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news.v.daum.net/v/20200611150333047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의 고구려인 (1)
[고구려사 명장면 98]
임기환 입력 2020.06.11. 15:03
2008년 1월 필자는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타슈켄트 공항까지 7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비행 시간을 생각하니 내가 지금 매우 먼 곳을 향하고 있음을 문득 실감했다. 타슈켄트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옛 도시 사마르칸트로 향했다. 4시간 정도 걸렸다. 우리로 따지자면 고속국도쯤에 해당하는 길을 달리는데 길 양쪽으로 심어져 있는 가로수가 뽕나무였다. 지금 가는 길이 이른바 '실크로드'임을 깨달았다.
과거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십자로라고 불릴 정도로 교통 중심지였다. 또한 사마르칸트는 티무르 제국 수도였이기도 했다. 티무르라는 인물은 스스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면서 1369년에 나라를 세우고 서쪽으로 지중해까지, 남으로 인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다스린 티무르 제국을 건설했다.
사마르칸트 시가지에서 동북쪽을 보면 언덕이 솟아 있는데 '아프라시압(Afrasiab)'이라고 부른다. 이 언덕에 올라서면 코발트색으로 빛나는 모스크가 마치 빌딩 숲처럼 이어져 있는 옛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사마르칸트에는 티무르 제국 수도답게 이슬람 건축의 걸작이라 불리는 수많은 유적이 가득하다.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와 그의 가족 무덤인 구이 에미르, 티무르가 왕비 비비하눔을 위해 지었다는 모스크, 이슬람 사원이 밀집한 레기스탄 광장 등.
이들 화려한 유적을 뒤로하고 폐허가 된 아프라시압 언덕으로 먼저 향했다. 필자가 사마르칸트에 온 목적이 바로 그곳 아프라시압 옛 궁전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왕궁의 어느 방에 그려진 벽화의 한 귀퉁이에 고구려 사신 모습이 남아 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이다.
1965년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언덕에서는 한창 고속도로 건설 공사 중이었다. 불도저가 땅을 파헤치다가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던 옛 소그드 왕국 궁전을 발견하였다. 그중 소그드 왕궁 접견실, 말하자면 손님을 맞이하는 가로세로 11m 작은 방에서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채로 빛나는 벽화가 드러났다. 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세계 고고학과 미술사학계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아프라시압 궁전 상상도
아프라시압 박물관에 전시된 이 벽화는 지금은 많이 희미해져 있고, 과거의 화려함을 드러내기에도 많이 퇴색해 있었다. 하지만 역사 연구자란 현재 모습만이 아니라 그 속에서 실마리를 찾아 과거 모습을 복원하는 상상력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그 먼 길을 달려온 기대감과 호기심을 채우기에는 충분했다.
벽화는 동쪽 출입문 주변은 물론 서쪽과 남북 모두에 빼곡히 그려져 있다. 왕실 행렬, 각국 사절, 사냥과 뱃놀이, 강에서 활을 쏘는 사람과 물고기 그림 등이 보인다. 서쪽 벽은 아마도 소그드 왕이 앉아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데, 그 오른쪽 아래 단에는 두 개의 새 깃털을 꽂은 모자, 즉 조우관을 쓰고 허리에는 고리칼을 차고 옷소매에 두 손을 넣고 단정히 서 있는 두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아프라시압 벽화 고구려 사신(우측) 부분
우리에게는 매우 낯익은 모습이다. 왜냐하면 이런 복장은 동북아시아 한반도와 만주 땅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달랐다. 실제로 며칠을 걸려 그 먼길을 달려와 아주 낯선 땅에서 낯익은 인물을, 비록 그림이지만 그것도 1400년 전 인물을 만나는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면 많은 인물들이 새깃 두 개를 꽂은 조우관을 쓰고 있다. 중국인이 남긴 기록에도 고구려인들이 새 깃털을 꽂은 관모를 쓴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만이 아니다. 중국 측 기록인 <주서>에는 백제에서도 조배 제사에 조우관을 쓴다고 했다. 그리고 중앙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신라 금관의 내관 모습도 두 갈래의 새 깃털을 본뜬 형태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 조우관은 삼국시대 사람들이 모두 즐겼던 모자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외국에 있는 벽화에 조우관을 쓴 인물이 나타나면 누구나 우리 고대 삼국인으로 추정하게 된다. 실크로드의 중요한 도시인 돈황의 237호 벽화에도, 또 중국 서안에서 발굴된 장회태자 묘에 있는 벽화에도, 그리고 중국에서 출토된 당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금속 공예품에도 조우관을 쓴 인물상이 나타나고 있다.
