) 동인(東人, 아즈마히토) 등이 와서 뵈었으므로 의피를 내렸다.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권제21, 홍인(弘仁, 코닌) 2년(811) 4월
 
12월에 송발해객사로 임명된 종6위상 임동인(하야시노 아즈마히토)과 함께, 이듬해 4월에 고남용은 발해로 돌아왔다. 임동인(하야시노 아즈마히토)이 귀국한 것은 그로부터 여섯 달 뒤였다.
 
[冬十月癸亥, 正六位上林宿禰東人等, 至自渤海, 奏曰 "国王之啓, 不據常例. 是以去而不取. 其録事大初位下上毛野公嗣益等, 所乘第二船, 發去之日, 相失不見, 未知何在."]
겨울 10월 계해(2일)에 정6위상 임숙녜(林宿禰, 하야시노스쿠네) 동인(東人, 아즈마히토) 등이 발해에서 돌아와 아뢰었다. “국왕의 계(啓)가 상례(常例)에 어긋났습니다. 이에 물리치고 받지 않았습니다. 그 녹사(録事) 대초위하(大初位下) 상모야공(上毛野公, 카미츠케누노기미) 사익(嗣益, 츠쿠마츠) 등이 타고 있던 두번째 배는 돌아오던 날 서로 놓치는 바람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일본후기(日本後紀, 니혼고키)》 권제21, 홍인(弘仁, 코닌) 2년(811)
 
원유왕 때 두 번 보낸 사신은 고남용과 고다불 한 명이 중복으로 간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지금까지 잠잠한줄 알았던 예의 그 '전례문제'가 튀어나왔다. 무왕 때에 처음으로 일본과 교섭한 이래로 잊을 만 하면 튀어나오니 이거야 안 다룰 래야 안 다룰 수가 없다. '삼한조공' 즉 '삼한은 예로부터 일본의 속국으로서 조공을 바쳐온 나라'라는 개뼉다구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일본이 분노한 것은 발해에서 '황상(皇上)'이니 '천손(天孫)'이니 하는 호칭들을 자신들의 가독부(국왕)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쓴다는 것이었다. 세상의 지배자는 자신들 하나뿐이라고 믿고 있었을 일본으로서는 발해의 다른 요구는 다 받아들이면서도 이 점 하나만은 틈만 나면 치고 들어왔다.
 
남아있는 기록이 중국측 및 일본측 기록밖에 없으니 일단 인용하기는 한다마는 일본측에서야 '싸가지 없는 국서'라며 내던지고 왔을 국서의 내용을 우리가 직접 못 본 이상 일본이 뭐때문에 발해에게 화가 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강왕 이후로 발해에서 줄곧 무관직을 보내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한편 동해 바다에서 불귀의 객이 되었다는 상모야계익(上毛野公, 카미츠케누노 츠구마츠)은 두 달 뒤인 12월 을해(14일)에 일본 조정으로부터 종6위하를 추증받았다.
 
11월에 발해왕이 아들 대연진(大延眞) 등을 파견하여 와서 방물을 바쳤다.
《책부원귀》
 
고재남과 대연진, 발해에서 온 이들 사신도 신라 사신이 그랬던 것처럼 당조로 사신 갈 때마다 평로치청의 사도왕에게 길을 빌려서 갔다.
 
원화(元和) 7년(812) 정월 계유에 황제가 인덕전에 임어하여 발해의 사신을 면대하고, 연향과 하사를 차등에 따라 하였다.
《책부원귀》
 
영덕 4년. 발해 사신들은 다음날인 갑신일에, 헌종으로부터 관고(官告) 35통, 옷 각 1벌씩을 하사받았다. 이때 인덕전에서 헌종과 만났다는 발해의 사신들은 앞서 영덕 3년(811) 11월에 왔던 발해의 왕자 대연진의 사신들일수도 있지 않을까.
 
