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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에 대한 재평가
서병국(대진대학교 교수)
 
중국인의 관련 기록들이 말하고 있듯이 고구려의 멸망을 앞두고 나타난 온갖 말기적 병폐 요소를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일으킨 장본인으로 모든 책임이 한 몸에 모아지고 있는 인물이 연개소문이다. 연개소문의 인간성과 정치적 독재성에 관해 중국인의 기록을 그대로 옮긴 《삼국사기》에 실린 그의 열전(권 19)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의 인간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동부출신의 대인(大人)으로서 대대로라는 벼슬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연태조(淵太祚)가 죽은 후 연개소문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으나 잔인한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나라 사람들은 처음에 이를 반대했다. 결국 반대자들의 양해하에 그는 대대로 벼슬을 차지하긴 했으나 대신들은 꺼려 영류왕과 모의하여 그를 제거하려 했다. 거사를 앞두고 기밀이 누설되자 연개소문은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군대사열식을 거행한다고 빙자하여 대신들의 참관을 청했다.
 
연개소문의 지휘를 받는 부병(部兵)들은 계획한 대로 현장에 나온 100여명의 고급관리들을 모조리 죽이고는 즉시 궁중에 있던 영류왕을 시해하고 그 시신을 여러 토막으로 잘라 구렁창에 내버리고 나서 영류왕의 동생 보장을 새왕으로 세웠다. 쿠테타를 통해 연개소문은 스스로 막리지 자리에 올랐는데 이는 당나라의 병부상서와 중서령 벼슬을 겸임한 것 같았다. 전국의 모든 권력을 쥐어 국정을 마음대로 처리하게 된 연개소문은 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니다보니 누구도 그를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말을 타거나 내릴 때는 땅에 엎드린 무장들의 등위를 밟고 오르내렸다. 또한 외출할 때면 반드시 의장대를 내보내고 길을 인도하는 사람은 고함을 크게 질러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피했다. 그러다 보니 온 나라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했다는 것이다. 보았듯이 연개소문의 인간성을 보여주고 있는 이 기록 외에 다른 자료가 없다면 누구든지 위 기록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개소문의 인간성에 대해 여론을 조작한 당나라의 태종은 연개소문의 시해 사건과 이에 따른 국권 전횡을 트집잡아 고구려 침공을 계획했으나 장손무기(長孫無忌)의 신중론을 받아들여 일단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러나 태종의 생각은 갑자기 바뀌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틈을 타고 신라가 점령한 5백리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가 신라를 압박했는가 하면 신라 사신이 당나라에 들어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다는 말을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외교적 몸짓으로 사신 상리현장(相里玄奬)을 고구려에 보내 이의 중지를 청했으나 연개소문은 완강히 거부했다. 이러한 보고를 받고 고구려를 침공하기로 결심한 태종은 다시 장엄(蔣儼)을 고구려에 보내 최후 통첩을 했으나 연개소문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사신을 가두기까지 했던 것이다. 잃어버린 옛 땅을 다시 찾는 것은 고구려의 기본 생존권이 아닐 수 없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태종의 위협적인 압력을 완강히 거부했다는 데서 지금까지 내려진 그에 대한 평가와 달리 그는 고구려의 민족정신을 계승한 철저한 민족주의자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집권 초에 그는 민족주의를 추구하여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빚긴했으나 이는 고구려 침공의 명분만 찾고 있던 태종에 의해 조작된 여론이 빚어낸 필연적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고구려 침공을 앞두고 태종은 의도적으로 연개소문을 시해 사건과 관련지어 여러 차례 비난했으나 침공을 반대한 신하가 한 두명이 아니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이처럼 태종이 연개소문을 비난한 것은 시해 사건일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사실상 연개소문은 집권전부터 당나라와 마찰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도교의 도입을 영류왕에게 건의하여 왕의 이름으로 도사의 파견을 당나라에 청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도교의 창시자인 노자가 당나라 왕실의 조상이라는 데서 도교는 당나라 왕실로부터 극진한 보호를 받고 있는 실정이었다. 당나라는 즉시 도사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도덕경(道德經)의 강론이 영류왕 이하 대신들의 참석하에 매일 성황을 이루어 마침내 불교의 사찰이 도사들이 머무는 장소인 도관(道館)으로 바뀔 정도였다. 고구려에 처음 도교가 들어오는 길을 열어놓은 연개소문이 도교에 남다른 관심을 쏟은 것은 중국에서 유교·불교·도교가 나란히 발전하고 있는 것을 보고 고구려에서도 도교의 발전을 똑같이 이루어 보려는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개소문이 당나라 왕실의 관심과 보호를 받고 있는 도교의 도입을 역설한 것은 당나라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키려는 생각이 없었다는 데서 주목할 일이며 더 나아가서 고구려의 문화를 당나라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 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연개소문은 민족주의를 추구하긴 했으나 문화의 세계사적 흐름을 정확하게 알아차린 문화의 선각자였다 할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가 고구려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도교의 갑작스런 성행으로 불교가 큰 영향을 받아 세력이 전보다 줄었을 것은 명백하다. 650년(보장왕 9) 고구려 사람들이 도교에 큰 관심을 쏟고 있어 고구려에서 불교의 세력이 전만 같지 못하게 됨으로써 불교의 위기의식을 느낀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은 백제의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이는 그만큼 불교의 세력이 도교에 의해 크게 잠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종교적 망명을 한 보덕화상의 이후 활동은 불교세력을 만회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사상면에서 도교와 종교적 논쟁을 전개해 나갔다. 보덕은 세력을 펴 나가고 있는 도교의 기본사상인 불로장생설(不老長生說)을 누르기 위해 모든 중생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는 만큼 누구든지 수양만 올바르게 하면 열반의 세계에 들어가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것을 기본사상으로 내세우고 있는 열반종(涅槃宗)을 열었는데 크게 유행하여 후일 신라 5교의 하나가 되었다.
 
