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Contents?contents_id=E0038299

오사국[烏舍國]
집필자 송기호

발해 유민의 부흥국가.

발해가 멸망한 직후 928년 동단국(東丹國)이 요양(遼陽)으로 천도되면서 발해의 상층부를 이루었던 발해인들은 대부분 거란 내지(內地)로 강제 이주당하거나 이를 피하여 고려로 도망하기도 하였지만, 원래의 발해지역에는 발해 유민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

이들은 발해의 피지배층을 이루다가 뒤에 여진족으로 변해간 말갈족들과 함께 부흥 국가를 수립하여 거란에 저항하기도 하였는데 연파(燕頗)의 세력, 즉 오사성(烏舍城)을 중심으로 하였던 오사국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 오사국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기록만 나타나기 때문에 종족 구성, 존속 기간, 소재지 등이 분명하지 않다.

[형성 및 변천]

이 나라의 왕을 ‘오사성 부유부 발해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王)’ 또는 줄여서 ‘발해염부왕’·‘발해왕’ 등으로 불렀던 것으로 보아 발해인들이 지배 계층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오소도(烏昭度)·오소경(烏昭慶)이 996년 이전부터 1004년까지 이 곳의 지배자였던 데에서도 확인된다. 오씨(烏氏)는 발해 귀족 성씨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민은 올야부(兀惹部) 사람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여진족의 일파였다.

오사국의 중심지인 오사성의 위치도 명확하지 않은데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忽汗城 : 현재의 중국 흑룡강성 寧安縣 東京城), 또는 부여부(扶餘府)에서 가까운 곳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이와 달리 러시아 연해주의 하바로프스크에 비정하기도 한다.

이 나라의 존재는 975년에 거란 황룡부(黃龍府 : 발해의 扶餘府 지역)의 위장(衛將)이던 발해 유민 연파가 거란에 반기를 들었다가 올야성(兀惹城)으로 패주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여기의 올야성은 오사국의 중심 수도에 해당하던 오사성이다. 오사는 중국측 역사서에 따라 올야·옥야(屋惹)·온열(溫熱)·올적개(兀的改)·오저개(烏底改) 등으로 달리 표기되었다.

그 뒤 오사국은 송·요나라와 교류 또는 반목하기도 하였던 기록들이 자주 나타나 일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나, 1004년 여진이 오소경의 처자를 사로잡아 요나라에 보냈고, 1012년 철리국왕(鐵利國王) 나사(那沙)가 오사국 사람 100여 호(戶)를 잡아 요나라의 빈주(賓州)로 보냈으며, 1022년에도 철리국이 오사국 사람 16호를 사로잡아 요나라에 바쳤던 사실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하여 점차 세력을 잃어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발해 유민국인 정안국(定安國)이 981년 송나라에 보낸 글에 의하면 “부여부가 잠시 거란에 반기를 들었다가 모두 정안국에 들어 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연파가 올야성으로 피신한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때 정안국의 세력이 오사국에까지 미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요사(遼史)』
『송사(宋史)』
『발해(渤海)의 대외관계사(對外關係史)』(한규철, 신서원, 1994)
『발해사』(박시형,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9)
「고려(高麗)와 발해(渤海)」(이용범, 『한국사』 4, 국사편찬위원회, 1974)
『渤海國志長編』(金毓?, 華文書局, 1934)
「兀惹考」(和田淸, 『東洋學報』 38-1, 1955)
「兀惹部の發展」 1·2·3·4(日野開三?, 『史淵』 29∼33, 1943∼1945)
「鐵利考」(池內宏,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3, 東京帝國大學文科大學,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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