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ctionary_Id=10038196

고구려의 사냥


고구려에서는 사냥을 군사 훈련의 하나로 삼았다. 또 사냥을 통해 종묘나 산천 제사에 쓸 제물을 얻었다. 그리고 임금의 장기간에 걸치는 사냥은 변경의 국방 상태를 점검하려는 의도도 들어 있었다. 
 
『삼국사기』에 실린 고구려의 사냥 관계 기사는 모두 33건으로, 이에 관련된 동물과 그 빈도는 다음과 같다.

사슴(10), 돼지(9), 호랑이(7), 노루(6), 여우(4), 개(3), 표범(2), 꿩(1)

맥궁(貊弓), 단궁(檀弓), 경궁(勁弓), 각궁(角弓) 등으로 불린 고구려의 활은 타원형으로 구부러졌으며[彎弓], 길이도 80cm에 지나지 않는다[短弓]. 그리고 촉은 넓적촉, 뾰족촉, 변형 두 나래[變形兩翼]촉의 세 종류를 썼다.
 
고구려의 사냥 모습은 무용총 수렵도 등의 고분벽화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말을 탄 사냥꾼이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을 활[短弓]로 쏘아 잡는 모습을 그린 무용총의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정기적으로 사냥대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해마다 삼월 삼짇날 낙랑(樂浪)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고,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날 왕과 함께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따라 갔다."-권제45 열전 제5 「온달」 

“5부의 모두 군사들이 따라갔다”는 내용은, 사냥을 군사 훈련의 하나로 삼은 것을 알려 준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서 짐승을 많이 잡은 무사에게 큰 상을 내린 까닭도 이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덕흥리고분과 무용총, 그리고 수산리고분벽화를 비롯한 여러 고분벽화에 잘 드러나 있다. 
 
고구려 지배층은 북방 유목민족의 후손들이었던만큼, 활을 잘 쏘는 임금들이 적지 않았다. 시조 고주몽은 부여시절에 들사냥에서 활을 아주 잘 쏜 까닭에 오히려 사람들의 미움을 샀다. ‘주몽’이라는 이름도 부여 말로 ‘활 잘 쏘는 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에도 “나이 겨우 일곱 살에 기골이 뛰어나서 보통 사람과 달랐다. 스스로 활과 살을 만들었으며, 백 번 쏘면 백 번 다 맞혔다”고 적혀 있다.-제1권 「기이」제2  

『삼국사기』를 통해서 역대 임금들의 사냥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리왕(琉璃王)은 2년(서기전 17) 9월에 흰 노루를 잡았으며, 이듬해 7월에는 기산(箕山)에서 일주일 동안이나 사냥을 계속하였다. 19년(1) 8월에 제사(郊祭)에 제물로 쓸 돼지가 달아나자, 이들을 뒤좇던 관리 둘이 돼지 다리의 힘줄을 잘랐고, 이를 안 왕은 “하늘에 제사할 희생에 어찌 상처를 낸다는 말인가?”하고 두 사람을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 이때 이 돼지는 올무로 잡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올무라야 상처를 내지 않고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24년(5) 9월에는 기산에서 사냥하던 중에, 양 겨드랑이에 털이 달린 이상한 사람을 만났다. 이후 그를 크게 쓰다가 마침내 우(羽)씨 성을 주어 사위로 삼았다. 이로써 기산이 단순한 사냥터가 아니라, 신비한 장소임을 알 수 있다. 사냥에서 거둔 짐승으로 제사도 지냈을 것이다.
 
대무신왕은 3년(20) 9월 골구천(骨句川)에서 ‘신기한 말[神馬]’을 잡아‘거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임금이 말을 잡은 유일한 기사로, 야생의 말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를 ‘신기한 말’이라고 하는 까닭이 있다. 5년(22)에 부여와 전투를 벌이던 중에 이 거루라는 말이 행방불명이 되어 왕이 걱정하던 중에, 부여 말 백 마리를 이끌고 돌아왔던 것이다. 5년 2월에는, 부여를 칠 때 군사들이 굶주리자 “들짐승을 잡아서 먹였다”는 기사도 있다. 사냥은 전투 중 현지에서의 식량 조달 수단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민중왕은 3년(46) 7월에 흰 노루를 잡았으며, 이듬해 여름과 가을에도 두 차례 사냥에 나섰다. 태조왕(太祖王)은 55년(107) 9월에 자주빛 노루를 잡았고, 80년(132) 7월에는 사냥 뒤에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대규모의 사냥을 벌인 것이다.이어 86년(138) 3월에는 일주일, 7월에는 닷새 동안 벌였다. 장기간 사냥에 대한 첫 기록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지만, 국경 순찰 및 군사 격려가 목적이었으리라고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문자명왕도 15년(506) 8월 닷새 동안 용산(龍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남쪽에서 사냥을 벌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해 11월 백제를 침공하던 고구려군은 눈을 만나서 돌아왔다고 하는데, 8월의 사냥은 백제 침공을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평원왕은 13년(571) 7월에 패하(浿河, 지금의 예성강 벌판)에서 무려 50일 동안 사냥을 하였다. 이 시기에는 백제나 신라와도 평온을 유지하였으므로, 반드시 군사적 목적 때문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군사훈련 외에 산천에 대한 제례와 군신들과의 화목을 다지려는 여러 가지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삼국을 통틀어 가장 장기간에 걸치는 사냥이었다.
 