이렇듯 열반종이 고구려에서 만들어지지 못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의 종교적 관심이 불교에서 도교로 완전히 기울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태종은 도교의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도중에 국왕을 시해한 것은 고구려를 전쟁이라는 위기상황으로 몰고 있는 강경파의 대당나라 정책에 강한 불만을 가졌다는 데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연개소문의 시해 사건 전에 그의 제거가 영류왕 등 강경파에 의해 시도된 적이 있었으며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강경노선을 뒤집기 위해 영류왕 등 100여명의 강경파 인물들을 일시에 제거했다. 강경파의 숫자를 알 수 없으나 백여 명이 넘었던 것으로 보아 온건파에 속한 인물도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연개소문은 기록에 나타나 있지 않은 다수의 온건파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여 실질적으로 고구려를 이끌어 나가는 제1인자가 되었다. 정변으로 중앙의 강경파가 모두 제거되었다 하겠으나 지방에는 강경파 인물이 여전히 남아 있어 온건파 중심으로 구성된 중앙정부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집권에 대해 가장 완강하게 저항한 지방의 강경파 인물은 주로 수나라와의 혈전시에 실전 경험이 많은 안시성 등 서부의 모든 성주들이었다. 지방의 강경파 인물들이 건재하고 있는 한 연개소문 정권은 오래 유지되기 어려울 것이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연개소문파는 정권 유지 차원에서 요동지방의 저항적인 성주들을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연개소문 중심의 온건파 정부는 반항하는 성주들의 저항을 분쇄하는 작전으로 나와 거의 이들 성주들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했다. 운명이 걸린 연개소문 정권의 분쇄작전에도 불구하고 끝내 굴복하지 않아 연개소문도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었던 것은 안시성을 지키는 성주 한 사람 뿐이었다. 연개소문의 온건 노선에 강한 불만을 갖고 서부의 모든 성주들이 반항한 사건은 고구려의 국내문제이지만 당나라의 관심사이기도 했다. 이러하다보니 강·온 양파의 대결 상황이 벌어지고 안시성주 한 사람만 끝내 연개소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은 고구려의 내분사건인 만큼 태종도 그 전모를 알고 있었다.
 
