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의 상자’연 국정원 명예도, 국익도 잃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입력 : 2013-06-29 13:49:10ㅣ수정 : 2013-06-29 13:55:59
6월 24일 오후 3시 15분, 국가정보원(국정원) 직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 난데없이 나타났다. 국정원 직원들은 정청래 국회 정보위 민주당 간사 방 등을 돌며 스프링으로 편철된 서류뭉치 한 부씩을 배포하려고 했다. 국정원 직원이 들고온 103쪽짜리 서류뭉치 표지에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10.2∼4, 평양)’이라는 제목과 ‘2008.1(생산)’이라는 표시가 명기돼 있었다. 야당 정보위원 6명은 수령을 거부했다.
여당 의원들은 접수했으나, 본인들이 직접 공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날 저녁부터 회의록 전문이 일부 언론사 사이트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국정원에 의해 열린 것이다.
정국을 일순간에 격랑으로 몰고간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원회가 6월 20일 회의록 발췌본을 열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서해북방한계선(NLL) 발언과 관련해 조작·왜곡 논란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야 공히 전문 공개를 강력히 요구하는 있는 상황”이라며 전문 공개 이유를 밝혔다.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대통령기록물이 아닌 공공기록물로 간주, 법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남재준 국정원장이 6월 25일 국회 정보위 전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
국정원은 6월 20일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 등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에게 회의록 발췌본의 열람을 허용했을 때도 ‘공공기록물 관리법’을 근거로 제시했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취지 발언과 관련한 사건에서 국정원 보관본에 대해 ‘공공기록물’로 해석했다는 점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국정원이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위반했다”며 강력 반발했다. 한국기록학회·한국기록관리학회·한국기록관리학전공주임교수협의회·한국기록전문가협회·한국국가기록연구원과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역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발췌본을 제작해 검찰에 제출하고, 국회에 공개한 국정원과 이를 열람한 검찰, 언론에 회의록을 공표한 국회의원 모두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의 성격을 놓고 국정원과 야당, 학회의 입장이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보관하게 된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부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당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의 정상회담 회의록 2부를 만들어 한 부는 대통령기록관에, 한 부는 국정원에 보관했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국정원 직원은 배석하지 않았으며, 대신 조명균 청와대 외교안보정책조정비서관이 배석해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단독회담 내용을 메모하고, 휴대용 녹음기로 녹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민주당 문재인 의원에 따르면 청와대 국정기록비서관실에서 녹취를 위해 들어보니 녹음상태가 좋지 않아, 잡음 제거 등의 장비와 기술을 갖춘 국정원에 녹음파일 등을 넘겨 회의록 원본이 작성됐다. 국정원은 종이문서로 된 회의록을 청와대로 보냈고, 국정원도 회의록 1부를 별도로 보관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하면서 청와대에 있던 회의록은 국가기록원으로 보내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원에 있는 회의록은 다음 대통령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국정원이 계속 보관하도록 했다.
“대통령기록물 비밀해제·무단 공개는 불법”
현행 법(대통령기록물법)상 다음 대통령이 대통령기록물을 열람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므로 추후 남북정상회담에 임할 때 회의록을 참고해 전략을 짜도록 하라는 배려였다.
작성 당시 회의록은 1급 기밀문서였다. 하지만 회의록은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3월 2급 비밀로 보안단계가 하향 조정됐다. 이와 관련, 국정원 관계자는 “1급 문서의 경우 공개하면 전쟁 또는 외교관계 단절로 이어질 수 있는 기밀문서”라며 “국정원은 당초 회의록이 1급으로 잘못 분류돼서 이를 바로잡았다”고 말했다. 이는 추가 하향 조정의 빌미가 됐다. 결국 남재준 국정원장은 이를 다시 일반문서로 분류한 뒤 공개했다. 결과적으로 회의록 비밀해제와 공개는 이명박·박근혜 정부에 걸쳐 이어진 ‘합작품’인 셈이다.
새누리당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오른쪽)와 민주당 정성호 원내수석부대표(가운데)가 6월 26일 국회 의안과에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요구서’를 제출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국정원은 정상회담 회의록이 국정원에서 작성된 만큼 공공기록물로 봐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야당과 전문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국정원이 보관 중인 회의록도 국가기록원에 있는 원본과 같이 1급 기밀문서인 ‘대통령 지정기록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한국기록연구원 김익한 원장은 “대통령기록물의 요건은 대통령의 직무 수행과 관련해서 만들어진 기록인 동시에 기록물을 생산 및 접수한 주체가 대통령이나 대통령 보좌 및 자문기관”이라며 “정상회담 회의록을 국정원이 작성했더라도 공공기록물이 아닌 대통령지정기록물로 관리됐어야 한다”고 말했다.
