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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35>제19대 광개토태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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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惟昔, 始祖鄒牟王之創基也. 出自北夫餘, 天帝之子, 母河伯女郎. 剖卵降世生, 而有聖▨▨▨▨▨▨命駕. 巡幸南下路, 由夫餘奄利大水, 王臨津言曰,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 鄒牟王. 爲我連葭, 浮龜." 應聲卽, 爲連葭浮龜, 然後造渡,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 而建都焉. 不樂世位, 因遣黃龍來下, 迎王. 王於忽本東履, 龍頁昇天.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 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옛적 시조(始祖) 추모왕(鄒牟王)께서 나라를 세우셨다. 북부여(北夫餘)에서 나셨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셨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셨노라.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오시니,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으셨더니라. 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시다 부여의 엄리대수(奄利大水)를 거쳐가게 되매, 왕께서 나룻가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황천(皇天)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라.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짓게 하라.”

하시니, 말씀 끝나자마자 곧 갈대가 연결되고 거북떼가 물위로 떠올라, 그리하여 강물을 건너가시사 비류곡(沸流谷) 홀본(忽本) 서쪽, 산 위에 성을 쌓고 도읍을 세우셨노라. 세상의 왕위를 즐기지 아니하시므로 황룡을 보내어 내려와서 왕을 맞이하셨고, 왕께서는 홀본 동쪽 언덕에서 용의 머리를 디디고 서서 하늘로 올라가셨느니라. 유명(遺命)을 이어받은 세자 유류왕(儒留王)께서는 도(道)로서 나라를 잘 다스리셨고, 대주류왕(大朱留王)께서는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켜 17세 손(孫)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에 이르렀다.

『광개토태왕릉비』 서(序)

 

민족주의 사학의 거두 단재 선생이 손바닥으로 한뼘 한뼘 재가며 읽고, "삼국사기 백번 읽는 것보다 광개토태왕릉비 한 번 보는 게 더 유익하다"고까지 하실 정도로 동양 3국 고대사 연구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자리를 잡은 고구려 금석문의 '대명사' 『광개토태왕릉비』(이하 『능비』)가 전하는 고구려의 초기역사에 대한 간략한 내용이다.

 

'고구려'라는 이름을 우리 모두의 마음과 머리 속에 깊이 남긴 그 사람. 《삼국사》에는 그저 달랑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 기록되어 있을 뿐이나, 그의 업적을 전하는 『능비』엔 그를 가리켜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넓은 땅을 개척하여 평안히 하시고 국강상에 잠드신 태왕(太王)"이라 불렀다. 신라의 호우총에서 발견된 호우명그릇에도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 했고, 그의 조정에서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라는 벼슬을 지냈던 모두루의 묘지명에는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罡上大開土地好太聖王)'이라 했다. 태왕에게는 언제나 '영토를 넓게 개척한' 정복군주의 이름이 항상 붙어서 따라다니고 있다.

 

[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儻之志. 故國壤王三年, 立爲太子, 九年, 王薨, 太子卽位.]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은 담덕(談德)이고 고국양왕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기개가 웅대하고 활달한 뜻이 있었다. 고국양왕 3년에 태자로 삼았고, 9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능비』에 기록된 태왕의 사망 당시 나이를 가지고 추정한 태왕의 탄생년도는 373년.

소수림왕 즉위 3년으로 간지로는 태세 계유에 해당한다. 단재 선생은 『능비』에

태왕이 추모왕의 17세 손이라 기록된 점을 지적하며, 《삼국사》가 고의로 고구려 초기 연대를

2백년 깎아먹었다고 비판하셨지만 왕대로서의 세수(世數)와 혈통상의 세수는 충분히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지위상 추모왕으로부터 12대지만 혈통상으로 따져서는 추모왕의 17세 손이라는 의미로

『능비』에 적어놓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성씨를 쓰기 시작한 때부터 고구려인들도

자국 왕실과 귀척들의 특권을 명문화한 '족보'를 만들어서 쓰기 시작했을 게 틀림없는데,

일본의 《신찬성씨록》에 나오는 한반도계 도래씨족 가문 가운데 하나인

나니와노무라치(難波連)가 그 선조를 호태왕(好太王)이라고 칭하고 있지만 이 호태왕이 정말

담덕왕을 가리키는 것인가는 재고 여지가 있다. 담덕왕 말고도 호태왕이라는 건 다른 왕들에게도

시호로 주어진 보통명사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는 얘기다.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

가을 7월에 남쪽으로 백제를 정벌해 10성을 함락시켰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원년(391)

 

『능비』에는 태왕에 대해 "18세에 왕위에 오르시어 칭호를 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 하셨노라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라고 했다. 한창 피끓는 청소년이었다 그는.

