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특구·공동어로 했으면 북한이 연평도 포격 못했다
[다시 본 남북정상회의록] 언제까지 젊은이들 피와 죽음으로 NLL 지킬 건가
13.07.02 10:54 l 최종 업데이트 13.07.02 11:45 l 고정미(yeandu) 안홍기(anongi)

2012년 대통령 선거 때로 되돌아가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민주당 후보에 치명타를 입히기 위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측이 준비한 '비수'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노무현 NLL 포기 발언설'이었다. 

대선이 끝난 지 반년이 넘은 시점, 인터넷 댓글 공작 혐의가 드러나 대선개입설에 휘말린 국가정보원은 마치 '우리가 필사적으로 종북 대통령 당선을 막아내지 않았느냐'는 듯이 실정법 위반 논란을 무릅쓰고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 대선에 쓰였던 'NLL 포기 발언설'이란 비수가 국정원의 위기를 타개하는 용도로 또 한 번 휘둘러진 것이다. 

그러나 비수인줄 알고 휘두른 게 영 무디다. 회의록 전문을 아무리 봐도 노 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다시 긋는다든지, 북한군이 마음대로 NLL을 넘게 하겠다든지 하는 발언이 없다. 회의록 공개 뒤 5일 뒤인 지난달 30일 <내일신문>과 디오피니언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노 전 대통령의 발언은 NLL 포기가 아니라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치를 협의한 것'이라는 응답이 54.9%, 'NLL포기라는 단어가 없지만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응답이 33.8%였다(전국 19세 이상 성인남녀 800명 휴대전화 RDD 조사. 표몬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5%포인트, 응답률 20.1%).

박근혜 "NLL, 젊은이들 피·죽음으로 지킨 곳"... 언제까지 그렇게 지킬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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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월 25일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그는 이날 "우리의 NLL, 북방한계선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키고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 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우리의 NLL 북방한계선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키고,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국정원의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를 두둔했지만,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NLL'을 만들기 위한 대책을 내놓고 하는 말은 아니다. 

반면, 공개된 회의록에선 남북이 사이좋게 고기잡이를 하고 남북의 군함이 서로 포를 쏘던 해역을 평화의 바다로 만들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설득하는데쏟은 노력이 엿보인다. 'NLL 포기발언설'로 악용되는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을 들여다 보면, 이 구상의 목적이 북한에 NLL을 넘겨주는 게 목적이 아닌 '더 이상 피를 부르지 않는 NLL'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2004년 남북 함정 무선교신에도 충돌 가능성 남아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 서해에서 남북간 군사충돌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서해를 평화의 바다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단언했다. 

지난 1999년 6월 15일 1차 연평해전 뒤 북한이 NLL 남쪽으로 '서해 5도'를 고립시키다시피 하는 해상군사분계선을 발표했다.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11조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는 내용을 위배한 조치였다. 다시 2002년 6월 2차 연평해전이 일어났다. 

2004년 6월 14일 남북의 해군함정들이 NLL 인근해상에서 처음으로 직접 무선교신을 했다. 제2차 남북장성급회담에서 합의한 '서해상의 우발적 무력충돌 방지안'과 이를 이행하기 위한 '남북 부속합의서'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에서 노 전 대통령도 "이행은 좀 잘 안 되고 있지만…"이라고 말했듯 군사 충돌의 가능성은 여전했다. 

'뭔가 확실한 대책'이 바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이었다. 서해 공동어로와 같은 안들은 낮은 급의 남북회담 과정에서 논의된 적이 있지만 지지부진하다가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급진전됐다. 

10·4선언에 포함된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민간 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관련 대부분의 정상간 합의들은 이후에 일정한 진척을 이뤘다. 이어진 총리회담을 통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추진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위원회에서 시행에 필요한 세부합의를 이뤄나갔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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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2007.12.13)에서 남과 북이 각각 제시한 공동어로구역으로 추정되는 지역. ⓒ 고정미

공동어로구역 끝내 합의 못한 채 정권 교체... 서해는 다시 화약고

그런데 지독하게 진척이 없었던 게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부분이었다. 'NLL 남쪽에 만들자'는 북측 입장과 'NLL 위에 그려야 한다'는 남측 입장이 이후의 국방장관·장성·실무급 회담에서도 전혀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것이다. 2007년 11월 27~29일 평양에서 열린 남북국방장관회담에는 남측의 김장수 국방부 장관과 북측의 김일철 인민부력부장은 공동어로구역·평화수역을 설정하는 데에 합의하지 못하고 장성급군사회담으로 논의를 미뤘다. 

2007년 12월 13일 판문점 남측지역 '평화의 집'에서 열린 7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2007.12.13)은 '몸싸움'으로 화제가 됐다. 기자들에게 공개된 전체회의 모두발언 부분에서 북측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공동어로구역을 표시한 지도를 빔프로젝터로 띄웠다가 남측 대표단이 빔프로젝터를 손으로 막는 등 제지하고 나선 것. 

