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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화백과사전 (검색어) "발해" 글에서 [건국과 성쇠] 중 "2.발전, 3.내분, 4.융성" 내용을 가져왔음.

발해의 발전, 내분, 융성

발해의 [건국과 성쇠] 1. 건국 http://tadream.tistory.com/6937

2. 발전, 3. 내분, 4. 융성  http://tadream.tistory.com/6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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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해의 발전

발해의 발전은 2대 무왕(武王, 719~737)과 3대 문왕(文王, 737~793) 때에 이루어졌다. 무왕 대무예는 즉위 후에 인안(仁安)이란 연호를 선포하였으니,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은 발해 멸망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왕의 통치기에 동모산에서 현주(顯州, 현재의 지린성 和龍)로 도읍을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정복군주라는 사실이다. 그가 즉위한 뒤에 영토 확장에 힘을 기울여 발해 영토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와 부여의 땅을 상당수 회복했음을 선언했다. 또 북쪽과 동쪽의 말갈 땅도 복속시켰으며, 남쪽의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으로도 진출하여 신라의 경계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의 활발한 정복 활동은 필연적으로 주변국과의 마찰을 야기했고, 마침내 발해가 당나라와 대결하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지금의 흑룡강(黑龍江,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 살던 흑수말갈은 발해 세력이 자신에게 점차 다가오는 데에 불안을 느끼자 독자적으로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를 견제하려 했다. 당나라는 이를 호기로 삼아서 726년에 흑수주도독부를 설치하고 감독관을 파견했다. 무왕은 이런 조치가 당나라와 흑수말갈이 앞뒤에서 협격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하였고, 727년 일본에 사신을 처음 파견하여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고립을 타개하고자 했다. 이로써 발해는 돌궐, 거란, 일본과 연합하고, 당나라는 신라, 흑수말갈과 연합하는 동아시아 세력 판도가 형성되었다.
 
이런 와중에 무왕은 동생 대문예(大門藝)와 장인 임아(任雅)를 보내 흑수말갈을 치게 했다. 그러나 동생은 당나라에 숙위했던 경험이 있어 당나라에 대적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 수차례 간언하다가 결국 무왕의 분노를 샀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했고, 그의 송환을 둘러싸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일었다. 그러던 차에 무왕은 732년 9월에 발해 장군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는 거란과 연합하여 하북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당나라는 군사를 보내 이를 격퇴하는 한편,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 남쪽을 공격하게 했다. 신라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쟁이 종식된 뒤인 735년에 신라는 그 공로로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발해도 735년에 당나라에 사죄하는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양국 간의 국교가 복원되었다.
 
무왕이 사망하고 문왕이 즉위한 뒤에는 정복전쟁을 통하여 외부로 발산하던 국력을 내부로 수렴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57년간이나 재위한 그는 시호에서 보듯이 문치(文治)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흥(大興)이란 연호를 택했다가 774년에는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다. 신라와의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가 그의 통치 전반기에 설치된 듯하다. 또 즉위한 직후에 당나라로부터 국가 의례를 정한 개원례(開元禮) 및 역사서를 수입하는 등 국가 문물제도의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건국 초기에 고구려 제도를 많이 따랐던 모습이 사라지고, 당나라 제도가 새로운 표준이 되었다.
 
중앙행정기구와 중앙군대, 관리의 등급제도와 복장제도를 마련했다. 지방에는 부(경)-주-현의 3단계 행정체계가 갖추어졌다. 전국에 5경을 둔 것은 당나라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수도를 중앙이 아닌 북쪽에 둔 것이나 네 번 수도를 옮긴 것에서는 독자적인 면이 엿보인다.
 
문왕은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고 황제국을 지향했다. 그의 존호에 금륜(金輪)이란 단어가 보이는 것은 전자의 증거이고, 황상(皇上), 황후(皇后) 칭호나 조고(詔誥) 용어 등이 사용된 것은 후자의 증거이다. 국력 신장에 따라 당나라는 762년에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승격하여 책봉했다. 명목적인 것이지만, 이때에 비로소 독립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이런 자신감을 토대로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이 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양국의 관계를 구생관계(舅甥關係, 장인과 사위)로 설정하여 일본의 반발을 샀다.
 
그의 시대에는 천도가 잦았다. 당나라에서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직후인 756년 초에 현주에서 상경(上京, 현재의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으로 천도했고, 780년대 후반에 동경(東京, 현재의 중국 지린성 琿春)으로 천도했으며, 그의 사망 직후에 상경으로 되돌아왔다.
 
3. 발해의 내분
 
문왕이 장기간 통치를 한 뒤에 사망하자, 발해는 그 후유증을 앓았다. 동궁이 먼저 사망하여 친척인 대원의(大元義)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의 성격이 포악하여 죽임을 당했다. 이로부터 6명의 왕이 25년 사이에 교체되었으니, 이것은 발해 내부에서 정치적 분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5대 성왕(成王)은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 그의 연호처럼 중흥(中興)을 꾀했지만 곧 사망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6대 강왕(康王) 때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798년 발해 국서에서는 “교화를 따르는 부지런한 마음은 고씨에게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다”고 언명했다.
 
4. 발해의 융성
 
818년 10대 선왕(宣王, 818~830)이 즉위하자 내분이 진정되면서 발해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의 시대에 침체기를 벗어나 중흥을 이룩했다.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삼은 선왕은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이로부터 왕의 계보가 바뀌었다.
 
그는 정복활동을 통하여 영토를 넓혔으니,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해 영토를 크게 여는 데에 공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발해는 흑룡강(黑龍江) 유역까지 경략하여 흑수말갈을 통제하기에 이르렀다. 또 남쪽으로 요동지방과 대동강 방면으로도 진출했다. 이로써 발해의 정복활동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 처음에 ‘사방 2천리’였던 영토가 이 무렵에 ‘사방 5천리’로 크게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사방의 경계가 확정되었고, 5경, 15부, 62주가 완비되었다.
 
대외관계도 안정되어 재위 12년간 일본에 다섯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여 어느 때보다도 빈번하였으며, 교류 성격도 더욱 더 상업적으로 변모했다. 이 무렵에 일본이 교류에 소극적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11대 왕 대이진(大彛震, 831~857)이 즉위한 뒤에는 관제를 크게 개편하여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120사(司)를 두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왕권이 재차 강화되면서 융성기를 맞이했고,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이 융성기에 당나라와 신라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해동성국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제11대 왕부터 마지막 왕까지의 시호가 전하지 않고, 제13대 왕과 제14대 왕의 사망 연도조차 알 수 없다. 또 9세기 후반 이후 발해 국왕의 계승 관계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872년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서 신라 유학생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고, 897년에는 발해 왕자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한 쟁장사건(爭長事件)이 벌어져, 신라를 능가했던 발해의 국력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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