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minjog21.com/news/articleView.html?idxno=5232

도심 속 고구려의 성곽과 문루
평양시민들의 휴식처로 변모
정창현의 북녘의 국보유적 기행[3] 국보유적 제1호 평양성
[131호] 2012년 02월 01일 (수) 19:03:34 정창현 국민대 교양과정부 겸임교수  minjog21@minjog21.com

2002년 8월 처음 평양의 모란봉에 올랐다. 그후 2008년 5월까지 10여 차례 모란봉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주말이나 명절 때면 한가로이 산책하는 평양 시민들을 만날 수 있는 ‘수도의 정원’이기도 한 모란봉은 고구려시대 쌓은 평양성의 북성이 자리잡고 있던 곳이다. 또한 북녘의 주요 국보유적이 다수 자리잡고 있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국보유적 제4호 대동문
 
2007년 5월 11일 마음먹고 평양성 답사에 나섰다. 그 동안 10여 차례 모란봉에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평양성을 둘러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앙역사박물관의 리정남 실장과 여성해설강사가 동행했다.

평양 중심가에 위치한 모란봉은 아름다운 경치와 고즈넉한 평양성의 누각, 현대적인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평양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서울의 4배에 달하는 대도시인 평양이 쾌적한 녹색도시로 손꼽히는 것은 뭐니뭐니 해도 평양 중심가에 자리잡은 모란봉 덕분이다. 특히 모란봉은 ‘천하제일강산’으로 불리며 조선팔경 중 하나로 손꼽히는 명승지다. 게다가 모란봉은 16만 그루의 수목, 철 따라 피는 120여 종의 꽃과 함께 칠성문, 을밀대, 부벽루 등 과거 고구려 시대 평양성의 누각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고즈넉한 정취를 선사한다.

원래 모란꽃을 닮은 금수산의 봉우리 이름이었던 모란봉이 언제부턴가 산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됐다. 

모란봉 일대의 조감도
 
답사는 평양성 내성의 북문이었던 칠성문에서 시작했다. 평양성은 압록강 중류 유역의 국내성을 왕도로 하여 번영한 고구려가 영토의 확장과 더불어 427년 평양으로 천도한 후 552년부터 30년 이상 걸려 세운 도성이다. 평양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이 교차하고 남북으로 평지와 구릉이 알맞게 배치된 유리한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국보유적 제1호 평양성
6세기 고구려의 수도성

평양성의 개괄적인 연혁에 대해 해설 강사가 설명했다.

“고구려는 안학궁성시기 수도 보위의 제한성과 강력한 국력에 기초하여 도시 전부를 성벽으로 둘러막을 목적 밑에 552년부터 586년 사이에 새 수도로 평양성을 건설했습니다. 평양성은 북쪽에 금수산이 솟고, 동·서·남 세면에 대동강과 보통강이 둘러막아 자연 해자(垓字, 성벽 바깥에 파놓은 물도랑)를 이룬 유리한 지대에 자리잡았습니다.

평양성의 바깥성벽은 금수산의 모란봉을 북쪽 끝으로 하고, 서남으로 을밀대, 만수대를 타고 보통강을 따라 뻗다가 보통강과 대동강이 합치는 목에서 동북으로 꺾이어 대동강을 거슬러 대동문을 지나 다시 모란봉에 이르렀는데, 그 둘레는 약 16㎞이며, 성벽의 총연장 길이는 약 23㎞에 달합니다.

평양성은 산성의 우점(장점)과 평지성의 우점을 종합하여 고구려 사람들이 처음으로 창안해 낸 평산성형식의 새로운 수도성이었습니다.”


평양성 지도

평지성(平地城)과 산성이 한 조(組)를 이루는 것은 고구려 도성의 특징이다.

새로운 수도성을 완공한 고구려는 586년(평원왕 28)에 수도를 장안성(長安成)으로 옮겼다. 이곳이 현재 평양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평양성이다. 안학궁과 대성산성을 전기 평양성, 장안성을 후기 평양성이라고도 한다.