《삼국사》나 《삼국유사》 왕력편에 기록된 태왕의 즉위년은 태세 임진으로 서기 391년,

영락 5년이 을미라고 한다면 임진-계사-갑오-을미로 해서 담덕왕 즉위 4년의 일인데 

능비』와는 1년의 차이가 있다. 고국양왕의 사망연대를 담덕왕의 즉위년인 391년으로 해서

것이 태왕의 즉위년이라고 한다면 여기, 아래에 적은 백제본기의 관련기사 역시

왕 즉위년인 391년의 일이 되어야 한다.

 

[秋七月, 高句麗王談德, 帥兵四萬, 來攻北鄙, 陷石峴等十餘城.]

가을 7월에 고구려왕 담덕(談德)이 4만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변경을 침공해 와서, 석현성(石峴城) 등 10여 성을 함락시켰다.

《삼국사》 권제25, 백제본기3, 진사왕 8년(392)

 

이 두 개의 기록이 서로 '월수'까지 합치한다. 그러고보면 담덕왕 원년과 진사왕 8년은 서로 같은 시간대이고, 『능비』의 연대 표기대로 비교해 둘다 서기로 392년이 아닌 391년이 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삼국사》에서 묘사한 '광개토왕 원년 가을 7월'의 백제 10여 성 함락 기사와 진사왕 8년의 '고구려의 북쪽 변경 침공 기사',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벌어졌던 두 전쟁 기록이 합치한다.담덕왕이 진출했다는 한수 이북 지역ㅡ 한수는 『능비』에서 말하는 아리수, 지금의 한강이다.(대학 시험 보러 가면서 나도 이 강 건너 서울로 갔었지) 왕이 즉위하자마자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정벌한 것을 권근은 《삼국사절요》에서 이렇게 비판한다.

 

옛날 진(晉) 양공(襄公)이 검은 상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 진(秦) 군사를 패퇴시켰는데,《춘추(春秋)》에서 이를 비난하였다. 고구려왕이 죽은지 아직 석 달도 안 되었는데 그의 아들 담덕이 친히 백제를 쳤으니, 이는 애통함을 잊고 거리낌없음이 너무 심했다. 문전에 적이 와 있어 국가의 존망이 달렸다면 부득이 군사에 의지할 수 있으나, 이제 백제의 군대가 아직 고구려 국경에 오지도 않았고, 또 담덕은 그때 상중에 있었는데, 함부로 자기의 복상(服喪)을 버리고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남의 나라를 쳤으니, 사람의 자식으로서 애통해하는 마음이 있는 자인가. 혹자는

"고구려와 백제는 대대로 원수다. 진사와 이련 사이에는 신라 내물왕 33년(388)에 진사가 고구려 남쪽 변방을 침입하고 다음해에는 또 도곤성(都坤城)을 쳐서 차지하였다. 이련 또한 3년 동안 보복하다가 훙하고, 담덕이 왕위에 올랐는데 몇 달이 되지도 않은 사이에 군사를 일으켜 정벌을 감행하여 그 치욕을 씻었으니, 이는 아버지를 현양(顯揚)하게 한 것이고 꺼려해야 할 일은 아니다."

