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16>후고려기(後高麗記)(29)
2010/05/05 18:46

발해의 역사는 선왕을 기점으로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宣王, 名仁秀, 簡王從父. 高王弟野勃四代孫也.]
선왕(宣王)의 이름은 인수(仁秀), 간왕의 종부(從父)이다. 고왕의 아우 야발(野勃)의 4대 손이다.
《발해고》 군고(君考), 선왕
 
영재서종본 《발해고》에 실린 선왕의 기록. 그가 간왕의 종부(아버지의 형제를 총칭해서 부르는 말)이며 또한 고왕 대조영의 아우의 후손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아울러 대조영에게 '야발'이라는 아우가 있었던 것이 선왕 때에 이르러 처음 확인된다.)
 
사실 고왕의 직계는 간왕을 끝으로 끊어졌다고 봐야 한다. 일본만 해도, 부레츠 덴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게이타이 덴노는 부레츠 덴노의 직계가 아니라 부레츠 덴노의 선대였다는 오진 덴노의 5대 손이지만, 피가 이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이걸 일본에서는 '왕조는 교체되었다'고 한다. 간왕은 계통으로 따지자면 대조영에게는 5대 손이고 직계인데, 형제도 아니고 그것도 다른 계통에서 4대나 내려왔다고 하면 간왕에게 인수왕은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다. '역성혁명'이나 다름없다는 얘기인지는 좀더 두고봐야 되겠지만 아무튼 대조영의 직계는 간왕이 마지막이다. 이후로는 대조영의 직계가 아닌 대야발, 그리고 그의 아버지 걸걸중상에게서 새로운 왕계를 잡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簡王薨, 王權知國務, 開元建興]
간왕이 훙하자 왕은 권지국무(權知國務)로서 원호를 고쳐 건흥(建興)이라 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선왕
 
간왕의 이른 사망과 인수왕의 즉위 사이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밑에서 얘기하겠지만 인수왕은 원화 13년, 그러니까 '건흥 원년(818)'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해 정월 을사에 사신을 보냈다.
 
[元和十三季正月乙巳, 遣使告哀於唐.]
원화 13년(818) 정월 을사에 사신을 보내어 당에 고애(告哀)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선왕
 
사신을 보낸 것이야 의심스러운 것이 없지만, 인수왕이 간왕의 죽음을 고하고도 당조에서는 5월에 가서야 인수왕을 발해왕으로 책봉했다. 무려 넉달 동안이나, '권지국무' 인수왕에게 발해왕의 자리를 인정해주지 않은 것이다. 뭐 지들이 인정해주든 말든 인수왕이 이미 발해 안에서만큼은 '왕'으로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 없겠지만, 넉 달 동안이나 당조에서 인수왕의 계승을 공식승인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조의 혼란스러웠던 사정과도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조는 이 무렵 사도왕을 토벌하기 위한 마지막 숨고르기에 들어간 상태였고, 오원제 토벌 종료 뒤부터 번진들은 하나둘씩 당조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3월, 횡해군절도사 정권이 창주와 경주 2주를 바치며 당조에 항복했다. 사도왕의 동맹이었던 왕승종까지 이에 자극을 받아, 다음달 4월에 덕주와 체주를 당조에 바치고 항복해버리면서 사도왕은 고립된다.
 
[五月, 唐冊王, 銀靑光錄大夫ㆍ檢校秘書監ㆍ忽汗州都督ㆍ渤海國王.]
5월에 당이 왕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ㆍ검교비서감(檢校秘書監)ㆍ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삼고 발해국왕으로 책봉하였다.
《발해고》 군고(君考), 선왕 건흥 원년(818)
 
《구당서》헌종 원화 12년 5월 을축조에는 은청광록대부라는 작호는 빠지고 검교비서감ㆍ홀한주도독ㆍ발해국왕이라는 호칭만 등장한다. 당조가 사도왕의 제를 무너뜨리고자 총공세를 준비하고 그렇게 제가 고립되는 와중에 발해가 제를 '동족'으로서 도왔다면 어땠을까. 같은 고려인이 세운 나라 아닌가.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그런 일은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 제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발해는 철저하게 제의 멸망을 방관할 뿐이었다.
 