평양성은 내성(內城)·외성(外城:羅城)·북성(北城)·중성(中城)으로 이루어졌다. 내성은 대동문(大同門) 아래에서 서북쪽으로 남산고개를 지나 만수대(萬壽臺)까지이고, 외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둘러싼 평지성이며, 유사시 방어성의 역할을 한 북성은 만수대 북쪽으로 모란봉을 둘러싼 부분이고, 내성 남쪽으로 대동교(大同橋)에서 안산(按山)까지 연장된 성이 중성이다.

“성문은 내성, 외성, 중성 할 것 없이 각각 네 면에 내고, 북성에서는 남쪽과 북쪽에만 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대동문은 내성 동문이고, 칠성문은 내성 북문, 보통문은 중성 서문, 전금문은 북성 남문, 현무문은 북성 북문입니다. 원래 중요한 성문들에는 옹성(甕城)을 쌓았습니다. 성의 전망이 좋은 7개의 봉우리들에는 장대를 두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을밀대와 최승대입니다. 고려시대에 출간된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전성기 주변지역을 포함한 수도의 집 수는 21만 508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성벽은 돌로 쌓거나 돌과 흙을 섞어 쌓기도 했는데, 돌로 쌓은 경우에는 4각추형태로 다듬어 외면 또는 양면 축조방식으로 쌓았습니다.”

국보유적 제18호 칠성문(七星門)
‘행복의 문’ ‘사랑의 문’


칠성문은 과거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 현재는 평양 청춘남녀의 산책길로 인기가 높다.

해설강사의 개괄적인 설명이 끝난 후 먼저 칠성문을 둘러봤다.

“칠성문이라는 이름은 북쪽을 가리키는 ‘북두칠성’에서 ‘칠성’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입니다. 칠성문에는 외래침략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운 우리 인민들의 애국적 투쟁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1010년 고려를 침략한 거란이 칠성문 앞에서 패퇴했으며 임진왜란 당시인 1593년 1월 평양성 탈환전투 때 군인과 의병들이 칠성문으로 제일 먼저 쳐들어가 왜적을 물리친 적도 있다.

예로부터 칠성문은 ‘행복의 문’ ‘사랑의 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칠성문에 얽힌 전설 때문이다. 고구려 때 돌범이라는 총각이‘시내’라는 처녀를 사랑했지만 시내의 아버지는 칠성문도 드나들지 못하는 녀석에게 딸을 줄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돌범은 그 뜻을 알아차리고 무사가 된 다음 시내와 결혼할 것을 다짐하고 3년을 기한으로 집을 떠나면서 시내에게 기다려 줄 것을 부탁하지만 5년 만에야 마을에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 시내는 시집을 가버렸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집으로 돌아온 돌범은 뜻밖에도 집에 와 있는 시내와 만나게 된다. 시내는 돌범의 집으로 시집와 있었던 것이다. 이 전설 덕분인지 칠성문은 지금도 사랑을 속삭이는 평양 청춘남녀들의 인기 산보(데이트) 길이다.

칠성문은 6세기 중엽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북문으로 처음 세워지고 922년(고려 태조 5)에 고쳤다. 1711년(조선 숙종 37)에 다시 지었고, 문루는 1764년(조선 영조 40)에 다시 지었다.

칠성문은 적이 공격하기에는 힘들지만 성안에서 적을 공격하기 유리한 지형에 있다. 보통문과 함께 의주 방면으로 통하는 성문 역할을 했다. 문루는 정면 3칸(7.39m), 측면 2칸(4.36m)의 단층 팔작집이다. 흘림기둥을 사용했으며, 정면 가운데 부분은 아래의 홍예문을 피해 조금 넓게 잡고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일제시기 사진엽서 속의 모란봉. 을밀대에서 바라본 풍경으로 멀리 산 정상에 최승대가 보이고, 오른쪽 대동강에 접해 있는 것이 부벽루이며 중앙에 있는 것이 지금은 사라진 영명사다.
 