라 하지만, 내 생각에 적과 은혜로 지내고 원수로 지내고 하는 것은 후사(後嗣)와는 관계가 없다. 구부(丘夫)가 근초고왕에게 복수하지 않은 것은 분명히 죄가 된다. 그러나 담덕과 진사는 두 대 뒤이니 어찌 보복해야 하겠는가. 침류왕이 훙하고 진사왕이 즉위하였을 때 이련이 돌보지 않고 갑자기 상중에 정벌하였으니 나쁜 일이다. 그러나 진사는 참고 즉시 보복하지 않고 3년을 기다려 복상이 끝난 후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정벌하였으니 이는 백제가 옳고 고구려가 잘못이다. 그러므로 진사가 두 번이나 이겨도 이련은 보복을 못하였으니 이 역시 죄의 업보인 것이다. 담덕이 여기서 분을 참고 욕심을 막아서 원수를 풀고 화친을 맺으면 어버이를 빛내는 것이 더 큰 것인데, 의리를 돌보지 않고 오직 보복으로만 일삼는다면 전란(戰亂)이 어느 때에 끝나겠는가?

 

간추리자면 아무리 원수라도 예의라는 게 있는데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 장례도 다 치르지 않고 원수를 치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아버지 세대가 원수로 지냈다고 해서 자신이나 그 이후 세대까지 원수로 지낼 필요 없으니 그냥 참고 옛날의 일을 다 잊으면 그것이 더 아버지를 빛나게 하는 일이라고. 그런 식으로 보복만 하다보면 전쟁은 끊임없이 되풀이될 뿐이라는 것이 권근의 생각이었다.(복수의 악순환을 생각할때 어찌 보면 권근의 주장은 그 점에서 일리가 있다만 이 양반은 예전에 소수림왕이 수곡성 친 것을 갖고 거기서 왜 더 나아가지 않고 그만뒀느냐고 투덜대던 양반인지라)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권근과는 전혀 반대의 주장을 편다.

 

적인이 침공해 와서 왕과 아비[君父]를 살해하면, 그 신하와 자식[臣子]은 창을 베개삼고 아침을 기다려 피를 뿌리며 싸움에 나가서 오직 원수 갚을 결심을 해야 하며, 만약 자기 몸으로 못했으면, 아비는 이런 마음을 아들에게 전하고 아들은 이런 마음을 손자에게 전해서, 비록 백 대에 가서라도 기어코 복수를 해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의 침공을 받아 죽었는데, 그의 두 아들들이 못나서 서로 이어 왕이 되었지마는 복수할 의리를 알지 못했다. 그의 손자 광개토왕에 와서야, 부왕(父王)의 장례를 치르자마자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10여 성을 점령하였다. 비록 백제왕의 무덤을 파헤쳐 그 시체를 가져다 조부의 무덤 앞에 제사지내진 못했지만, 이번의 한 일도 또한 의롭다고 할 만한데, 권씨(권근)의 논평이 어째서 이런 것인가? 고국원왕이 죽은 지 겨우 22년이 지났다. 그런데 권씨 말대로 한다면 할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서는 안되며, 22년의 일을 세대가 오래 지났다는 핑계로 잊어야 되겠는가? 주자(朱子)는, 당시 송(宋)이 양자강 남쪽으로 옮겨간 뒤이고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포로로 잡혀간 지 5, 60년으로 오래되었으며, 효종이 휘종과 흠종 두 황제에게는 촌수가 먼 처지이지만

"국내의 정치하는 마음을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되며, 휘종ㆍ흠종의 원수를 갚겠다는 마음을 하루라도 늦추어서는 안된다."

라 하셨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보면 주자의 생각이란 왕과 아버지의 원수란 너무도 큰 것으로 세대가 오래 지난 것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권씨가 말한 것처럼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그저 원수갚을 생각만 했다고 비난할수 있겠는가? 슬프다!

 

조선조 후기, 청에 굴욕을 당한 원한과 복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미약하게나마 남아있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안정복은 오히려 담덕왕이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대신 백제를 친 것을 '의로운 일이었다'고 호평하고 있다. 왕과 아버지의 원수는 세대가 오래되고 안 되고를 상관없이 꼭 갚아야 하며, 그것이 아무리 오래되어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뭐 생각하기 나름이니까.(개인적으로는 안정복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무튼 폭풍같이 몰아치는 고구려의 공격 앞에서 백제왕 진사는 어떻게 손도 한 번 못 써보고 밀리기만 했다. 《삼국사》진사왕본기에는 "왕은 담덕이 용병(用兵)에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나아가 막지 못했고, 그 바람에 한수(漢水) 북쪽의 여러 부락들이 많이 함락되었다[王聞談德能用兵, 不得出拒. 漢水北諸部落多沒焉]."고 적었다. 용병에 능한 자. 전략과 전술에 있어 태왕은 이미 백제에까지 소문난 군주였다.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9월에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고 남녀 5백 구(口)를 사로잡았다. 또한 잡혀갔던 본국의 백성[民口] 1만 명을 초유(招諭)하여 돌아왔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원년(391)

 

백제를 파죽지세로 몰아붙이던 고구려는 뜬금없이 방향을 틀어서 북쪽의 거란을 쳤다.

