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rus-vladivostok.mofat.go.kr/webmodule/htsboard/template/read/korboardread.jsp?typeID=15&boardid=2416&seqno=629140

빠르띠잔스끄 발해유적

빠르띠잔스끄는 과거에 수찬, 수청, 소성으로 불리다가, 1972년에 고쳐진 이름이다. 과거 내전 시기에 적색 유격대가 이곳의 험준한 산악에 의지하여 용감히 싸운 사실이 있어 이를 기념하여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1918년에서 20년 사이에 유격대 활동을 하였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로서는 한창걸, 최영, 신우여 등 여러 사람들이 있다.

빠르띠잔스끄(빨찌산) 구역에는 중요한 유적으로 샤이긴(Shaigin) 성터와 니꼴라예프카(Nikolaevka) 성터가 있다. 샤이긴은 산성으로서 이 구역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니꼴라예프까는 평지성으로서 그 다음으로 크다. 둘 다 여진시기의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고 있어 금나라 때에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들은 앞 시대의 것을 계승하여 사용하게 마련이어서 발해 때에 처음 축소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곳이다.

성터가 있는 니꼴라예프까 마을은 빠르띠잔스끄 시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 이름은 이곳에 살던 공심이라는 조선인 큰 부자의 소련식 이름 니꼴라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성의 전체 모습은 사다리꼴에 가까운데 남쪽은 좁고 북벽은 역간 넓다. 둘레는 약 2km이고 성 안의 전체 면적은 대략 7,000m²가 된다. 여름에 이곳을 오게 되면 그 옛날 사람들이 그득하였을 성 안의 너른 평지에는 옥수수가 무성히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성터 북쪽으로 빠르띠잔스크 강이 흐르고, 기차 길이 동소로 성을 관통하며 지나고 있다.성벽은 흙으로 쌓았는데 높이가 10m나 되었고, 성벽의 기초 너비는 20 ~ 25m나 된다. 놀라운 것은 성 밖에 해자가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이다. 해자란 외부로부터의 적을 방어하기 위해 성벽 밖을 따라 못을 만들어 놓은 것을 말한다. 백제 초기 도성지인 서울의 몽촌토성 둘레에 물을 담아 놓은 시설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몽촌토성의 해자는 이미 메워져버린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최근에 발굴을 통하여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니꼴라예프카 성터에는 해자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해자에 물이 담겨져 있다. 여름에는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5월 초 때엔 동문 밖에 흐르는 해자가 아주 뚜렷하게 드러난다.

성문 자리가 동쪽 벽과 서쪽 벽에 하나씩 남아 있었는데, 문을 보호하기 위해 에워싼 옹성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성문은 적이 공격해올 때에 일차적인 표적이 되는 곳이기 때문에 이를 보호하기 위하여 성벽을 이중으로 설치하는데 이것이 바로 옹성이다. 옹성은 보통 반원형 또는 사각형으로서, 이 성은 반원형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설치되면 성 안으로 들어가는 길이 직선적이지 않고 S자 모양으로 휘게 되어 적이 쉽게 접근할 수 없게 된다. 비록 시기와 재료는 다르지만 서울의 동대문을 둥그렇게 에워싸고 있는 성벽이 그러한 것이다. 니꼴라예프까 성터는 이와 같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서쪽 문에서 시작하여 성벽의 정상을 따라 동쪽 문까지 걸어가면 성 벽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열두 곳에 치가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치라고 하는 것은 성벽에 바짝 붙은 적을 옆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밖으로 성벽의 일부를 내밀게 쌓은 시설을 가리킨다. 활을 쏠 수 있는 거리마다 일정하게 치를 만들어 놓았으니, 성 벽 곳곳에  낙타등처럼 밖으로 불쑥불쑥 나와 있다.

이 성터에 대해서는 이미 1871년부터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1950년대 후반에 샤프꾸누프가 조사한 바 있고, 60년대에 들어 여러 번 발굴되었다. 이곳은 과거에 일본의 와타 키요시, 중국의 왕청리가 발해 15부의 하나였던 정리부의 소재지로 추정하였던 곳이다. 서문 가까이에 금나라 때의 절터가 장방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이 성이 발해 때에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최근에 발견된 유물 하나가 그러한 사실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청동으로 만든 부절이다. 몇 년 전에 현지의 학생들이 성 안에서 우연히 주운 것으로 지금은 샤프꾸노프의 연구실 금고 속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소비에뜨 고고학>> 89년 1호에 이 부절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부절이란 불건 하나를 두 조각으로 나누어 두 사람이 각각 가지고 있다가 훗날 서로 맞추러 증거로 감는 물건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발견된 것은 두 쪽의 부절 중에서 왼쪽 부분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옆에 ‘합동’이란 한자의 왼쪽 절반 부분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아마 다른 한 쪽은 중앙 정부에서 보관하고 있었을 것이니, 만일 이들 두 부절을 합치면 ‘합동’이라는 완벽한 글자가 될 것이다. 크기는 길이 5.6cm, 최대 너비 1.8cm, 두께 0.5cm로서 아주 작다. 부절의 한쪽 면은 둥그렇게 만들어져 물고기 모양이 조각되어 있고, 다른 면은 다른 부절과 합치될 수 있도록 평평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런데 이곳에 새겨져 있는 한자가 이 부절이 발해의 것이라는 것을 증언해주고 있다. 위쪽에 ‘동’이한 글자가 크고 깊게 새겨져 있고, 아래쪽에는 세로로 ‘좌효위장군 섭리계’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좌효위장군이란 당나라와 발해에서 사용되던 관직이고, 이름 끝에 ‘계’자가 붙는 것은 발해인 중에서 말갈 계통 사람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이름이다. 문헌 기록에 보이는 가루계, 발시계, 미발계, 공백계 등등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섭리계란 사람은 말갈 출신으로 발해 장군을 역임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언젠가 이 성으로 부임해 와서 발해변방을 경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중앙으로부터 사자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가지고 온 부절과 자신의 부절을 서로 맞춘 뒤 군사를 동원하여 발해와 대적해 있던 족속들을 정벌하러 갔을 것이다. 지금 발견된 부절은 그때 소지하였다가 크기가 작아서 분실하였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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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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