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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언어계통
2004년 10월 4일 

현재 '정사(正史)'로 인정받고 있는 역사서들 속에서는, 고구려어에 대해 명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고, 무엇보다 그것을 그 동시대의 한국인이 기록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아, 결국 추론할 수밖에 없다.
  
우선 중국측의 정사들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東夷相傳以爲夫餘別種, 故言語法則多同. <후한서85-고구려>
- 동이족들이 서로 전하기를 부여의 별종인 까닭에 언어와 법제가 많이 같다고 한다.
  
東夷舊語以爲夫餘別種,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삼국지30-고구려>
- 동이의 옛말에 부여의 별종이라 해서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더불어 많이 같다.
  
言語諸事, 多與夫餘同, 其性氣衣服有異. <양서54-고구려> (「남사」에도 같은 내용)
- 언어와 여러 일들이 부여와 많이 같은데, 그 성질과 의복은 다른 데가 있다.
    
言語食飮居處衣服有似句驪. <후한서85-동옥저>
- 언어, 음식, 거처, 의복이 고구려와 비슷하다.
  
其言語與句麗大同, 時時小異. <삼국지30-옥저>
- 그 언어는 고구려와 더불어 대부분 같고 때때로 약간 다르다.
  
耆舊自謂與句驪同種, 言語法俗大抵相類. <후한서85-예>
- 늙은이들이 스스로 이르기를 고구려와 같은 종족이라 한다. 언어와 법속이 대개 서로 유사하다.
  
言語法俗大抵與句麗同. <삼국지30-예>
- 언어와 법속이 대개 고구려와 같다.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 言語風俗有異. <후한서85-한>
-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산다. 성곽과 의복은 다 같은데 언어와 풍속은 다른 점이 있다.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삼국지30-한>
- 변진과 진한은 섞여 사는데. 또한 성곽이 있다.
-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더불어 같고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하다.
  
語言待百濟而後通焉. <양서54-신라>(「남사」에도 같은 내용)
-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뒤에야 (중국과) 통한다.
  (이 부분을 곡해해서 신라와 고구려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잘못된 견해도 있다.)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양서54-백제>
- 지금에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言語服章略與高麗同. <남사79-백제>
-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다.
  
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삼국지30-읍루>
- 그 사람 생김새는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부여, 고구려와 더불어 같지 않다.
  
?婁, 古肅愼之國也. 在夫餘東北千餘里, 東濱大海, 南與北沃沮接, 不知其北所極. 土地多山險.人形似夫餘, 而言語各異. <후한서85-읍루>
- 읍루는 옛 숙신의 나라이다. 부여의 동북 천여 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이르고 남으로 옥저와 인접해 있는데 그 북쪽 끝은 알 수 없다. 토지는 험준한 산이 많고 사람 생김새는 부여와 비슷한데, 언어는 각각 다르다.
  
勿吉國在高句麗北, 舊肅愼國也. … 言語獨異. <위서100-물길국>
-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옛날 숙신국이다. … 언어는 유독 (고구려와) 다르다.
  
勿吉國在高句麗北, 一曰靺鞨. … 言語獨異.<북사94-물길국>
- 물길국은 고구려의 북쪽에 있는데 ‘말갈’이라고도 한다. … 언어가 유독 (고구려와) 다르다.  
  
이상이 중국 측의 기록들이다.
  
참고로 6세기경 중국 남조 양에 입조한 사신들 중 백제와 왜(倭)의 사신들에 대한 그림을 보면 다음과 같다. '양직공도(梁職貢圖)'는 각국에서 온 사신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 백제인 : "마한에서 시작하여 고구려와 언어 및 풍습이 비슷하고, 중국의 요서를 차지했다."는 설명이 있다. 이외에 양서에는 백제인은 키가 크고 의복이 깨끗하다는 기록이 있다.
 

- 왜인(倭人) : 위의 백제인을 그린 그림은 당당하고 귀족적인 데 반해, 왜인은 옷도 제대로 걸치지 못한 초라하고 왜소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어떤 언어를 사용했고, 어떤 종족에 속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미리 말한다면, 그들은 우리와 같은 한겨레이며, 한국어와 같은 계통의 말을 썼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우선, 읍루, 숙신, 물길, 말갈이라고 불리는 종족이 어떤 종족일까를 생각해 보자. 중국 측 사서에서, 유일하게 언어가 다르다고 명시되어 있는 동이족이 그들이다. 논란이 있지만, 역사상으로 볼 때 가장 그 표현에 들어맞는 민족은 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이고, 즉 만주족, 퉁구스족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한국어와 일본어가 알타이어족에 속한다고 한다. 특히, 한국어는 퉁구스어(만주어가 이에 포함된다)와 같은 계통이라는 것으로. 그러나 실제로 퉁구스어를 조사해 보면, 퉁구스어는 전혀 한국어와 다르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먼저, 퉁구스어에는 주격조사가 없다. 1인칭 대명사부터 시작해서, 도저히 기초어휘상 공통성을 찾기 힘들고 문법적으로도 같은 언어계통으로 보기는 힘들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인다. 오히려 퉁구스어는 퉁구스어, 투르크어와 함께 알타이어계의 대표적 언어인 몽고어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다만, 퉁구스어로도 소유격이 '이'라는 것은 한국어와 비슷한 점이다.
  