발해는 정기왕 때부터 치청번진에 자국의 명마를 거래해온 경력이 있다. 자신들의 VIP 고객이나 다름없는 제가 당조로부터 고립되고 결국 총공세를 당해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발해는 끝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아마도 발해 조정의 '불온한' 내부사정도 한몫했을지 모른다. 희왕이 뜬금없이 죽고, 간왕도 1년만에 살해되고 인수왕이 즉위하는 과정은 정상적인 왕통계승의 과정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과정들이었다.(폐왕 대원의가 죽고 성왕과 강왕이 즉위할 때와 비교하면 어떠한가.)
 
[十三年七月, 滄州節度使鄭權破淄青賊於齊州福城縣, 斬首五百余級. 十月, 徐州節度使李愬ㆍ兵馬使李祐, 於兗州魚臺縣, 破賊三千余人.]
13년(818) 7월에 창주절도사(滄州節度使) 정권(鄭權)이 치청의 적들을 제주(齊州) 복성현(福城縣)에서 깨뜨리고 5백여 급을 참수하였다. 10월에 서주절도사(徐州節度使) 이소(李愬)와 병마사(兵馬使) 이우(李祐)가 연주(兗州)의 어대현(魚臺縣)에서 적 3천여 인을 베었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창주절도사의 공격을 받아 제의 서북쪽에 있던 제주 복성현 방어선은 무너졌다. 여기에 병을 얻은 형을 대신해 무령군절도사가 된 이소ㅡ서주자사의 휘하병마사 이우가 남쪽에서부터 제를 공격해왔다.(서주와 연주의 사이는 서로 100km쯤 된다.) 서주절도사가 제를 치기 한 달 전인 9월경에, 선무절도사 한홍이 제의 서쪽 조주의 최남단 고성을 공격해 빼앗고, 회남절도사 이이간(李夷簡)은 제의 남동쪽 해주를 공격했다. 《신당서》에는 이때 이이간의 휘하였던 초주자사 이청(李聽)이 해주를 공격했다는데, 남쪽에서부터 술양과 구산을 함락시키고 멀지 않은 곳의 해주 치소(중심도시)였던 동해까지 점령하면서, 해주는 완전히 당조의 손에 넘어간다. 제가 신라와의 교역에서 항구로 사용하고 신라 사신들을 맞이하여 창안으로 안내하던 중간거점이 당조에 넘어가면서 제의 대신라무역은 타격을 입게 되었다.
 
[戊寅, 軍前擒到李師道將夏侯澄等四十七人, 詔並釋付魏博及義成軍收管. 要還賊中者, 則量事優給放還.]
무인에 군이 이사도(李師道)의 장수 하후징(夏侯澄) 등 47인을 붙잡았다. 조하여 용서하고 모두 위박(魏博) 및 의성군(義成軍)에 맡겨 부리게 하였다. 적들에게 돌아가기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곧 노자를 주고 풀어주었다.
《구당서》헌종본기 원화 13년(818) 12월
 
12월 무인에 사로잡은 제의 포로들에게 헌종은 '천자의 이름으로' 특전을 내린다. 
 