소수림왕 8년(378)에 거란의 침공으로 북쪽 변경의 여덟 부락의 백성들을 약탈당한지 꼭 13년만의 일이다.

(거란이 쳐들어왔을 때 태왕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에 불과했었다.)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겨울 10월에 백제 관미성(關彌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그 성은 사면이 깎은 듯 가파르고 바닷물에 둘러싸여 있었다. 왕은 군사를 일곱 방향으로 나누어 공격한지 20일 만에야 함락시켰다.

《삼국사》 권제18, 고구려본기6, 광개토왕 원년(391)

 

태왕이 쳐서 함락시킨 백제 북쪽 변경의 요해지(要害地) 관미성은 『능비』에서 말하는 각미성(閣彌城)이다. 태왕의 정벌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기는 하지만, 어디인지를 확실히 짚을 수가 없다. 기존의 학설은 조선조 후기 김정호의 《대동지지》를 따라 오늘날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의 오두산성이라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꼭 정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북한의 박시형은 지금 북한의 예성강 하구 지역에 있었다고도 했다.) 그 뭐냐, <고구려 해양사 연구> 쓰신 분이(뗏목 자주 타신 분) 오두산성 지역을 여러 번 답사를 하셨단다. 고구려 기와도 많이 나오고, 전략적 가치도 뛰어난 곳으로 고구려 산성임에는 틀림없는데, 이 성에는 임진강 하구를 이용하는 적을 방어하기에는 적합하지만, 예성강 하구를 통해 내려오거나 수군을 경기만 이북에서부터 진주시켜 내려오게 되면 방어력을 상실한다는 결함이 있다고. 게다가 예성강 남쪽과 임진강 사이에 있는 내륙과 해안을 유기적으로 써먹는 방어망은 구축하기 힘들다는 것인데, 이미 임진강이 아닌 예성강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국경선에서는 오두산성은 자체의 방어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그러므로 오두산성이 관미성일 가능성은 보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의 사면이 깎아지른 듯이 가파르고 바닷물이라는 천연의 해자를 갖고 있었다는 관미성의 주변지형상, 관미성은 내륙이 아니라 강 하구의 해안가나 섬 한가운데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지 않을까? 한강의 수계와 직접 연관되고, 고구려의 바닷길을 통한 접근을 폭넓게 차단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디가 적합할까. 북한의 손영종은 개풍군에 있는 백마산 부근을 관미성으로 추정했는데,이곳도 강화 북부 양사면 대안에 위치한 요충지이긴 해도 강화도 내륙의 움직임이나 강화도 바깥쪽 해상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의 탐지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후보는 지금의 김포반도와 강화도, 개풍군이 마주하고 있는 김포반도의 동북쪽이 훨씬 가능성이 있겠다. 혹시 지금처럼 둥글둥글하게 개척되기 전의 리아스식 해안처럼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갖고 있던 강화도의 교동도가 관미성이었던가? 나는 모르니 말하지 않는다.

 

왕이 이 성을 공략하기 위해서는,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수군을 동원해야 했다. 따로 해자를 파지도 않고, 드넓은 바다 그 자체를 해자로 삼았으니, 사람을 꺾으려면 먼저 자연을 꺾어야 하는 곳이 바로 이 관미성이었다. 바다와 싸우고 산과 싸우기 위해 담덕왕은수륙 양동작전을 펼쳤고, 전군을 일곱으로 나누어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압박해왔다. 그리고 20일만에, 관미성은 함락당한다.(어쨌거나 이곳이 엄청난 대역사의 현장이라고 하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모를터.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이곳의 주변 지리를 죽 한번 둘러봤으면 좋겠는데....)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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