안시성 성주는 굴복하지 않았으나 다른 성주들이 모두 굴복했다는 면에서 일단 연개소문은 지방의 반대파를 완전히 장악하여 비로서 고구려의 전 지역에 그의 통치권이 미치게 되었다. 완전히 온건파로서 구성된 고구려 정권은 당나라에 대해 부드러운 태도를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태종은 고구려의 온건노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연개소문이 주도한 시해 사건을 의도적으로 확대시켜 이를 고구려 침공의 다시 없는 명분으로 고리를 엮어 자신의 구상대로 고구려를 침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태종은 고구려의 당나라에 대한 온건노선보다 시해 사건에만 비상한 관심을 두었다 하겠다. 그런데 온건노선을 전개하려면 연개소문으로서는 강경파의 중심인물인 영류왕 시해 사건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시해 사건을 일으킨 연개소문은 중국의 전통적인 윤리관념에 따라 잔인한 성격의 강경한 인물로 관련된 모든 기록에 묘사되고 있는데 그렇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강경책보다 온건노선이 당나라의 침공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면 일단 추구해 볼만도 하다. 그러나 강경파로서는 온건노선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 아니라고 확신하여 먼저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에 온건노선을 추구하는 정권이 나왔는데도 태종은 고구려라는 반당적인 대제국 자체를 역사에서 소멸시키려 하니 태종의 배신행동에 대한 연개소문의 실망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이다. 도교의 도입을 그처럼 역설한 연개소문이 도교의 강론까지 폐지했다는 일설도 있는데 이는 당나라에 대한 배신감에서 나온 듯하다. 연개소문이 도교의 도입을 주장한 것은 당나라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분명히 보여주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을 끝내 악인으로 몰고가는 태종의 악의적인 적대행동을 확인하고 나서 연개소문의 온건노선이 강경책으로 바뀐 것은 태종에 대한 실망에서 나타난 반사적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또한 연개소문을 더욱 악인으로 조작하려는 태종에게 빌미를 준 셈이되어 연개소문은 가일층 잔인하고 난폭한 성격의 인물로 낙인이 찍혀지고 국왕을 죽인 죄인의 모습만 확대되어 중국인의 모든 기록에 실려지게 되었다고 풀이할 수 있다. 당나라 태종의 악의에 찬 배신행동에 분격한 연개소문은 드디어 강경파로 변신함으로써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분자로서 그 이름을 떨친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과의 불편했던 관계도 화해되었다. 그리하여 당나라 침공군의 필사적인 포위 공격가운데서도 안시성은 끝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연개소문의 적극적인 군사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의 침략군을 완전히 제압한 연개소문은 태종을 앞세운 가운데 양만춘과 함께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입성하여 항복의 조건으로 상당한 영토를 할양받았다고 한다. 이는 원래 온건노선을 주장했던 연개소문이 강경노선으로 급선회하여 양만춘의 강경노선을 따르는 등 두 사람이 당나라에 대한 노선문제에서 완전히 일치하여 화합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연개소문과 양만춘의 관계가 호전되었다 해서 요동지방의 전열이 전처럼 가다듬어진 듯하지 않다. 연개소문의 집권에 저항했던 성주들이 굴복함으로써 연개소문파의 인물이 성주자리를 차지했을 것은 분명하다. 다시말해 당나라의 침공을 앞두고서 영류왕파의 성주들이 연개소문 추종자들로 교체됨으로써 고구려의 군사 전략상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을 것 같아 전력의 약화가 빚어졌을 가망이 크다는 것이다. 요동을 침공했다가 여지없이 참패한 태종의 원수를 갚기위해 고종이 보복전을 전개할 때 요동지방의 큰 성 몇 개가 무너지자 연쇄적으로 주변의 성들이 싸움다운 싸움도 하지않고 항복한 것은 성주의 교체에 따른 전력약화와 상당한 연관이 있는 듯하다.
 