한국어와 일본어는(한국어와 일본어는 같은 계통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로 문법적으로나 기초 어휘적으로 공통점이 많다. 다만, 현대 일본어는 이주민들이 일본의 원주민인 남방계 아시아인들과 문화적으로나 인종적으로나 혼혈이 된 결과인지, 모음이 단순해 '어' 발음조차 없고, 받침의 발달이 미약해져 있다는 것이 크게 다르다), 퉁구스어, 몽고어, 투르크어 등의 알타이 제어와 놀라울 정도로 다른 것이다.
  
물론, 그래도 고구려어를 알타이어로 보든 한국어로 보든, 일단 중국어와는 어순 등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고구려어를 중국어와 같은 계통으로는 도저히 볼 수 없다.
  
말갈족(만주족, 퉁구스족)의 언어와 고구려어가 그토록 다르다는 점이 중국인들이 볼 때에도 인상적이었기 때문에(동이족들한테 전문해서 들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말갈족만이 언어에 있어 별종이라는 식으로 기록해 두었을 것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면, 제일 첫머리의 <신라본기>에서 신라를 세우게 되는 6촌의 구성원들이 조선의 유민(遺民)들이라고 했다. 流民이 아니다. 즉, 흘러들어온 것이 아니라, 본래 조선의 강역이었다는 것을 전제한다고 생각된다.
  
김부식이 굳이 조선의 유민임을 기록한 저의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주지하듯이, 김부식은 신라 경순왕의 직계후예로서, 철저히 신라계승의식 하에 [삼국사기]를 집필한 듯하다.
  
[삼국사기]의 첫머리에서, 민족사의 전사(前史)로서, '조선'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기록이 졸렬하다면서 굳이 역사의 기록을 삼국시대부터 한다. 중화의 맥이 섞인 자들만이 살아남는다는 철저한 당대적 사대주의자였던 김부식이 볼 때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 역사라 한다면, 그것은 중화와 전혀 다른, 독자적인 역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부식은 굳이 신라에 대해서만 조선의 유민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정통성이 조선에서 신라로 왔고, 신라가 별종이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리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민족사학자들은 민족사의 정통성이, 고조선에서, 부여로, 부여에서 고구려와 백제에로, 그 다음에는 남북국시대로, 그 다음에는 고려로, 그 다음에는 조선으로...하는 식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만.
  
또한, 김춘추와 연개소문이 만났을 때 통역을 썼다는 식의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떤 역사책에도 그런 기록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오히려 김춘추가 고구려인과 자연스럽게 대화해서 탈출하는 장면의 기록은 있다.
  
어원학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조예가 깊지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는 김부식은 이두식 표기법을 전혀 이해 못했다고 평가되고 있기도 하지만, <고구려본기 동명성왕조>에서 '다물'이란 고구려말로 '잃어버린 옛 땅을 되찾는다.'는 뜻이라며 주몽이 최초로 통합한 땅을 다물도(多勿都)라고 했다고 기록해 두었다.
  