국보유적 제19호 을밀대(乙密臺)
을밀 장군의 전설이 깃든 곳

칠성문에서 조금 올라가다 오른쪽으로 보면 북에서 가장 역사가 오랜 모란봉극장이 보인다. 1948년 4월 남북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가 열린 곳이다. 여기서 다시 길을 재촉해 산을 오르면 을밀대에 닿는다. 을밀대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는 평양팔경의 하나인 ‘을밀상춘(乙密賞春:을밀대에서 바라 보는 봄 경치)’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현재의 을밀대.


1955년 4월 16일 전쟁 때 파괴된 을밀대를 현지지도하는 김일성 수상.
 
을밀대는 고구려 평양성 내성 북장대 터에 세워진 조선시대의 누각이다. 을밀대란 이름에 대해서는‘웃미루터(읏밀이언덕)’에서 유래됐다는 설, 옛날 ‘을밀선인’이 자주 하늘에서 내려와 여기서 놀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 고구려 때 ‘을밀 장군’이 이곳을 지켜 싸웠다는 데서 온 이름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을밀대는 6세기 중엽 평양성 내성의 북쪽 장대로 처음 건설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 보수됐다. 높이 11m의 축대 위에 세워져 있는 을밀대는 사방이 탁 트인 경치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하여 ‘사허정’이라 했다는 기록도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최승대(最勝臺)가 있었는데 1714년(조선 숙종 40)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최승대는 모란봉으로 옮겨 가고 누정을 다시 지었다.

축대 위에 세운 누정은 정면 3칸(7.5m), 측면 2칸(5.3m)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상부구조는 5량가 형식이다. 비바람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높이 1m 정도의 4각 돌기둥 위에 흘림기둥을 세우고 2익공 공포를 얹었다.

국보유적 제21호 최승대([最勝臺)
경치 감상에 제일 좋은 곳

을밀대에서 내려오면 현무문(玄武門)을 만날 수 있다. 평양성의 북성을 쌓을 때 처음 금수산(錦繡山)에 세운 북문으로, 사신 가운데 북방 방위신으로 되어 있는 현무에서 이름을 땄다. 현재 북의 보존유적 제1호(보물급)로 지정되어 있다. 현무문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오르면 모란봉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최승대에 다다른다. ‘경치를 감상하기에 제일 좋은 곳’이라는 의미인 최승대는 평양의 전체 경관을 감상하는 데도 최고로 꼽힌다. 대동강 한복판의 능라도가 한눈에 들어오고, 강 건너 동평양과 서평양의 모습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모란봉의 정상에 세워진 최승대.

최승대 자리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 북성의 북장대터로 1714년 평양성 수축공사 때에는 이 자리에 봉화대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1716년(숙종 42)에는 약 60m 가량 내려와 양지바른 곳에 오승대라는 정자를 세웠다. 1940년경 봉화대가 있던 현재의 자리로 오승대를 옮겨 지으면서 최승대(最勝臺)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

최승대는 화강석을 다듬어 쌓은 높은 축대 위에 둥근 주춧돌을 놓고 정면 3칸(7.4m), 측면 2칸(4.7m) 규모로 세운 단층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1716년경에는 평양종의 전신인 큰 동종을 설치하고 운영하기도 했다. 부재의 조각 수법이 세련될 뿐만 아니라 풍치 수려한 모란봉 꼭대기에 있어서 주변 경관과 함께 아름다운 절경을 자아낸다.
 
국보 제22호 전금문(轉錦門)과 제17호 부벽루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

최승대에서 다시 올라갔던 길로 내려오다 보면 대동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전금문이 멀리 보인다. 평양성 북성의 남문으로, 한쪽으로 모란봉을 끼고 대동강에 면해 있다. 1714년(숙종 40)에 중건되었으나 6·25전쟁 중 파괴되었고, 현재의 모습은 1959년에 복원한 것이다.


평양성 북성의 남문인 전금문,


전금문 바로 위에 서 있는 부벽루.