연개소문의 가계가 고구려의 동부출신으로 밝혀진 만큼 옛 성주들이 물러난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역시 동부출신의 사람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를 달리하는 성주의 교체가 이루어짐으로써 신·그 성주들간에도 대립·반목같은 현상이 일어났을 것은 분명하다.
 
수나라와 싸웠던 경험이 많은 서부출신의 성주들이 물러나고 별로 실전경험이 없는 동부출신의 사람들이 연개소문 추종자로 서부지방의 성주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빚어진 현상은 고구려 동서간의 일대 분열상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분열이 몰고 온 피할 수 없는 결과는 운명을 걸고 전쟁터에 나온 당나라군의 침공이긴 하지만 고구려군이 전처럼 완강한 저항도 제대로 하지못함으로써 평양성이 함락되어 최후를 맞는 비운을 보게된 것이라 하겠다.
 
연개소문이 주도한 온건노선을 당나라가 받아들였다면 고구려의 운명은 이처럼 빨리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튼 연개소문의 온건노선은 결국 나라를 구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연개소문이 처음부터 온건노선을 들고나온 것은 그가 동부출신으로서 수·당나라의 패권주의에 밝지못한 데서 그 단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동부사람들은 거리상 중국실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서부사람들은 중국과 전쟁을 거의 해마다 치루다보니 누구보다 중국실정에 밝아 끝까지 싸우는 것 외에 고구려의 살 길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한편 동부사람들은 수나라와 치룬 싸움에서 이긴 고구려에도 엄청난 손실이 있었음을 의식하여 사전에 당나라의 침공을 막으려하여 온건노선을 구국의 이념으로 들고 나온 듯하다. 연개소문의 가계 뿐 아니라 동부사람들은 될 수 있는 한 전쟁을 피하려하여 미리 전쟁을 막는데 온힘을 쏟은 듯하다. 시해사건이 일어나기 1년전에 고구려의 지리 등 기밀 전반에 걸쳐 고도의 정보수집을 주된 임무로 부여받고 고구려에 합법적으로 들어온 당나라의 사신 진대덕(陳大德)을 영접한 대대로 연태조(연개소문의 아버지)가 진대덕으로부터 서역의 고창국(高昌國)이 당나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말을 전해듣고 진대덕이 머물고 있는 객관(客館)으로 세 차례나 찾아와 예를 베푼 사실도 있었다. 그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연태조가 세 차례나 찾아온 것은 당나라에 대해 겁을 먹었기 때문인 듯하다. 연태조의 이러한 점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한 연남생(연개소문의 맏아들)이 온순, 후덕하며 예의있는 성품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할아버지의 온건한 성품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대해 나타낸 온건노선도 그의 온순한 성품에서 빚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인의 모든 기록에서는 연개소문이 악인으로 낙인이 찍혀져 있으나 일설에 의하면 선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일설이란《환단고기》에 인용된《조대기(朝代記)》를 말한다. 여기서는 연개소문을 대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얼굴과 모습이 웅장하며 의기가 호탕하고 항상 사병과 함께 거적을 깔고 자며 몸을 아끼지 않고 말은 일에 성의를 다하는 인품을 지녔다. 상은 반드시 나누어 주고 정성과 믿음으로 두루 보살피며 마음을 주는 아량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감복하여 다른 생각을 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법을 쓰는 것이 엄격하고 밝아 귀천을 가리지 않고 한결같이 대하며 범법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다스리며 큰 어려움을 당해도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당나라 사신과 대화할 때도 뜻을 굽히지 않으며 항상 자기민족을 음해하는 사람을 소인이라 하고 당나라 사람을 능히 대적하여 당나라 사신도 그를 영웅시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천한 사람을 가까이 하며 노하면 권세있고 귀한 사람도 모두 벌벌 떨었다. 실로 한 세상의 쾌걸이었다."

