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s://v.daum.net/v/20210219060300084

 

고구려 태자가 당의 태산 봉선의례에 참가한 이유는?
고구려사 명장면 117
임기환 2021. 2. 19. 06:03
 
665년 10월 24일 고구려 보장왕의 태자 복남(福南)이 당의 낙양에서 당 고종을 조회하였다. 662년 3월에 소정방의 대군이 평양성 공격에 실패하고 참담한 패배를 안고 돌아간 지 불과 3년 반 남짓 뒤였다. 당이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수도 평양성을 공격했다는 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는 의지를 뚜렷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뒤에 고구려 태자가 당의 낙양을 방문할 정도로 적대적인 두 나라 관계가 우호적인 분위기로 바뀌었던 것일까? 당 태종이 직접 원정에 나섰던 645년부터 20년 동안 내내 크고 작은 전쟁을 치렀던 두 나라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의아할 정도이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소정방 군대의 퇴각 이후 당과 고구려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다가 불쑥 고구려 태자 복남이 낙양을 방문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때 복남이 당을 찾은 이유는 이듬해 정월에 있을 당 고종의 태산 봉선(封禪)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태산 봉선에 대해서는 잠시 뒤에 살펴보고, 그간의 경위를 살짝 짚어보자.
 
661년 당이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때 이미 북방 철륵(鐵勒)의 동태는 심상치 않았다. 660년 8월에 철륵 4부가 반기를 들어 영주(靈州) 도독 정인태(鄭仁泰)가 진압한 바 있으며, 661년 10월에도 철륵이 당의 변경을 공격하였다. 다급해진 당은 대규모 원정군을 구성하였는데, 고구려 압록강 방면 원정에 투입되었던 글필하력, 소사업, 설인귀 등 부대를 돌려 몽골초원 방면으로 이동시켰음은 앞서 이미 살펴본 바이다. 그리고 662년 8월에는 당에 반기를 든 철륵 세력이 10여 만에 이를 정도였으며, 663년 1월에야 당은 겨우 철륵을 평정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북방 철륵의 움직임이 당의 평양성 공격이 실패하는 데 일조를 한 셈이었다. 만약 글필하력 군대가 압록강 방면에서 평양성 공격에 합류했다면 전황이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정방 군이 평양성에서 철군한 뒤에도 당이 고구려 원정을 다시 시도하기 어려웠던 대외적 배경으로 철륵의 반당적 동향을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철륵의 동향에 고구려의 외교 전략이 작동하였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수 없지만, 과거 645년 당태종의 원정 때 설연타의 사례를 보면 고구려와 철륵의 연결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을 듯하다.
 
한편 이 무렵 한반도 내에서도 당군의 입지도 그리 좋지 않았다. 662년 3월에 평양성에서 철군한 데다가, 백제 땅에서는 백제부흥군이 위세를 떨치면서 나당연합군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그러다가 도침과 복신, 부여풍 등 내부의 분열로 백제 부흥 운동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이에 나당연합군이 반격에 나서고, 663년 8월 백강(白江) 전투에서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러 온 왜군과의 연합군을 대파하고, 9월 거점인 주류성을 함락시키면서 백제부흥운동을 종식시킬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당은 북방에서 철륵의 반란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663년 1월에 제압하였고, 한반도 내에서도 한때 백제부흥군에게 곤욕을 치렀으나 663년 9월에는 이를 완전히 진압하면서 백제 정벌을 최종 마무리지었다. 다만 평양성 전투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점이 당 고종으로서는 못내 아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649년 5월 당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당 고종은 유약하다는 이미지를 씻고 대외정책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된다. 재위 초기에는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장손무기 정권이 대외적으로 온건 유화책을 취하였지만, 655년부터 장손무기를 물러나게 하고 허경종 정권을 세워 대외 강경정책을 시도했다. 그 결과 658년 2월에 아사나하로를 사로잡고 서방의 서돌궐을 궤멸시켰으며, 660년에는 동방에서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를 멸망시켰다. 663년에는 북방의 철륵도 제압했다. 단지 고구려 평양성 공격만이 실패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아버지 당 태종도 고구려 원정에서는 실패했던 바이니, 다소 아쉽더라도 그리 마음에 둘 일도 아니었다.
 