전금문은 성벽과 직각으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웠다. 1714년 북성 재건 때 축대 가운데에 홍예문을 냈다. 축대 위의 문루는 정면 3칸(7.4m), 측면 2칸(4.4m)의 겹처마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조선시대에는 청류벽 아래 대동강 뱃길과 연결되는 관문으로 사용됐고, 성문 내에는 부벽루와 영명사터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영명사는 392년(고구려 광개토대왕 2)에 창건되어 평양팔경의 하나로 손꼽혔으나 1894년(조선 고종 31) 청일전쟁 때 거의 불타버렸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에 다시 지었으나 6·25전쟁 때 불타 없어지고 부속건물인 부벽루와 5층탑만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영명사터 인근에 초대소가 자리잡고 있어 아쉽게도 외부인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그 중 부벽루(浮碧樓)는 모란봉 동쪽 깎아지른 청류벽 위에 서 있는 정자이다. 본래 393년에 창건한 영명사의 부속 건물로서 그때는 이름도 영명루라고 불렀는데, 그 후 12세기에 이르러 ‘대동강의 맑고 푸른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정자’라는 뜻에서 부벽루라고 고쳐 불렀다. 국보유적 제17호로 지정돼 있다. 부벽루는 뛰어난 건축술과 아름다운 경치로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조선 3대루의 하나로 이름 높았다. 특히 부벽루는 달맞이 구경이 황홀하여 ‘평양팔경’(부벽완월)의 하나로 알려져 왔다.


일제시기의 전금문과 부벽루의 모습. 멀리 을밀대가 보인다.

국보 제23호 홍복사7층석탑과
163호 용화사(龍華寺)

을밀대에서 아래를 바라보면 김일성 경기장과 개선문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개선문은 김일성 주석의 조국 개선을 기념하여 1982년 4월 제막됐다. 모란봉기슭 개선문 옆에 있는 김일성경기장은 모란봉경기장을 확장한 것이다.

해방 직후에는 작은 공설운동장이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1945년 10월 14일 이곳에서 개선 연설을 했다. 김일성경기장 옆에는 개선청년공원이 있다. 공원안쪽에 용화사가 자리잡고 있다.


모란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용화사 전경.

대웅전 왼쪽으로 이전된 홍복사7층석탑과 영명사 8각석불감이 보인다. 1920년대에 창건된 이 절은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밭과 임야 등 총 2만 552평을 소유했던 대규모의 사찰이었다. 현재는 본전 1채와 요사 1채 규모의 작은 포교당으로, 1980년에 복구됐다. 평양시내에 있는 관계로 1991년 대성산 광법사가 중창되기 전에는 외국의 불교계 인물들이 자주 찾기도 했다.

용화사 경내에는 홍복사7층탑과 영명사 팔각석불감 등 국보유적 2점이 이전돼 보관되어 있다. 홍복사 7층탑은 원래 평천구역 평천동 홍복사터에 있었는데, 여러 차례 옮겨졌다가 이곳에 자리잡았다. 탑의 바닥돌과 기단, 몸체 등 주요 구성 요소들의 평면은 6각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몸체의 층마다 불상을 새긴 점이 특이하다.

국보유적 제148호로 지정돼 있는 영명사 팔각석불감(永明寺八角石佛龕)은 고려 초기에 건립된 불감으로, 원래 고구려 시대에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지은 아홉 사찰 중 하나로 알려진 영명사에 있던 것을 옮긴 것이다. 불감이란 불상을 모시기 위해 만든 집이나 방을 말하는데, 영명사 석불감은 2단의 8각 기대석(基臺石) 위에 감실을 만들고 그 위에 옥개석과 상륜을 올린 독특한 구조이다.

국보유적 제20호 청류정(淸流亭)
문루건축 특징 엿볼 수 있어

을밀대에서 평양성벽을 따라 대동강변 쪽으로 걸어내려오자‘국보유적 제1호 평양성’이라고 써 있는 표식비가 나온다. 이곳에서 더 내려가자 청류정이 나왔다. 청류정은 낮은 기단 위에 정면 3칸(11.1m), 측면 2칸(6.2m)으로 세운 팔작지붕의 단층 정자이다.


