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와 문재인이 싸우는 '전선'
‘색깔론’의 지형도를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한윤형 기자  |  a_hriman@hotmail.com  입력 2013.07.01  10:56:50

"이번 사태의 본질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김정일 앞에서 NLL을 사실상 포기하는 발언을 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 정치적 책임을 누구에게 어떤 방식으로 물어야 하고, 이 사태를 통해 우리 대통령과 정치권은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조선일보 6월 29일자 사설의 일부다. 그들의 사태인식에 따르면 일국의 정보기관이 이적단체에 대한 심리전을 핑계로 국내 시민을 상대로 여론조작을 한 것도 사태의 본질이 아니고, 그런 의혹이 제기되어도 경찰 수사에서 밝혀질 것이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 지난 6월 29일자 조선일보 사설

'사태의 본질'에 맞선 문재인  

백번 양보해 국정원 여론조작 의혹과 ‘NLL 대화록’ 문제를 별개로 바라본다 하더라도 그렇다. 그들은 중앙일보조차 제기하고 있는 논점, 정보기관이 최소한의 절차도 밟지 않고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으로 정상회담 회의록 내용을 공개해버린 사태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문제제기도 하고 있지 않다. 물론 조선일보에게는 이것조차도 ‘이번 사태의 본질’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민주당 문재인 의원이 30일에 발표한 <새누리당에 제안합니다>라는 성명이 정확하게 조선일보가 ‘이번 사태의 본질’이라 보는 그 전선에서 맞서고 있다는 것이다. 문재인 의원은 성명에서 "국가기록원에 있는 기록을 열람해서 NLL 포기 논란을 둘러싼 혼란과 국론 분열을 끝내자"면서 "기록 열람 결과, 만약 NLL 재획정 문제와 공동어로구역에 관한 노대통령과 참여정부의 입장이 북한과 같은 것이었다고 드러나면, 제가 사과를 물론 정치를 그만두는 것으로 책임을 지겠다"고 제안했다.  
 
문 의원의 제안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결코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NLL 포기’ 발언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담고 있고, 만일 그랬다면 문 의원이 정계은퇴로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며, 이 사태에 대한 오해를 풀고 새누리당도 10·4 정상선언을 계승하고 이행해야 한다는 요구로 나아간다. 조선일보가 정리한 세 가지 ‘본질적 논점’에 대한 문 의원 나름의 반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문 의원의 억울함이야 충분히 이해가 간다. 너무 뻔한 사실에 대한 과장과 왜곡, 우기기가 반복되는 현실이 참담했을 것이다. "NLL 포기 논란은 10·4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공동어로구역의 위치와 범위가 특정되지 않은 탓에 벌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해석과 "따라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공동어로구역의 위치와 범위를 어떻게 계획하고, 어떻게 북측에 요구했는지를 확인하면 논란을 끝낼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NLL 아래로만 공동어로구역을 상정했다면 ‘NLL 포기’라 볼 수도 있겠지만, NLL 위아래로 모두 공동어로구역을 상정하는데 그게 어떻게 ‘NLL 포기’냐는 물음이며 나름대로 정당한 항변에 해당한다. 새누리당에서 배출한 대통령이 이런 제안을 내걸었을 때라도 이를 ‘NLL 포기‘라고 불렀을 지를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 보수성향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6월 28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민주당 당사 앞에서 '문재인 의원 사죄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회원들은 문재인 의원의 'NLL' 발언에 대해 매국행위라 규정하고 이를 규탄했다. (뉴스1)

원본을 확인하면 판단과 승복이 가능할까 

그러나 문재인 의원의 항변은 국가기록원 대화록 원본을 확인하지 않고도 이미 가능하다. 새누리당과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은 ‘NLL 포기’ 문제를 “기존의 NLL을 조금도 건들지 않는 것”이라는 황당한 방식으로 재조합했다. 발췌록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나’를 ‘저’라 고치고 ‘위원장’을 ‘위원장님’으로 바꾸는 등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저자세였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왜곡된 의지가 엿보인다. 또한 국가기록원 대화록 원본은 국회의원 재적의원의 3분의 2가 찬성을 통해 열람만 가능할 뿐 공개가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새누리당 측이 정치적으로 승복하지 않으면 그만일 뿐이다.  

이는 참담한 일이며 개탄할 만한 현실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원문 공개’와 같은 방식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대화록 원본을 보고 문 의원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납득할 사람들이라면 이미 조선일보와 새누리당의 주장에 코방귀를 뀌고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조선일보가 생각하는 이번 사태의 본질’이 놓치거나 생략하는 다양한 문맥들을 다시 부각시키는 일이며 그들의 전선에서 정면대응하는 것은 다른 중요한 논점들을 놓칠 우려가 있는 위험한 길이다.  

문재인 의원의 행동이 민주당 측과 충분히 조율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다. 물론 국회의원은 개개인이 모두 헌법기관이며 비록 당론이 존재하더라도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내에서 대선 후보까지 지낸 중량감 있는 정치인에게 현재의 정국과 당의 상황을 좀 더 고려해주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  

SBS 라디오 <서두원의 시사초점>에 나온 민주당 진선미 의원은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문재인 의원의 성명이 “정말 이 사건이 가지고 있는 서글픈 부분들에 대해서 너무나 깊게 공분하고 계시기 때문”에 나왔다고 생각하지만, 대화록 공개 문제에 대해서는 국가안보나 외교문제까지 고려해서 조금 더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진실'과 '거짓'의 싸움을 넘어서  

▲ 문재인 민주당 의원이 지난 6월 28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일보 본사를 방문해 벽에 붙은 대자보에 노동조합원을 격려하는 글을 적고 있다. 문 의원은 이날 '한국일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지지합니다. 존경합니다.'라는 글을 남겼다. (뉴스1)

비록 국정조사가 합의되기는 했지만 민주당의 입장에서도 첩첩산중(疊疊山中)인 상황이다. 작정하고 사건을 뭉개려는 정치세력에 대항해서 사태의 일각이라도 밝혀내기 위해서는, 매 상황마다 정치적 공세의 내용과 우선순위를 신중하게 조율할 필요가 있다.  

‘색깔론’에 정면 대응하며 진실을 밝히려는 문재인 의원의 욕망은 순수한 것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정치적으로는 순진해 보이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정치적 논쟁을 ‘진실’과 ‘거짓’의 전선에서 사유하면, 조선일보나 새누리당과 본인들이 ‘진실’이라고 우기는 한 절반의 싸움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문재인이 ‘진실’이며 조선일보가 ‘거짓’이라고 주장하기 보다는, 진실과 거짓의 투쟁에서 생략되고 은폐되는 여러 가지 제도적 문제와 절차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일 게다. 그것이 오히려 “조선일보가 생각하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벗어나 ‘색깔론’의 지형도를 탈출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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