664년 7월 당 고종은 태산(泰山) 봉선(封禪)을 추진한다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봉선이란 천하통일을 이룬 군주가 태산에 올라 하늘에 통치의 성공을 보고하고 감사드리는 중국 고대의 제사의례였다. 즉 태산 봉선은 천명(天命)을 받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고, 하늘 아래 유일자로서 최고의 지위를 표현하는 정치적, 종교적 의례 행위였다. 진시황이 봉선을 지낸 이래 한 무제와 후한 광무제가 봉선을 행하였다. 사실 당 태종도 631년에 스스로의 치적을 내세우며 봉선을 행하려 했으나 위징의 간언으로 그만둔 바 있다. 따라서 당 고종의 봉선 추진은 그만큼 고양된 자부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봉선 추진 조서에서 2년 뒤인 666년 정월에 태산에서 의례를 진행할 것을 알리고, 여러 제왕(諸王)과 도독, 자사들에게 665년 10월까지 낙양에 모일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당 고종은 봉선을 위해 665년 2월 동도(東都)인 낙양으로 행차하였으며, 5월에는 이적, 허경종 등을 검교봉선사로 임명하는 등 본격적으로 봉선 준비를 갖추어갔다. 그런데 이때 봉선의 특징은 당 내부의 신하들만이 아니라 주변 국가의 사절들까지 대거 참가하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666년 정월 봉선에는 당 북방의 돌궐, 사방의 파사국(波斯; 페르시아 지역) 등, 남방의 천축국(天竺; 인도 지역) 등, 동방의 고구려, 백제, 신라, 왜 등 많은 주변 국가의 사절이 참가하여 그때까지 없었던 대규모 성세를 자랑했다. 이들 여러 나라의 사절 역시 665년 10월까지 낙양으로 모였다. 고구려 태자 복남이 낙양에 간 것도 이러한 봉선의 과정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당 고종은 낙양에 모인 제후, 제왕 및 주변 참가국 사절들을 이끌고 10월 말에 태산을 향해 출발하여 12월에 도착하였다. 666년 정월 1일부터 태산 봉선 의례를 시작하여 공자의 고향 곡부(曲阜)를 거쳐 4월 초에 장안으로 돌아올 때까지 약 3개월에 걸친 봉선 의례가 진행되었다.
 
봉선이 이루어진 태산/ 사진=바이두
 
이렇듯 당 고종의 태산 봉선에 주변의 여러 나라 사절들이 참가한 것은 당의 입장에서는 이들 국가를 당의 번신(藩臣)으로 간주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봉선이 천하통일의 성공을 하늘에 고하는 의례인 만큼, 여기에 참가한 국가는 관념상 당의 천하에 포함되는 번신이 되는 셈이다. 실제의 외교 관계와는 상관없이 관념적으로 당 고종과 군신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책봉관계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지만, 봉선이라는 정치적, 종교적 의례를 통하여 구현된다는 점에서 당의 입장에서는 보다 강한 번신 관념을 갖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봉선에 참가하는 여러 나라들 역시 이러한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당이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봉선에 참가시키기 위해 어떤 태도를 취하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잘 남아 있지 않지만,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짐작된다. 예컨대 왜(倭)의 경우에 보면 664년 4월과 665년 9월에 당이 왜에 사절을 파견하였는데, 663년 8월 백강 전투를 치른 후 얼마되지 않은 시점을 고려하면 이들 사절의 목적 중의 하나가 왜를 봉선에 참가시키는 게 포함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실제 왜는 봉선에 참가하였다. 봉선 참가 과정에서 당과 왜 사이에 새로운 양국 관계를 모색하는 과정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신라와 백제를 봉선에 참여시키는 과정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웅진도독부를 설치하여 직접 관할하였고, 663년 4월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신라마저 명목상으로 당의 기미주 체제로 편입하였다.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한 뒤에는 664년 10월에 유인궤(劉仁軌)의 추천으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665년(문무왕 5) 8월 신라의 문무왕과 백제왕자 부여 융(扶餘隆)을 취리산(就利山)에서 회맹을 시키고, "당나라의 번국(藩國)으로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겠다"는 내용을 약속하게 하였다. 그리고 유인궤는 부여 융과 신라 왕제 김인문을 이끌고 낙양으로 출발하여 태산 봉선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취리산 회맹 자체가 봉선 참여를 통한 당의 번신국화 과정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이 고구려로 하여금 태산 봉선에 참여를 유도하는 사절을 보낸 흔적은 사료상으로 찾아지지 않지만, 앞서 살펴본 정황으로 보건대 그럴 개연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당이 고구려의 봉선 참여를 요청하는 입장을 전달했다고 한다면, 이는 고구려에 대한 당의 전략이 변화되었음을 시사한다. 즉 그동안 유지해왔던 군사적 정벌을 통한 멸망이 아니라 외교적인 방식에 의한 군신(君臣) 관계 혹은 명목상이지만 번국으로 편입 등 보다 온건한 입장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당의 태도 변화는 봉선의례가 끝나는 시점인 666년 4월에 신라 문무왕이 고구려 정벌을 위한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당이 묵묵부답이었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된다. 그런 점에서 태자 복남의 봉선 참여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오히려 이러한 당의 새로운 전략 변화를 고구려 입장에서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가 논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보장왕의 태자인 복남이 사절로 파견되었다는 것은 고구려 역시 당의 요구를 수용했음을 뜻한다. 더욱 참가국 사절 중에서도 태자라는 가장 비중이 높은 인물이 참여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가 이 봉선 참여를 양국 관계 변화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다만 봉선의례의 참여가 관념상으로 당 중심의 질서 내로 편입되었음을 자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고구려 내부에서 논의가 그리 순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면 이처럼 정치적으로 매우 중대한 태자의 봉선 의례 참여를 결정한 인물은 과연 누구였을까? 이는 당시 권력의 실세인 연개소문이 언제 사망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연개소문은 그 죽음마저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임기환 서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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