부여의 사신이 태조왕 25년(77) 10월에 사슴을 바쳤고, 53년(105) 정월에도 호랑이를 선물하였다. 그리고 55년(107) 가을에는 동해곡(東海谷)의 수령이 붉은 표범을 바쳤다. 이들은 올무나 그물로 잡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사람들은 일찍부터 매나 개를 이용하는 사냥을 즐겼다. 장천1호고분을 비롯해서 안악1호분묘에 그려진 매사냥 장면이 이를 알려준다. 더구나 태조왕 69년(121) 10월에는 숙신(肅愼)에서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고구려 임금의 매사냥이 이웃나라에까지 널리 알려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특정한 지역에 왕실 전용 사냥터를 마련해 두었다. 기산(箕山)에서 사냥하였다는 기사가 여섯 차례나 나타나기 때문이다(유리명왕 3회, 태조왕 1회, 중천왕 2회). 그리고 그 기간은 서기전 17년부터 262년까지 근 3백여년에 이른다. 기산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이 아쉽지만, 한 곳이 3세기 동안 왕실의 사냥터 구실을 했던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중천왕은 15년(262) 7월, 이곳에서 흰 노루를 잡았다.
 
이밖에 두 임금이 같은 곳에서 사냥을 한 것은 ‘(대궐) 동쪽’ 사냥터이다. 민중왕(3년(46) 7월)과 태조대왕(10년(62) 8월)이 그 주인공으로, 각각 흰 사슴과 흰 노루를 잡았다. 이로써 대궐 동쪽의 근교에도 왕실 사냥터를 마련해 두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사냥 시기는 주로 봄가을 두 차례이며, 차대왕만 12월에 한 차례 벌였다.
 
고구려에서는 호랑이나 표범을 비롯하여 사슴, 노루, 멧돼지, 곰, 승냥이, 여우, 토끼, 살쾡이, 수달, 산달, 꿩 따위를 잡았다. 임금이 사냥에서 주로 거둔 것은 흰 노루(민중왕 · 중천왕 · 장수왕), 흰 사슴(태조왕 · 서천왕)이었으며, 차대왕은 흰 여우를 놓쳤다. 이들 짐승 앞에 ‘흰’자를 붙인 것은 “왕이 잡은 특별한 짐승”이라는 뜻으로 보인다. 한편, 보장왕 18년(659) 9월에 호랑이 아홉 마리가 한꺼번에 성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을 잡아먹는 등의 소란을 피웠음에도 잡지 못하고 말았다.
 
『일본서기』에 고구려의 호랑이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다음은 교코쿠(皇極)천황 4년(645) 4년 4월 1일자 기사이다.

고구려의 학승(學僧)들이 말하였다.“우리의 친구 안작득지(鞍作得志)는 호랑이를 친구로 삼아서 그 변신술을 배웠다. 삭막한 산을 푸른 산으로 바꾸었고, 황토를 가지고 흰 물로도 만들었다. 이러한 기술은 무궁무진하다. 또 호랑이가 바늘을 주면서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신중히 처리해야 한다. 이로써 다스리면 낫지 않는 병이 없다”고 한 적도 있다. 과연 그 말과 같이 안작득지는 다스려서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 그는 바늘을 기둥 속에 감추어 두었다. 그러나 뒤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기둥을 부러뜨리고 바늘을 가지고 달아났다. 고구려에서는 득지가 귀국하려는 것을 알고 독을 주어서 죽였다.

이 기사만으로는 누구에게 무슨 까닭으로 말하였는지 알 수 없다. 내용의 사실 여부는 제쳐두더라도, 고구려 사람들도 호랑이를 신비한 존재로 여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던 덕분에 이 말이 통했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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