즉, 고구려는 그 시초부터, '잃어버린 고토를 되찾는다.'는 정신을 갖고 있었음이 암시되고 있다. '되물린다'는 말에서, 어간인 '되물'을 소리 나는 대로 쓴 게 '다물'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문헌상, 지명 등을 통해 추정되는 고구려단어는 70개 정도가 조금 넘는다. 그 중에 수사(數辭)가 현대 일본어와 비슷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동시에 백제어로도 비슷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가령 '3'을 '미'라고 하는 것 같은 것. 그래서 어떤 미국학자는 일본어가 고구려어에서 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시 그 또한 추정일 뿐이다. 오히려, 백제의 건국자인 온조가 실은 한자로 百濟로 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즉, '백(百)'의 순우리말인 '온' 또한 '크다'는 뜻으로, 고구려에서는 '아리' 또는 '오리'나 '으리', '어리' (즉, '아래 아 + 리' 정도의 소리)를 썼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리수'란 '한강'(큰 강)을 뜻하고 그것은 압록수를 말한다고 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리'가 '크다'는 뜻이라면, 그것도 고구려어가 韓語와 다르다는 증거가 아니냐고 보기도 하는데(아마 고구려를 한민족집단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다), 현대 한국어에서도 '으리으리하다'라는 말로 그 소리와 뜻이 남아있음을 볼 때, 그러한 것 역시 보기 나름일 것이며 어떤 의도 하에서 보는가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통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수사(數辭)에 있어서는 지역 간 차이가 컸던 것 같고, 결국 삼국을 통일하게 된 신라가 지배층이 되었기 때문에, 현대 한국어의 수사는 신라계통의 수사가 남게 된 것 같은데, 일본의 수사가 백제계통의 수사를 쓰고 있는 것이라면, 일본을 지배하게 된 종족이 백제계통일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그것 또한 꼭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 '둘'에 해당하는 말은 일본어와 현대 한국어가 같은 계통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여인과 백제인을 중국 측에서 기록한 것 중에 체격이 크다든가 키가 크다든가 하는 것이 있다. 현대를 제외하고는(20세기 들어서 일본인들은 급격히 키가 커지고 두상에 있어서도 단두화경향이 일어나, 한국인과 큰 차이가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이 좀 더 크다고 한다) 대대로 체격이 작고, 키가 작았던 일본인을 종족적으로 부여에서 갈라져 나갔다는 고구려와 백제에 연결 지음은 상당히 무리가 있을 것이기에, 일본의 피지배층은 倭人이고(키가 작고 왜소한 특징을 본래 갖고 있었다고 한다.; 위의 양직공도의 그림 참조) 그 지배층이 백제계였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19세기에 조선에 왔던 서양인들의 기록을 봐도,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키가 훨씬 크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지금도 한국인은 동양에서 가장 평균 신장이 크다. 북한은 오랜 경제적 빈곤으로 주민들 전반이 왜소해지고, 청소년들의 경우 남한 청소년들에 비해 평균 10cm 이상 작다고 보기도 한다. 같은 민족이라도 어떤 사회체제와 지도자를 맞느냐에 따라, 이토록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인데,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원래는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보다 더 키가 컸고,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북한이 경제적으로 남한을 앞섰다고 한다.
  
일본의 지배층들은 한민족 계통임을 암시하는 여러 기록들과 증거들은 너무나 많지만, 여기서 관련되는 몇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가령, 치마저고리를 입는 민족은 한민족밖에 없다고 하는데(아래의 고구려의 벽화를 통해, 고구려에도 치마저고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의 스이코 천황(최초의 여왕)이 입었다는 옷도 한복이었다.
   

-평안남도 강서군의 수산리 고분벽화 
  
일본의 축제를 '마쯔리'라 하고, 쿄토(京都)의 기원제(祇園祭:기온마쯔리)에서 가마를 타고 오는 사람들은 '왔소이'라고 말한다는 것도, 한국어라고 생각해 보면, 쉽게 그 뜻을 알 수 있는데, 천황가의 제사에서 쓰는 축문이라든가 일본의 고대 가요집인 만엽집의 언어를 한국어라고 생각해 보면, 그 의미가 쉽게 풀린다는 것 같은 것도, 일본의 지배층이 어디에서 왔고, 그 지배층의 언어는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만일, 고구려의 유민들이 현재까지 고립되어 살고 있다면, 그들의 언어를 통해 그들이 속한 계통을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일단 우리는 중국 남서부 윈난성과 동남아시아에 걸쳐 살고 있는 라후(Lahu)족을 잠시 생각해 보자.
  
김부식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조>에서 보면, 고구려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 중 일부가 중국의 오지, 농우(현재의 靑海省 右)라는 곳에 강제이주 되었다 기록되어 있는데, 그곳이 라후족(拉祜族)이 말하는 그들의 고향이라고 한다.
  
우리민족 고유의 풍습과 유사한 것이 많이 발견되어(우리 식 김치와 비슷한 와찌라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부터, 명절이면 무지개 같은 색동옷을 입는 것이라든가, 아기가 태어나면 새끼줄로 인줄을 친다든가, 된장이 있다든가, 조상숭배의식이 강하다든가, 고구려의 벽화에 나오는 것과 같은 씨름을 한다든가, 매년마다 활쏘기 대회를 연다든가, 지게가 있다든가 하는 것들) 놀라움을 안겨 주기도 했다는데, 우리는 일단 그들의 언어에 주목해 보게 된다.
  
중국에서는 라후족의 언어가 중국어와 같은 계통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라후어는 고립어인 중국어와 전혀 다른 교착어라고 한다. 어순 등의 문법이 중국어와는 전혀 다르고, 한국어와는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라후어로 1인칭 대명사는 '냐' 또는 '나', 2인칭 대명사는 '너'라고 하며, 그 복수형은 '나흐', '너흐'라고 한다고 한다.
  
