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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자 (高奴子)
창조리는 고구려 사람으로, 봉상왕 때 국상을 지냈다. 그 때 모용외가 국경을 어지럽히니 왕과 신하 무리가 말하길, “모용씨의 군대가 강성하여 우리의 땅을 여러 번 범하니, 어찌 해야 할꼬.” 창조리가 말하길, “북부대형 고노자가 현명하고 또 용맹하니, 대왕께서 만약 도적을 막고 백성을 평안히 하고자 하신다면 고노자 외에는 쓸 사람이 없나이다.” 왕이 그를 신성 태수로 삼자 모용외가 다시는 오지 않았다.
- 삼국사기 제49권 창조리 열전 -
1 개요
고구려의 명장. 그리고 고구려의 대 모용외 결전병기
모용부의 족장인 모용외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해왔을 때 이를 격퇴하여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다. 이후에 공을 인정받아 벼슬이 북부 대형(大兄)을 거쳐 신성 태수(太守)에 이르었으며, 국상 창조리의 추천을 받아 이후로도 모용외가 고구려를 공격했을 때마다 이를 막았다.
2 활약상
293년, 선비족 모용부의 족장인 모용외가 고구려를 침략해왔는데, 그 군세가 매우 강하여 고구려왕인 봉상왕마저 도읍을 떠나 신성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모용외는 달아난 봉상왕을 추격하여 거의 잡기 직전에 이르었다. 그런데, 이때 신성에서 북부 소형의 벼슬을 지내던 고노자는 기병 5백기를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가 왕의 행렬을 추격해오던 적군을 발견하고는 이를 공격하였다. 결국 모용외의 군사는 고노자에게 패하여 물러났고, 왕은 고노자의 공로를 인정하여 벼슬을 북부 대형으로 올려주었으며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이후 296년, 모용외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이번에도 그 군세가 강해서 선왕인 서천왕의 무덤이 도굴당하는 등 큰 피해를 당하였다. 이에 고심하던 봉상왕에게 국상(國相) 창조리가 모용외의 침략을 막을만한 인물로 고노자를 추천하였다.[1] 봉상왕은 창조리의 말에 따라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지인 신성 태수(新城 太守)에 봉하였다. 고노자는 신성에서 백성들을 잘 보살펴 선정을 베푸는 한편 성의 방비를 튼튼히 하여 위세와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고노자가 신성 태수가 된 이후로 모용외는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못하였다.
3 평가
한 마디로 평하자면 고구려의 대 모용부 결전병기. 모용외가 침략했을 때 마다 어디선가 나타나서 반드시 이를 막았다. 모용외의 입장에서는 늘 고구려를 좀 이길만 하면 어디선가 갑자기 어디서 툭 튀어나와 다 이기던 싸움도 지게 만들었으니 참 얄미웠을 것이다(...).[2] 게다가 이 양반이 신성 태수가 된 이후로 다시는 모용외가 고구려를 넘보지 못했다고 하니 모용부에서 얼마나 그 악명이 자자했을지 짐작이 간다(...).
또한 고노자가 백성들을 상대로 선정을 베풀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단순히 용맹했을 뿐만 아니라 어진 성품과 현명함을 겸비한 인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도 창조리는 고노자를 왕에게 추천하면서 '현명하면서도 용맹한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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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국상 창조리는 훗날에 폭정을 일삼는 봉상왕을 때려 잡고 미천왕을 옥좌에 앉힌 사람이다.
[2] 봉상왕을 잡으려 했더니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와 이를 막질 않나, 이제 좀 고구려를 바르는가 싶더니 갑자기 신성 태수가 되어서 이를 막질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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