을밀대와 청류정 사이 평양성 성곽 앞에 세워져 있는 ‘국보유적 제1호’ 표식비.


청류벽의 이름을 붙인 청류정.

본래 고구려 평양성 내성의 서문인 정해문의 문루였다. 정해문은 조선시기에 평양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하면서 1716년에 고쳐 세웠으며 1927년 정해문을 없애고 그 문루를 지금의 위치에 옮겨 지으면서 청류벽의 이름을 따 청류정이라고 부르게 됐다. 청류정은 6·25전쟁당시 심한 피해를 입었다가 1959년 옛 모습대로 복구됐다. 문루 건물의 부재를 그대로 가져와 옮겨지었기 때문에 문루건축의 특징이 있는 정자이다.

청류정에서 모란봉극장 쪽으로 계속 내려오면 해방탑이 나온다. 항일전투에 참여한 소련군을 기리기 위해 1946년 8월에 세운 탑이다.

국보 제16호 연광정(練光亭)
관서팔경의 하나, 대동강 한 눈에

모란봉을 내려와 다시 차를 타고 대동강을 따라 옥류관을 지나자 연광정과 대동문이 나타났다. 연광정은 평양성을 건설하면서 처음 세웠고, 1111년(고려 예종 6)현재의 자리에 다시 정자를 세우며 이름을 ‘산수정’이라고 했다. 그 뒤 보수·재건하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현재의 정자는 1670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은 두 개의 다락을 조금 비끼어 맞물려 세워져 있다. 남쪽 누각은 정면 3칸(11.35m), 측면 3칸(9.2m)이고 북쪽 누각은 정면 2칸(6.15m), 측면 4칸(11.02m)이다.

정자 일대에는 연대가 서로 다른 글자가 새겨진 기와 20여 종이 발견되어 여러 차례 보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연광정은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예로부터 관서팔경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남쪽 누각에 오르자 기둥에 고려 때 시인 김황원의 시구를 적은 현판이 걸려 있다. 해설강사가 이 현판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대동강가에 자리잡고 있는 연광정.


연광정 남쪽 누각에 붙어 있는 사적기.


고려 때 시인 김황원이 쓴 ‘천하제일강산’ 현판.

“어느 날 부벽루에 올라 누에 걸어놓은 현판들을 본 시인 김황원은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다 떼어버리고는 자기가 시를 짓겠으니 그것을 새겨 붙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김황원은 청류벽을 감돌아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과 간 건너편에 펼쳐진 경치를 이윽토록 바라보다가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시를 써나갔다고 해요.

‘긴 성벽기슭으로는 강물이 도도히 흐르고 넓은 벌 동쪽에는 점점이 산이 있네.’

여기까지 써나가던 김황원은 다음의 시구를 쓰자니 자기의 시 재간이 평양의 경치를 노래하기에는 너무도 미약하다는 생각이 문득 앞을 가로막아 절망에 빠졌어요. 그래서 그만 붓대를 꺾어 던지고 한탄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가 채 쓰지 못한 시 글씨판(주련)은 그 후 연광정의 기둥에 옮겨져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연광정 옆에는 아담한 종각이 하나 서 있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평양종’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다. 이 종이 처음 주조된 정확한 날자는 알 수 없으나 옛날 대동문 문루 위에 달려있던 것을 1714년(숙종 40년)에 평양성의 북성을 쌓으면서 북장대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 후 화재가 일어나 종이 깨여지자 1726년(영조 2년)에 본래의 것보다 더 큰 종을 주조하여 당시 객사였던 ‘대동관’ 앞에 종각을 짓고 종을 달아 놓았다. 1804년(순조 4년)에 큰 화재로 또다시 종각이 불타 1805년(순조 5년)에 고쳐지었다고 한다. 1827년 6월 24일 지금의 위치에 종각을 옮겨 세우고 종도 옮겨 달았다.