주격조사가 있고(세계적으로 주격조사가 있는 언어는 대단히 희소하다. 한국어, 일본어, 수메르어, 인더스문명을 세운 드라비다족의 언어 등을 제외하고는), 그 주격조사는 '래'라고 한다.
  
소유격조사는 '베' 또는 '웨', 향진격 조사는 '로'. '나도 너도'라고 할 때는, '나터 너터'라고 하고, '내게'라고 할 때는 '나게'라고.
  
그러나 그 이외의 어휘는 대체로는 중국어의 영향을 많이 받아, 중국어가 많이 차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 같고, 성조가 있으며 한 음절이 하나의 단어를 이룬다는 점에서(이 점에서 중국어 계통의 고립어와 유사한 면이 있다) 한국어보다는 미얀마어와 같은 계통이라고 보기도 한다.
  
라후족은 고구려의 후예라는 주장을 먼저 한 것은 라후족 출신의 역사가인 호례극이었다고 한다.
  
그 밖에 한국어와 아주 비슷하다고 알려진 언어(아주 비슷하다고 해도, 서로 통역 없이 통할 정도인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문법적으로나 기초어휘적으로 비슷한 면이 특히 많다는 것뿐이다)로는 길리약어가 있다.
  
아무르강에서 사할린에 걸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인 길리약족은, 그래서 옥저의 후예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다만, 길리약족은 고아시아족으로 분류되기도 하는바, 그 외형상 한민족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라후족 역시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중국 남서부와 동남아시아에 걸쳐 살다 보니 혼혈이 많이 되어 그럴지는 모르지만 길리약족과는 반대의 방향에서 한민족과 외형상 차이가 어느 정도 있는 것 같다.
  
언어의 사용자와 인종적 특성이 일치하지 않는 대표적인 예가 유태인들인데 (백인부터 시작해서, 동양인, 흑인 등으로 다양하다. 주류는 백인종적인 유태인들이라고 하지만), 어쩌면 한민족에게도 비슷한 일이 어느 정도는 일어났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측의 기록들을 보면, 백제 무왕(서동)과 신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라든가, 고구려 안장왕과 백제여인 한씨녀의 사랑 이야기 등을 통해 볼 때, 국경을 넘어선 사랑이 자연스럽고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에서, 삼국간 언어가 큰 장벽이 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동족 또는 동포란, 같은 풍습을 가지고 있고, 같은 언어를 쓰며, 같은 생김새를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고, 오랜 세월 인류는 그렇게 동족관념을 가져 왔을 것이다.
  
민족국가의 형성이 늦었던 서양과 달리(서양의 경우에는 종교가 종족을 넘어서 지배하는 기간이 대단히 길었다), 동양에서는 종족별로 뭉쳐 살며, 역사의 주체가 되었던 것으로 보이고, 그러한 속에서, 김부식 등의 고려시대 역사가들도(전해지지 않으나, 그 이전에 존재했다는 역사서들도 마찬가지다) 고려사의 전사(前史)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드는 것으로 볼 때, 한민족은 그들을 모두 당연히 동족집단으로 파악했던 듯하다.
  
몽고족이나 만주족은 변발을 하지만, 한민족 집단은 독특한 상투를 해 왔다. (이병도 박사는 한민족과 같은 유형의 상투를 하고 있는 종족은 한민족 이외에는 중국의 묘족 밖에 없다고 한 바 있다).
  
위만이 조선으로 넘어올 때도 조선인처럼 상투를 하고 왔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아래의 고구려 벽화에서 보듯, 고구려인들도 상투를 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중국 길림성 집안현 각저총 벽화 
  
상투나 치마저고리 같은 한복 이외에도 모자에 새의 깃털을 꽂는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 공통한 풍습이었다. 세계적으로 새의 깃털을 머리나 모자에 꽂는 풍습은 아메리카 인디언과 한민족 외에는 유례를 찾기 힘들 것 같다.
  
더 근본적으로는, 고인돌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곳은 한반도 북부를 중심으로 해서 한반도 전역과 만주, 그리고 요동이라는 것, 그리고 그곳의 청동기문화가 공통적인 것이면서 다른 문화권과는 뚜렷이 대비된다는 것에서, 그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이 최소한 같은 문화권이었고, 그것은 독자적인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는 한민족과 같은 계통의 종족이 중심이 된 나라였고(그 유민들 중 상당수는 신라와 고려 등으로 흡수된다) 적어도 고구려어는 한국어와 같은 계통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퉁구스어(만주어가 이에 포함됨)와는 고구려어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 중국의 정사들에 나와 있고, 백제와 신라와 간접적으로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으며 현대 한국어도 퉁구스어와는 크게 다른 것으로 볼 때, 고구려어가 중국어계라거나 퉁구스어계라는 주장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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