[初, 東軍諸道行營節度, 擒逆賊將夏侯澄等共四十七人, 詔曰 "附麗兇黨, 拒抗王師, 國有常刑, 悉合誅戮. 朕以久居汙俗, 皆被脅從, 況討伐已來, 時日不幾, 縱懷轉禍之計, 未有效款之由, 情似可矜, 朕不忍殺. 況三軍百姓, 孰非吾人? 詔令頒行, 罪止師道. 方欲拯於塗炭, 是用活其性命. 誠為屈法, 庶使知恩. 並宜特從釋放, 仍令卻遞送至魏博及義成行營, 各委節度收管驅使. 如父母血屬猶在賊中,或羸老疾病情切歸還者,仍量事優當放去,務備相全貸,何所疑留。」及澄等至行營,賊覘知傳告,叛徒皆感朝恩.]
처음에 동군제도행영절도(東軍諸道行營節度)가 역적의 장수 하후징(夏侯澄) 등 47인을 생포했는데, 조를 내려 말하였다. “고려의 흉악한 무리에 붙어 왕사(王師)에 맞섰으니 나라의 상형(常刑)에 따라 모두 주살됨이 옳도다. 짐은 너희가 오래도록 우속(汙俗) 안에 살면서 모두 그 풍속에 물든 데다 모두가 협박 때문에 마지못해 따랐고 토벌을 시작한 이래로 시일이 얼마 안 되어 설령 전화위복의 계책을 품었다 해도 성심을 다할 길이 없었으니 사정이 가련하여 짐은 차마 죽이지 못하겠도다. 하물며 3군(軍)의 백성으로서 내 사람이 아닌 자 누가 있으랴? 조하노니 영이 행해질 때는 그 죄를 사도에게만 묻도록 하라. 방금 도탄에서 구하고 그 목숨까지 부지시켜주었다. 이는 실로 법을 어긴 처사이니 이 은혜를 모두에게 알리도록 하라. 아울러 특별히 석방한 자들은 위박(魏博)과 의성(義成)의 행영(行營)에 보내어 각 절도에게 맡겨 부리도록 하라. 부모와 혈속이 아직 적들 손에 있거나 여위고 늙고 병들어 못 돌아가는 자는 사정을 봐서 돌려보내되 반드시 노자를 주어 보내도록 할 것이니 무엇을 의심하여 남겨두겠는가.” 징(澄) 등이 행영에 이르자 적은 이를 탐지하고 서로 전했는데 반란을 일으켰던 무리들 모두 조은(朝恩)에 감격하였다.
《구당서》권제124, 열전제74, 이정기, 부(附) 이사도
 
헌종의 명으로 제를 토벌하는 군대는 '동군제도행영절도'라고 불렸다. 제가 창안에서 동쪽에 있으니 '동군'이고, '여러 절도사의 군대로 모인 비정규군'이라는 뜻으로 '제도행영절도'라고 한 것으로 당조의 중앙군이 아닌 지방번진의 연합부대로 제를 토벌하는 것을 보여준다.
 
헌종은 조서에서 '여흉당(麗兇黨)'이라는 단어를 써서 사도왕과 제를 지칭하고 있다. 흔히 '고려'의 뒷글자만 떼서 고려를 가리키는데 썼으니 '여흉당'이라는 건 곧 '고려의 흉악한 무리'라는 의미가 된다. 당조에게 제와 사도왕 일문, 그리고 그 땅의 백성은 '고려인'으로 불리고 있었던 타지인이었다. 고려 멸망과 발해 건국 이후 무려 2백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건만, 당조는 끝내 고려인들을 포섭하지 못했고 고려인들도 끝까지 당조에 흡수당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당조에게 그들은 '흉악한 무리'였고 그들의 문화는 '나쁜 풍속'에 불과했다.
 
잡혀온 제의 군사들에게 헌종은 철저히 유화책으로 들어갔다. 죄는 제왕 이사도, 그 한 사람에게만 묻고 나머지에게는 모두 죄를 묻지 않겠다ㅡ라는 파격적인 제안은 철저하게 '천자'의 이름으로 공표되고 '천자'의 뜻으로 포장되어 반포되었다.
 