이후 비공개로 진행된 회담에서 남측이 제시한 공동어로구역은 백령도 북쪽, 대청도 동쪽, 소청도와 기린도 사이, 기린도와 등산곶 사이 등 4군데였다. 북측은 NLL 남쪽으로 소청도와 연평도 사이 4곳에 설정하자는 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실무군사회담에서도 합의는 없었고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북한이 먼저 비핵화를 하면, 1인당 소득 3000달러를 만들어주겠다'는 '비핵개방3000'을 대북정책이라고 내세운 이명박 정부 하에선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합의는 존중받지 못했다. 남북 공동어로는 고사하고 남북 군함이 서해상에서 무선으로 교신을 주고 받던 것도 없던 일이 돼 버렸다. 

서해는 다시 화약고가 됐다. 2009년 11월 10일 대청해전에 이어 2010년 3월 26일 백령도 남방 2.5km 지점에서 해군 천안함이 북한이 쏜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같은 해 11월 23일 북한군이 연평도를 포격했다.  

"해주 특구, 공동어로 됐으면 연평도에 포 못 쐈다"

남북정상회담 당시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전략비서관이었던 박선원 전 비서관은 "해주특구가 추진됐고 서해 공동어로가 이뤄졌다면 북한이 연평도에 포를 쏠 수 있었겠느냐"고 반문한다. 

연평도를 포격한 북한 군 포진지는 연평도에서 북서쪽으로 12km가량 떨어진 개머리해안과 무도에 있다. 76.2mm 평사포, 122mm 대구경 포, 130mm 대구경 포 등이 연평도를 타격했다. 북한 황해도 강녕군 지역에는 사곶과 해주, 옹진반도, 개머리, 무도 등에 주요기지가 있다. 지난 2009년 북한군은 서해 전방 지역에 황해도 주둔 4군단과 별도로 NLL 일대에 관한 임무를 전담하는 '서남전선사령부'를 신설하기도 했다. 

북한 서해 함대가 보유하고 있는 13척의 잠수함과 362척의 함정 상당수가 사곶과 해주기지에 전진배치돼 있는 걸로 추정된다.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보면, 회담 초반 김정일 위원장은 "해주는 군사적으로 개미 한 마리도 못 들어오는 곳"이라며 "해주를 열면 우리가 덕 볼 게 뭐있나"라고 해주특구 개발 제안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 위원장은 결국 회담 말미에 남측 제안에 동의, 결국 공동선언문에 해주특구와 민간선박의 해주 직항로 개설이 명문화됐다. 

김 위원장이 회담 초반 부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해주특구 개발이 시작되면 해주와 주변의 군사기지를 이전해야 하는 부담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정상회담에 배석한 이재정 전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시점에 해주에서 군대를 물리는 것은 김 위원장이라 해도 군부를 설득하기 어려웠던 입장 같다"며 "그러나 군부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하고 대단한 결심을 하고 대단한 양보를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해주 특구뿐 아니라 서해 공동어로가 현실화 됐다면 서해 5도를 향해 포문을 열고 있는 북한군 기지 상당수가 현 위치를 고수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박선원 전 비서관은 "해주특구가 추진되고 공동어로까지 현실화됐다면 남쪽을 겨냥한 황해도 포대 앞으로 민간선박들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니, 무용지물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개성공단 사업이 시작되면서 개성에 주둔했던 북한군 주력 부대가 1, 2개 사단이 10~15km 후퇴하고, 금강산관광 때문에 장전항에 있던 북한군 해군기지가 수십km 북쪽으로 이동시킨 일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구가 추진됐다면 해주와 황해도 해안에 있는 기지에도 일어났을 거란 얘기다. 

"정상회담 1년만 빨리 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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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 남북정상회담 마지막날인 10월 4일 오후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평양 백화원 초대소에서 환송오찬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작별인사를 받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그러나 임기를 넉 달 밖에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진 남북정상합의는 실현되기 어려웠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안 중 공동어로수역을 어디에 조성하느냐도 합의가 어려웠지만 합의가 됐다 해도 뒤 이은 이명박 정부가 이 합의를 이행했으리라 보기는 힘들다. 

국가안전보장회의 국장을 지낸 김창수 코리아연구원 연구실장은 "남북정상회담을 1년 정도 빨리 했더라면 더 많은 걸 이뤄낼 수 있었다"며 "성과를 내서 (이후 정부가) 부정할 수 없도록 하든지, 계승하도록 만들든지"라고 소회했다. 공동어로나 해주특구 사업을 일단 시작했더라면 이후 누가 집권하든 정책의 연속성을 만들어갈 수 있지 않았겠냐는 것.

김 실장은 "노무현 대통령 집권 전반기에 정상회담 타이밍을 한번 놓쳤고 이후엔 미국의 부시 행정부를 설득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었다"며 "2005년에 6자회담에서 9·19 성명이 나왔고, 그게 이행됐다면 그때도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수 있었는데 미국의 방코델타아시아은행 북한 계좌 제재로 경색국면이 와서 어려워졌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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