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mahan.wonkwang.ac.kr/source/Balhea/8.htm
"발해유민의 재건운동 : 후발해와 대발해 (渤海遺民의 再建運動 : 後渤海와 大渤海)"글에서 "Ⅲ. 발해유민의 초기재건운동 - 1. 후발해" 부분을 가져오고 한글로 좀 바꿨습니다.

후발해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발해멸망 직후부터 일부 중앙의 유민세력과 거란(契丹)에 점거되지 않았던 서남부의 여러 부주(府州)의 항요복국운동(抗遼復國運動)이 전개되었으나 거란군(契丹軍)에 의하여 중요 부주가 토평되고 한동안 거처를 찾기 위한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나 거란 태조가 서거하고 황위계승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황후 술률(述律)이 상당기간 국정을 천단하였고 급기야 황차자 효골(堯骨)이 계위하면서 여기에 따르는 무리는 뒷날까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 형인 동란왕(東丹王)이 세력을 길러 왕위계승의 정당성을 문제 삼을 경우을 우려하여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술한 바와 같이 정략적인 천도와 감시로 동단왕을 경계하던 중 930년천현(天顯) 5년 후당으로 망명하자 태종은 한시름 놓은 채 부당한 계위를 보상하려는 심리에서인지 중원경략을 획책하여 마침내 석경당을 도와 후당을 멸망시키고 후진을 창업하게 하였다. 얼마 후 다시 후진을 멸망시키는 등 중원정국간여에 여념이 없었다. 그가 귀국도중 난하에서 급사하자 남정군중에 황위계승 자격자로는 동단왕의 아들 兀欲(올욕) 밖에 없어서 그가 계위하게 되었다(世宗). 이에 불만을 품은 조모인 술률태후(述律太后)와 숙부 이호(李胡()가 울욕(兀欲)의 입경을 저지하므로 해서 한 동안 대치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이렇게 되자 온 나라가 그 정국 수습에 진력하게 되었다, 세종(世宗)이 이렇게 어렵게 황위를 얻었지만 그 위인이 평용(平庸)하여 변지(邊地)의 동태는 물론 자기 수하인들의 인심동향 마저 살피지 못해서 결국 재위 4年만에 시해되고 말았다. 그 뒤를 이은 목종(穆宗)(太宗의 長子 壽安王/수안왕)은 좀 더 나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술과 사냥으로 소일하며 소신(小臣)들을 죽이는 것을 즐길 정도였다. 더구나 낮에는 자고 밤에는 술을 마시는 버릇으로 백성들은 그를 수왕(睡王)(잠자는 왕)이라 별호를 붙일 만큼 정치에는 게으름을 피웠다. 그러나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에 근시(近侍)의 식도(食刀)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 뒤 세종의 둘째 아들 야율현(耶律賢,景宗)이 계위하였으나 그 역시 범상한 군주는 못 되었다. 따라서 이 3제치세(3帝治世) 36년간은 자보(自保)에 급급할뿐 원방제처(遠方諸處)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 때를 틈타서 동북일우(東北一隅)의 발해유민과 여진인들이 자만(滋蔓)하여 거란(契丹)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세력형성이 이루어졌다. 곧 후발해가 존재한 생여진(生女眞)이라는 지역이 생겼다.

3제와 성종초기(聖宗初期, 성종 12세즉위 소태후 섭정)에 이르는 기간에 발해유민들이 후발해를 세웠다, 그러나 사료의 부족으로 연구의 한계성이 있어서 추측에 의한 주장이 있을 뿐이다.

먼저 선학들의 소론(所論)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후발해의 건국은 언제 되었는가? 일인 히노 가이자부로(日野開三郞)는 929년 5월이전이라 주장하였고, 북한 박시형(朴時亨)은 발해멸망후 그리 오래지 않은 시기에 건국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건국운운 하는데 대해서는 고려의 여지가 없지 않다고 본다. 비록 발해 말왕(末王)인 대인선(大諲譔)이 상경에 이치(移置)되어 있었다고 하지만 홀한성(忽汗城)에서 옮겨진 것은 발해 멸망후 6개월이 지난 뒤의 일이므로 적어도 대인선이 임황부(臨潢府)로 옮기기 전후 얼마의 기간에는 건국이라는 명분이 없었을 것이고 게다가 불의에 급습을 당하여 멸망한 처지라서 부국을 위하여 여러 지방의 세력이 부동의 기간에 반요운동을 펼치었으므로 그 기간 중에는 중심세력이 없었던 듯 하며 926년 8월 회발부(回跋府)와 장령부(長嶺府)가 평정되면서 중요 근거지를 모두 잃고 한동안 세규합에 진력하였다가 압록부(鴨綠府)와 남해부(南海府), 용천부(龍泉府)등 거란에 유린되지 않은 부(府)들의 지원을 받는 새로운 중심세력이 형성되면서 홀한성쪽으로 세확장에 노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존속기간에 대해서도 일인 와다 기요시(和田淸/화전청)는 후발해 이후 정안국이 건국까지로 보아 10여년으로 보았으며, 히노 가이자부로(日野開三郞)는 1007년 통화統和) 25년경까지로 보아서 81년간으로 추정하였다. 여기에도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러나 대씨발해의 부흥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화전청의 주장이 타당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934년(고려태조 17, 天顯 9)에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투귀한 것은 열씨(烈氏)가 대씨발해을 이어받고 태자 대광현이 계승치 못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다.

다음에는 후발해의 중심위치가 어디냐는 것이다 이용범 교수는 후발해, 정안국이 모두 압록강유역에 자리잡았고 이 곳에서 성장, 발전하였고 또, 정권이 교체되고 여기서 멸망하였다고 하였다. 또 히노는 대발해 수도였던 용천부라 하였으며, 박시형은 옛 발해의 부여부(扶餘府)가 가까운 곳이라 하였다. 그러나 홀한성은 동란도(東丹都)를 이치(移置)하면서 그 일대의 민호(民戶)를 모두 천사(遷徙)시키고 일공(一空)이 된 상태였고 부여부(扶餘府)는 곧 거란 황용부(黃龍府)로 동북을 공제(控制)하기 위한 군사주둔지가 그 부근에 포열(布列)되어 있어서 여기도 부적한 곳이다. 지정학상으로 본다면 다만 압록강유역의 압록부만이 적지라 하겠다. 압록부에는 신(神), 환(桓), 정(正), 풍(豊) 4주가 있는데 그 중 어느 곳일 것이다. 이 곳은 압록부, 남해부(南海府), 용원부(龍原府), 장령부(長嶺府), 현덕부(顯德府)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서 각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후발해는 세력의 성장과 함께 5대와도 교섭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929년(天成 4) 고정사(高正詞)가 후당에 들어가 방물을 바치자 명종(明宗)은 그에게 태자세마(太子洗馬)의 관직을 사하였으며 931년(長興,장흥 2)에는 성문각(成文角)이 후당에 갔었으며 그 다음 해인 장흥 3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을 바치었고 935년(淸泰,청태 2)에는 남해부도독 열주도(南海府都督 列周道)가 방물을 바치고 검교공부상서직(檢校工部尙書職)을 받고 왔으며, 같이 갔던 오제현(吳濟顯)은 시광록경(試光祿卿)을 받고 왔다. 이 사행이 파견된 기간은 929년부터 935년까지 였다. 이 짧은 기간 몇 차례밖에 안 되는 사신 파견기록이지만 당시 후발해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료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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