사실 헌종으로서도 이들을 철저하게 처벌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보다도 훨씬 세력이 약하던 오원제를 토벌하는 데에만 2년을 들였던 당조다. 자칫 잘못해서 제의 모든 백성들이 당조에 맞서 끝까지 싸우겠다고 반발할 수도 있다. 흔히 조선놈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고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무력으로 억누르고 총칼로 짓밟으면 밟을 수록 용수철처럼 더 강하게 맞서는 일이 허다했다. 당장 일제시대만 해도 '무단통치' 시대보다 '문화통치' 시대에 더 많은 친일파들이 나왔고 독립운동을 지도했던 1세대들 가운데 변절하는 사람도 늘어났지 않은가. 가만 생각하니 사로잡힌 포로들에게 노자를 주고 돌려보내는 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일찌기 당 태종이 고려를 칠 때 개모성과 요동성의 포로들에게 썼던 방법이다.
 
[是歲, 回紇ㆍ南詔蠻ㆍ渤海ㆍ高麗ㆍ吐蕃ㆍ奚ㆍ契丹ㆍ訶陵國, 並朝貢.]
이 해에 위구르[回紇], 남조만(南詔蠻), 발해, 고려, 티벳[吐蕃], 해, 거란, 가능국(訶陵國)이 모두 조공하였다.
《구당서》헌종본기 원화 13년(818)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삼국사》 고구려본기에 "원화 13년(818)에 이르러 사신을 당에 보내 악공(樂工)을 바쳤다[至元和十三年, 遣使入唐獻樂工]."라는 기록이 나온다. 보장왕 무진(668)에 멸망했다는 고려가 말이다. 물론 정확한 시기는 적혀있지 않아 알 수 없다. 하지만 '고려의 후신'인 발해 말고도 또 고려를 지칭하는 세력이 남아있었다는 것은
실로 충격적인 일. 북한에서도 껄끄러웠는지 이 기록은 고려가 아닌 발해가 사신을 보낸 것인데 발해를 인정하기 싫었던 당조에서 일부러 '고려'라고 적어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만, 《삼국사》에서는 원화 13년에 창안에 나타났던 이 고려 사신들의 '고려'는 보장왕의 아들로서 성력 2년(699)에 안동도독이 된 고덕무의 안동도독부를 말한다고 적고 있다. "나중에 점점 나라를 이루었다[後稍自國]"는 것이다. (지금 요양 고씨 일족은 이때 안동도독부에 봉해진 고덕무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원래 고려 땅을 통치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이 안동도호부였지만 이것도 신라의 지원을 받던 고려 부흥군에 밀려 본거지 평양에서 지금의 압록강 너머 요동으로, 거기서 다시 또 신성으로 옮겨갔고, 도호부에서 도독부로 깎이더니 발해가 세워진 뒤에는 거의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고 말아 거의 '폐지'되다시피 한 군이나 다름없었다. 보장왕 사후에는 하남(河南)·농우(隴右)의 여러 주로 흩어놓고 가난한 사람들만 안동성(安東城, 옛 고려령 신성) 옆의 옛 성에 남겨 두었는데 이들마저 신라로, 말갈로 혹은 돌궐로 들어가면서 '고씨 군장은 마침내 끊어졌다'고 했다. 신성은 옛 고려 땅에서도 돌궐과 인접한 북단의 땅인데다(양원왕 때 신성에서 돌궐과 싸웠음) 고려의 본거지였던 요양이나 집안, 평양과도 한참 거리가 있는 땅이니 잘 알려지지 못하고 잊혀져버렸던 것이다.
 