[秋九月, 遣級湌崇正使北國.]
가을 9월에 급찬 숭정(崇正)을 북쪽 나라[北國]에 사신으로 보냈다.
《삼국사》 권제10, 신라본기10, 헌덕왕 4년(812)
 
11월에 이사도가 하북 위박절도의 후계문제에 개입했다.
 
[李師道使人謂宣武節度使韓弘曰 "我世與田氏約相保援. 今興非其族. 又首變兩河事, 亦公之所惡也? 我將與成德合軍討之." 弘曰 "我不知利害, 知奉詔行事耳. 若兵北渡河, 我則以兵東取曹州." 師道懼, 不敢動.]
이사도가 사람을 보내어 선무절도사(宣武節度使) 한홍(韓弘)에게 말했다. "나는 대대로 전씨 집안과 서로 보전하며 후원할 것을 약속하였다. 지금 전홍은 그 일족이 아니다. 또한 양하(兩河)의 일마저 틀어지게 되었는데, 공도 이것을 싫어하지 않는가. 나는 장차 성덕절도사의 군과 연합해 전홍을 토벌하겠다." 홍이 말하였다. "나는 이해(利害)를 알지 못하고 조(詔)를 받들어 일을 처리할 뿐이다. 만약 군사가 북쪽으로 강을 건너겠다면 나는 그대로 동쪽으로 병사를 보내 조주(曹州)를 차지할 것이다." 사도는 불안해하며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자치통감》권제235, 당기(唐紀)제55,
헌종소문장무대지지신효황제(憲宗昭文章武大至至神孝皇帝) 중지상(中之上) 원화 7년(812)
 
사도왕이 위박절도의 후계문제에 개입한 것은 조부 정기왕과 전승사 사이에 있었던 약속을 빌미로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가 절도사직을 세습하는 것을 사바사바, 보증해준다는 말이었다. 원래 위박절도사 전계안에게는 전회간이라는 열한 살 된 아들이 있었고 사도왕도 그가 위박절도사의 자리를 잇도록 밀어주려고 했는데, 난데없이 위박절도의 병마사였던 전흥이 전회간을 내쫓고 위박절도를 들어 당에 귀순해버린 것이다. 49년을 이어오던 위박절도의 독립이 종말을 고했다는 것은 처음 여러 절도사들이 당조에 맞서 일어났을 때의 기본 원칙ㅡ그들의 자리를 천자로부터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세습한다는 원칙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이미 당조에 굴복한지 오래인 한홍은 사도왕의 연합제의를 거부했고, 그것은 앞으로 제의 운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조차도 불투명하게 만들었다. 당이라는 거대한 나무를 뿌리뽑고 새로운 중원의 주인이 되느냐, 아니면 그 나무 그늘 아래서 끝내 고사하고 마느냐. 이미 전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영덕 4년. 원유왕은 죽었다. 발해 사람들이 직접 남긴 기록이 없다보니 이 양반이 안에서 뭘 했는지 알수 있는게 아무 것도 없다. 《발해고》 원문에서 '七年'이라고만 달랑 적어놓고는 그 뒤로 글자가 탈락되어있는 바람에.(다만 네권짜리 《발해고》에는 '8년에 왕이 훙하였다[八季王薨]'이라고 적어놨긴 하다) 《자치통감》에도 헌종 원화 8년(813)조에 "발해의 정왕 원유가 졸하여 아우 언의가 나랏일을 권지하니 경오에 언의로 발해왕을 삼았다 [勃海定王元瑜卒, 弟言義權知國務, 庚午, 以言義為勃海王]."라고 적고 있다.
 
언의가 바로 희왕인데 813년 정월 경오라는 것은 언의가 즉위한 해이지 정왕이 죽은 해는 아니다. 정왕의 사망은 언의가 책봉을 받은 813년 정월에서 머지 않은 해, 늦어도 812년 겨울의 일이겠지만, 권지국무(權知國務)라고 표현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권지국무 즉 '나랏일을 대리하는' 것은 정왕의 사망 이후 언의의 즉위까지 조금 오래 걸렸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서다. 정왕이 죽었는데도 언의가 한동안 '즉위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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