조우관만이 아니다. 손잡이에 둥근 고리를 단 이른바 환두대도 역시 삼국에서 흔히 발견되는 유물이다. 따라서 조우관과 환두대도를 합쳐보면 이들 인물상이 모두 삼국이나 남북국시대 인물을 묘사한 그림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등장하는 두 인물도 삼국이나 남북국시대 사람임이 틀림없다. 다만 어느 나라 사람일까가 궁금했을 뿐이다.
처음 이 궁전 벽화가 국내에 알려질 때에는 벽화 제작 시기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래서 대략 7세기로 보고 신라인일 가능성이 언급되다가 그 뒤 발해인 또는 고구려인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런데 이 궁전 전체 벽화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명문이 서쪽 벽 왼쪽에 있는 인물의 흰색 옷자락에 고대 소그드어로 씌어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국내 학계에 알려졌다. 그 주인공은 소그드왕 바르후만(Varkhuman)이었다.
바르후만 왕은 650년경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등 7세기 중반 무렵에 활동했던 인물이다. 이 무렵이면 아직 고구려가 멸망하기 전이기 때문에 이들 인물상을 고구려 사람으로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이제 이들 인물의 국적 논란은 더 이상 없다.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정말 고구려 사람들이 7000여 ㎞나 떨어진 중앙아시아까지 갈 수 있었을까? 갔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이 소그드 왕국까지 간 것일까? 만약 고구려인들이 직접 아프라시압 궁전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면 그 멀리 있는 고구려인들을 왜 소그드 궁전 벽화에 그리게 된 것일까? 여전히 이런 의문들에 속시원히 답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필자는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를 바라보면서 문득 '자치통감(資治通鑑)'의 기사 한 대목이 떠올랐다.
"황제(당 태종)가 고구려를 정벌하자 설연타(薛延陀)가 사신을 파견해 들어와서 조공하였다. 황제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희 가한에게 말하라. 지금 우리 부자는 동쪽으로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너희가 노략질할 수 있다면 마땅히 빨리 와야 할 것이다." 진주가한(眞珠可汗)은 황공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사과하며 또한 병사를 징발하여 군대를 돕게 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황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주필산에서 패하자 막리지는 말갈로 하여금 진주에게 유세하며 후한 이익을 가지고 유혹하였지만 진주는 두려워 복종하면서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자치통감 권198, 당기 14 태종)
당시 설연타는 투르크계 종족으로 몽골고원 서쪽을 장악하고 있던 세력이었다. 당태종 역시 고구려 원정에 나서면서 집실사력에게 돌궐병을 거느리고 설연타를 방비하도록 조처를 취하였다. 위 기사에 보듯이 당태종이 설연타의 사신을 은근히 위협하는 대목이 그러한 면을 보여준다. 연개소문은 주필산 전투 패전 이후 말갈을 통해서 설연타와 손잡을 것을 시도하였지만 당의 방비를 두려워한 진주가한이 응하지 않았다고 위 기사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 태종이 안시성 공략에 실패하고 9월에 서둘러 회군한 데에는 설연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점도 하나의 이유라는 견해가 있다. 나아가서는 안시성 공략을 위해 토산을 축조하는 방식 및 회군은 설연타의 당 공격이 주된 배경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런 주장의 타당성은 좀 더 검토되어야 하겠지만, 동북아의 고구려 영역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몽골고원 서쪽 실크로드 지역에서 벌어지는 정세가 연동되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고구려인 역시 그러한 국제정세의 흐름을 감지하고 이용하려는 안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설연타를 지나서 훨씬 서쪽에 위치한 소그드 왕국에 고구려인을 그린 벽화가 등장한 것도 그런 증거의 하나일까?
그림 하나로 풀어내기에는 고구려와 사마르칸트 사이에 놓인 공간적 거리가 너무 멀고, 오늘과 아프라시압궁전 사이에 놓인 시간적 간극이 너무 벌어져 있지만, 고구려인이 펼쳤던 명장면 하나를 복원하는 중요한 일임을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 앞에서 새삼 확인했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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