"고씨 군장은 마침내 끊어졌다[高氏君長遂絶]"는 구절이 꼭 고씨가 전부 사라졌다는 얘기는 아니라고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고 있다. 이 구절이 고려 유민들의 망명기사 뒤에 실려있는 걸로 봐서는. 왕은 한 사람이지만 신하는 여러 명, 백성은 그보다 훨씬 많다. 하지만 왕이니 신하니 백성이니 하는 것도 자기가 갖고 있는 왕으로서 신하로서 백성으로서의 자의식만큼이나 그들을 그렇게 대접하고 인정하며 권한을 부여하는 누군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왕은 신하를 거느리고 신하로부터 왕 소리를 들으면서 왕으로 거듭나고, 백성으로부터 왕의 소리를 들으면서 왕으로 거듭난다. 하지만 자신을 왕이라 불러줄 신하가 없다면, 자신에게 세금을 바칠 백성도 노동력을 빌려줄 백성도 없다면 그런 왕을 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왕이라고 으스대면서도 자기가 다스리는 신하는커녕 백성 한 명도 없는데 그런 자를 왕이라 부를 수 있다면 세상에 왕 아닌 자 없을 것이다. 왕은 자신을 믿고 인정해주며 권위를 빌려주는 '신하'와 '백성'이 있기에 왕으로서 존재할수 있다.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신하를 싸그리 때려잡고 백성을 못살게 굴면, 그렇게 해서 신하들이 '나 더러워서 여기 안 산다'하면서 하나둘씩 관직을 내버리고 도망가버리면, 백성들까지 똑같이 그렇게 하면 왕의 옆에는 과연 누가 남게 될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왕의 권위는 백성이 내는 세금과 그들의 노동력으로 조직한 군대에서 비롯되는데, 그리고 그들을 관리하고 지휘할 신하들로부터 비롯되는데 그들이 하나도 남김없이 떠나버리면 왕에게 남는 것은 뭐가 있지? 철부지 어린애처럼 이거해줘, 저거가져와, 나 죽는꼴 볼래, 팅팅거리면서 다른 사람 피곤하게 해서 결국 자기 주변에 아무도 안 남게 되었을 때에야 그들은 깨닫는다. 권위를 몰아주는 것도 띄워주고 추켜세워주는 것도, 결국 자기 바깥의 사람들이라는 것. 혼자서 왕인척 명령하고 떵떵 큰소리치고 그래봐야 들어주는 사람도 없는데 자기 힘만 낭비지.
 
고려가 멸망한 뒤 고씨 군장들에게는 그들이 다스릴 백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보장왕은 부흥운동을 도모하다 공주로 유배되어 죽고, 남은 백성들은 이리 옮겨지고 저리 옮겨지고 하다가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보장왕의 아들이 귀하디 귀하신 왕족임을 알아볼수 있는 옛 신하나 백성들이 없는 타지에서 '나 이런 사람인데'하면서 군장노릇 하려고 한들 그 지방 사람들에게는 '니가 뭔데?', '그래서 어쩌라고?'하고 무시당하고 미친놈 취급이나 받기 일쑤다. 왕노릇을 하려고 해도 뭐 자기를 띄워주는 사람이 있어야 할 맛이 나는데 이건 뭐, 생판 자기가 왕인지 왕족인지 말해줘도 모르는데 그런 사람들만 사는 땅에서 무슨 군장 노릇을 하겠어. 그들을 왕으로 추켜세워주고 왕인줄 알아봐주던 사람들이 없는 땅에서 '군장'이자 한 나라의 군주로서의 '고씨'의 이미지는 점차 사라지고 결국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이 옛날 군장이었던가 하는 사실도 잊어버리게 된다. '고씨군장은 결국 끊어졌다'고 한 말은 고씨 성 가진 군장 가문 하나가 망했다는 것이 아니라 고씨 성 가진 사람을 군장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는 의미인 셈이다. 심지어 고씨 성을 가진 본인들조차도. 그래도 '나중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고 했으니 몰락한 왕족이나마 받들어 모시겠다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던 듯 하다. 발해나 신라처럼 독립된 영토와 국민을 가진 어엿한 '주권국가'로서의 나라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치만 고씨들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고씨들이 다스렸던 백성, 옛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까지 모두 사라진다는 의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기에 고씨 고려의 몰락이 '고려'라는 나라 자체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게 된다. 지금 전주 이씨를 왕으로 보는 사람은 없지만(실제로 그랬다간 미친놈 아니겠나) 전주 이씨, 옛 조선 왕가가 다스렸던 국민들의 후손은 아직도 그대로 건재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고구려ㆍ백제ㆍ신라의 삼국 시대는 한국사'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다. (조선족을 제외하고는 중국인들에게 이런 것은 없다.) 그 점은 발해도 마찬가지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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