위의 면모에서 나타나고 있듯이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선인으로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와 아들의 온순한 성품으로 보면 연개소문의 성품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인의 모든 관련기록은 연개소문을 악인으로 낙인을 찍고 있다. 당나라가 연개소문을 다루기 힘든 사람이라고 여겼다면 중국인의 기록에 악인으로 둔갑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말해 연개소문이 다루기 힘든 거북스런 인물이다 보니 당나라는 고의적으로 그를 악인으로 꾸몄던 것이다. 이 같은 중국인의 기록이 가장 오래되다 보니《삼국사기》역시 연개소문을 악인으로 단정을 짓기에 이르렀다고 풀이할 수 있다.
 
《삼국사기》가 인용한 중국인의 기록과 《환단고기》는 연개소문의 성품, 인간성과 관련하여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당나라 정책과 관련하여《환단고기》는 그를 강경파로 보고 있는 반면 중국인의 기록은 갈피를 잡지 못하도록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 즉, 연개소문이 도교의 도입을 건의했다는 점으로 보면 온건파에 속한 인물로 느끼게 하고 있으나 태종이 시해사건을 여러 차례 비난한 것으로 보면 강경파에 속한 인물로 보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분명하게 나타내려 한 것은 연개소문이 독재자로서 국정을 전담하여 고구려 사람들에게 심한 고통만 안겨주고 나라를 망친 악인이었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을 강경파 인물이라고 보고있는《환단고기》는 영류왕을 친당적인 온건파라고 단정짓고 있다. 영류왕이 국왕이 되기 전에는 장군으로서 수나라와 친하게 지내려 했고 즉위하면서 먼저의 왕들이 심혈을 기우린 강경노선을 따르지 않고 친당적인 태도로 나와 노자의 초상화를 들여다가 고구려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경을 듣게 만들었다하여 영류왕을 온건파의 우두머리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반면에 연개소문은 수나라 때부터 강경노선을 고집하여 도교의 강해를 폐지하고 심지어 장성축조 공사도 그만둘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영류왕은 연개소문의 군사권을 뺏고 대신 장성축조 공사 감독권을 맡겼다고 한다.《환단고기》에 따르면 연개소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강경노선을 고수했다 하겠으나 중국인의 기록에 의하면 강·온파중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 가리기 매우 힘들다. 그렇다해서 중간적인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이 문제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연개소문은 당나라에 대한 태도에서 처음에 온건노선을 지키다가 당나라 태종의 고의적인 트집이 나오는 것을 확인하면서 강경파로 급선회했다는 논리를 앞에서 폈던 것이다.
 
연개소문의 명예를 깎아내리려는 저의를 반영하고 있는 중국인의 기록을 맹종하다 보면 연개소문이 태종의 침공을 받은 후에도 교훈을 얻지 못하고 더욱 포악한 행동을 자제하지 않았다는 따위의 표현밖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 태종의 쉴새없는 침략적 도발로 고구려가 인명과 물질면에서 큰 손실을 입어 국력의 소모가 컸던 것은 인정할 수 있으며 해마다 침공한 것은 고구려의 국력을 최대한 소모시키는데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쉴 사이를 주지않고 계속 퍼분 공격으로 연개소문 집권시에 있었던 최악의 위기는 661년 설필하력이 이끄는 당나라군이 연남생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의 방위망을 돌파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쪽으로 수십리 내려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당나라군은 이듬해 평양성을 포위했으나 연개소문은 방효태가 거느린 당나라군을 청천강에서 섬멸하여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 결국 연개소문의 생존시 고구려는 최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666년 연개소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비상시국을 맡게 된 인물은 그의 맏아들 연남생이었다. 아버지의 대권을 계승한 그는 막리지로서 전열을 가다듬기 위해 직접 여러 성을 돌아다니면서 살피는 등 동분서주했던 시기에 아들 삼형제 간에 대권을 둘러싸고 싸움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당나라 사람들은 고구려 멸망의 모든 책임을 연개소문의 독재정치와 아들간의 내분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그들의 기록은 이 부분을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고구려의 멸망은 연개소문이 막리지가 됨으로써 나타난 포악한 정치가 빚어낸 결과라고 마무리짓고 있으나 멸망원인은 중국인이 강조하고 있듯이 연개소문과 그 집안사람들의 국정 운영이 잘못되었다는 데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다각적인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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