대통령기록물법에 따르면 대통령기록물은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 의결이 있거나, 관할 고등법원장이 발부한 영장이 제시될 경우에만 열람이 가능하다. 대통령 기록물의 경우 일반적으로 30년간 외부 공개가 금지된다. 국정원이 대통령기록물을 일방적으로 비밀해제하고, 무단으로 일반에 공개한 것은 불법이라는 지적이다.
민주당이 “국정원의 총성 없는 쿠데타” “제2의 국기문란 사건”이라고 비난한 것도 이 때문이다.
민주당 “청와대·새누리당·국정원 공모했다”
더군다나 국가 정보기관이 국가기밀을 지키키는커녕 스스로 나서서 공개하면서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한국에서는 정보기관이 누설자(leaker)다”라며 비꼬았다.
국정원이 회의록 공개로 정치적 중립성을 스스로 훼손했다는 비판도 있다. 국정원은 국가안보와 국민 생존권을 수호하는 보루이며, 이를 위해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을 존립 근거로 하고 있다. 음지에서 일해야 할 국정원은 회의록 공개와 함께 느닷없이 양지로 나와 여야 정쟁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 이진한 중앙 2차장검사가 6월 14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국가정보원 대선·정치개입 의혹’ 사건과 관련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김기남 기자
국정원이 이처럼 위험한 도박을 불사한 배경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민주당은 검찰 수사 결과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코너에 몰린 청와대·새누리당·국정원이 정치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면 전환을 시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국정원은 지난 대선에서 대북심리전을 구실로 인터넷 댓글을 활용해 여론조작에 가담했다는 것이 최근 검찰 수사 결과로 밝혀지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수장이었던 원세훈 전 원장은 기소됐고,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까지 훼손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로 일부 정치인과 시민단체에서는 지난 대선이 무효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 압박도 거세졌다. 국정원의 위기였고, 박근혜 대통령의 위기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정원이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라는 카드를 꺼낸 것이다. 친이계의 한 인사는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으로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성과 박근혜 정권의 정통성이 크게 훼손됐다”며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기간에 국정원으로부터 지원받은 바 없다고 했지만, 이번 사태의 반전을 위해 청와대가 회의록 공개에 최소한 암묵적으로라도 동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회의록 공개가 청와대나 여당과 사전조율 없이 남재준 원장의 단독 플레이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일각서는 남재준 원장 단독 플레이에 무게
남 원장을 알고 있는 한 인사는 “남재준 원장은 국정원에 대한 선거법 위반 수사 등 일련의 과정을 여야 정쟁의 산물로 보고 있었다”며 “남 원장은 마지막 남은 정쟁거리인 NLL문제를 끊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날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인사는 “남 원장 입장에서는 여당인 새누리당도 정치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회의록을 공개함으로써 온몸으로 정치권의 공격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 원장이 국회 정보위에서 “야당이 자꾸 공격하고 왜곡됐다고 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밝힌 것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국정원과 여권의 의도와는 달리 회의록 공개 파문은 갈수록 커져가는 양상이다. 새누리당과 국정원이 회의록의 유출·입수과정에서 조직적으로 공조한 정황도 드러나고 있다.
지난 대선 당시 권영세 새누리당 선거대책위 종합상황실장(현재 주중대사)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했고, 집권한 뒤 이를 공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녹취록이 민주당에 의해 공개됐다.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회 총괄본부장을 맡았던 김무성 의원도 대선 당시 회의록 원문을 불법 입수해 읽어봤다는 논란에 휘말렸다.
노무현재단 이병완 이사장과 문성근, 이재정 이사, 천호선 상임운영위원 등이 6월 27일 재단 사무실에서 남북정상회담 왜곡·날조 규탄 긴급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김영민 기자
김 의원은 “정문헌 의원이 말해준 내용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종합해 만든 문건을 본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김 의원은 당시 대선 유세 중 ‘(미국에 대한) 저항감도 갖고 있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소개했는데 ‘저항감도 갖고 있다’는 부분은 국정원이 새누리당 정보위원들에게 열람시킨 회의록 발췌본에는 들어 있지 않고 전문에만 담겨 있는 말이어서 전문을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표현이다.
이번 사태로 국정원의 정치개입 금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비등해지면서 개혁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민주당 최재천 의원은 “박근혜 정권 등 역대 정권은 국정원의 정보를 정치에 활용함으로써 그동안 많은 후유증을 양산했다”며 “우리도 독일처럼 국회 정보위를 확대해서 사생활 침해·정보 통제·예산 심사 등 각 분야에서 철저하게 국정원을 통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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