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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타 사서의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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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삼국사≫
 
≪구삼국사(舊三國史)≫는 고려 초 또는 11세기 이전에 편찬된 삼국시대에 관한 관찬사서이나 현전하지는 않는다.486) 따라서 그 이름조차 견해가 다양하다. 즉 11세기 초에 저술된≪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에는 “해동삼국사(海東三國史)”라 하였고,487) 12세기 말 이규보(李奎報)의≪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구삼국사(舊三國史)”로,488) 14세기 일연(一然)의≪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전삼국사(前三國史)”489) 등으로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다 이칭(異稱)일 뿐이며 원래의 서명은≪삼국사(三國史)≫로 보인다.
 
편찬 시기 역시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선종 8년(1091)에 경복사(景福寺)를 방문한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경복사가 설립된 배경은 “≪해동삼국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490)고 한 사실에서 선종 8년에 이미≪구삼국사≫가 편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구삼국사≫에 대하여 이규보의<동명왕펀>서문에 “국사직필지서(國史直筆之書)”라 하였듯이 개인의 필요에 의해 편찬된 사찬의 사서가 아닌데도≪고려사≫등의 정사 기록에 그 편찬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이것은 아무래도 그 편찬에 대한 기록이 현종 2년(1011) 거란병의 침입으로 궁궐이 불 탈 때 함께 소실된 사료 속에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구삼국사≫는 적어도 11세기 이전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나아가 국초에 사관(史館)을 설치하여 사서편찬의 실무를 관장하게 하였다는 기록과491) 광종 26년(975) 김정언(金廷彦)이 감수국사(監修國史)로 이미 활약하고 있었던 기록492) 등을 종합해 볼 때≪구삼국사≫는 당·송제를 모방하여 사관제를 설치한 10세기 말 광종 때에 수사관들에 의해 편찬된 관찬사서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 감수국사(監修國史) : 고려 시대에 둔, 사관(史館)의 으뜸 벼슬. 시중이 겸임하였다.
 
그 체제와 성격은 주지하다시피 명종 23년(1139) 이규보가 장편의 민족서사시<동명왕편(東明王篇)>을 쓸 때≪구삼국사≫의 동명왕 본기를 읽고 그 신성함이 놀랐다는 점으로493) 보아 아직 유교사관이 적용되지 않았던 시기에 신이사관에 기초하여 편찬한 기전체 사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동명왕편>의 分註로 남아있는 동명왕 본기의 문장을 분석해 볼 때,≪구삼국사≫는「漢 神雀 3年 4月 甲寅」·「漢 神雀 3年 壬戌歲」등과 같이 중국의 연호와 간지를 사용해 삼국시대 주요사건들의 연대를 표기 했다는 사실도494) 확인할 수 있다.
* 신이사관 : 신비스럽고 경이로운 현상을 역사로 보는 사관
 
요컨대≪구삼국사≫는 현전하지 않지만 그 일문인 동명왕 본기의 기록이 명종 23년 이규보가 지은<동명왕편>에 분주로 남아있어 그 체제와 성격을 알 수 있다. 즉≪구삼국사≫는 신이사관에 기초한 기전체 사서로 특히 고려 초에 사관제가 설치된 후 고구려 계승의식 내지는 자주의식이 팽배되었던 광종 때에 사관들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현존하는 유일한 관찬사서인≪삼국사기≫가 그 서명과 체제에서 알 수 있듯이≪구삼국사≫의 토대 위에서 중국측의 기록을 보충하여 유교적 합리사관에 의하여 중찬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사학사적 영향이 주목된다.
 
 
 
 
486)  따라서 그에 대한 연구 또한 매우 저조한 편이나 인종 23년(1145) 김부식(金富軾)의≪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곧≪구삼국사(舊三國史)≫의 중찬(重撰)에 해당한다고 주목한 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구삼국사와 삼국사기(旧三國と三國史記)>(≪조선학보(朝鮮學報)≫39·40, 1966) 이래 두 사서에 대한 인용사료를 비교·분석한 다나카 도시아키(田中俊明),<『삼국사기(三國史記)』찬진과(撰進と)『구삼국사(旧三國史)』>(≪조선학보(朝鮮學報)≫83, 1977)가 있다.
* 찬진(撰進) : 임금께 글을 지어 바침
 
487)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권 7, 고대산경복사비래방장예보덕성사영 주(孤大山景福寺飛來方丈禮普德聖師影 註).
 
488)  이규보(李奎報),≪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 3,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 병서(東明王篇 幷序).
 
489)  ≪삼국유사(三國遺事)≫권 5, 피음(避隱) 8, 신충괘관(信忠卦冠).
 
490)  ≪삼국유사(三國遺事)≫권 3, 흥법(興法) 3, 보장봉로보덕이암(寶藏奉老普德移庵).
491)  ≪고려사(高麗史)≫권(卷) 77, 지(志) 31, 백관(百官) 2, 춘추관(春秋館).
492)  김정언(金廷彦),<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상/上,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1919).
 
493)  이규보(李奎報),≪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 3, 고율시(古律詩), 동명왕편 병서(東明王篇 幷序).
 
494)  쓰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앞의 글, 4∼5쪽.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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