대동문 앞으로 옮겨 보관되어 있는 평양종.

국보유적 23호로 지정돼 있다. 종의 크기는 높이 3.1m, 무게 13.5t에 달한다. 종두에는 쌍룡(청룡과 황룡)틀임을 조각하였는데 그 생동한 모습은 조선 시기 금속 주조기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준다. 해설 강사의 설명이다.

“1890년대까지 평양성에서는 매일 아침 문을 여는 새벽 4시에 33번, 문을 닫는 저녁 10시에 28번 평양종을 울렸다고 합니다. 성내의 주요 사건을 알리는 데 평양종이 사용됐죠. 그러나 나라를 강점한 일제는 평양종을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보고 그 종소리에 조선사람의 넋이 깃들어있다고 생각하면서 종을 치는 것은 물론 그 가까이에 다가서지 조차 못하게 했습니다. 평양종이 자기의 아름다운 소리를 다시 울린 날은 1946년 1월 1일이었죠. 이날에 울린 평양종 소리는 설명절을 맞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기쁨과 감흥을 안겨주었습니다.”

국보유적 제4호 대동문
평양성 6대문 중 가장 큰 성문

평양종을 보고 앞으로 보니 대동문이 장대하게 서 있다. 6세기 중엽에 지은 평양성 내성의 동문으로 평양의 6대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큰 성문이었다. 지금 건물은 1635년에 재건했다가 6·25전쟁 당시 또다시 큰 피해를 입은 것을 원상복구한 것이다.


대동문의 정면 모습.

서로 다른 ‘대동문’ 현판이 눈에 띈다. 문루에는 박위가 쓴 ‘읍호루’라는 현판과 양사인이 쓴 ‘대동문’이라는 현판이 지금까지 걸려있다. ‘읍호’는 문루에서 손을 드리워 대동강의 맑은 물을 떠올릴 수 있다는 뜻으로 강가에 지은 대동문의 특징을 잘 표현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문은 화강석을 정교하게 다듬어 쌓은 정교한 축대와 그 위에 세운 문루로 이뤄져 있다. 문의 전체 높이는 19m이다. 축대 높이는 6.6m이며, 축대 복판에 무지개 문길이 있다. 축대 위에 세운 2층 문루는 앞면 3칸(15.91m), 측면 3칸(10.34m)이다. 1, 2층의 공포는 모두 안팎 3포의 포식공포를 얹었다. 대동문은 고려시대의 건축물을 계승한 조선 전기의 형식과 구조상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 성문 건축물로 꼽힌다. 특히 대동문은 평양성의 성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성문으로, 평양성 방어에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국보유적 제3호 보통문
평양팔경의 하나 ‘보통송객’

칠성문에서 대동문까지 답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잠시 보통문에 들렸다. 평양시 중구역 보통문동 천리마 거리 시작점에 있다. 이 문은 고구려시기 평양성 중성의 성문으로 수도성을 쌓은 6세기 중엽에 처음 세웠다. 지금의 것은 1473년에 중건한 것이다. 고려시기에 는 광덕문, 우양관이라고도 불렸다. 보통문은 듬직한 축대와 무게 있는 2층 문루로 이뤄졌다. 축대의 높이는 6.5m이며, 그 가운데에 무지개 문길을 냈다. 문루는 앞면 3칸(14.8m), 측면 3칸(9.15m)의 겹처마합각집이다.


평양 천리마거리 초입에 서 있는 보통문.

6.25전쟁의 참화를 비껴간 유일한 유적이다. 보통문은 예로부터 ‘보통송객’(보통문에서 손님을 바래주는 광경)으로 평양 팔경의 하나로 전해진다. 6·25전쟁 때 엄청난 폭격에도 파괴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평양성 답사가 끝나고 헤어지면서 리정남 실장이 작별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오십시오. 앞으로 남북관계가 안정화돼서 남북의 역사학자들이 함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고, 함께 토론하는 자리가 자주 마련됐으면 합니다.”





Posted by civ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