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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촌이란 설도 있으나(후발해에 대해서는 삼촌 설이 정설) 이름이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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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안국
定安國
938년? ~ 985년 12월? / 986년 1월?
만주에 발해 유민들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국가이다. 요에 저항하여 발해부흥운동을 일으킨 수많은 세력들중 하나이다.
926년 거란족의 요나라가 발해의 상경 용천부를 공격하여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동란국(東丹國)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등 국제사회에 (고려라 자칭한) 발해의 후계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930년 4년만에 요나라 왕족 야율배의 후당 투항으로 요의 직할령로 흡수 되었다. 단 정식 흡수에 대해서는 936년 설도 존재한다.
동란국이 사라져 진공상태가 되어버린 옛 발해 땅에는 발해 왕족/귀족과 유민들이 여러 집단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 세력이 뿔뿔히 흩어지고 있었다. 934년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의 아들 대광현이 동생[1] 대정현에 밀려 고려로 투항하는 등 다수가 고려로 투항했고, 936년경 남경남해부(함흥추정)를 근거지로 둔 대정현의 후발해(정확한 존재는 미상) 역시 요나라 성종에 멸망하는 등 혼란이 심했다.
이에 대정현을 돕던 발해 귀족 출신으로 추정되는(예컨데 대인선의 동생(삼촌격)이 대광현을 몰아낼 때 협력한 것이 바로 이 열씨로 본다) 열만화가 938년 경에 후발해의 잔당 유민을 이끌고 정안국을 건국했다. 남경남해부에서 근거지를 옮겨 압록강 유역에 건국한 것이 통설이다. (압록강 유역은 발해의 5경중 하나인 서경압록부가 위치했던 곳이다.) 그러나 그보다 북쪽의 요하 유역이나 발해의 구도인 상경용천부 부근으로 보는 이설도 있다.
970년에 열만화가 송나라(북송) 태조에 사신을 보냈다.
976년에 오현명[2]이 왕위에 올라 연호를 원흥(대흥)으로 정했다. 열만화와 성씨가 다르기 때문에 정변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뒤따른다. (열만화의 이름이 오열만화이기에 정상적 계승이라는 이설도 있다.)
979년 발해의 유민이 또 고려로 투항했다. 981년 오현명이 송(송태종)에 사신을 보내 요를 협공하여 반씩 나눠먹는 것을 하는 것을 약속했다.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아룁니다. (중략) 신은 본래 고구려 땅에 살던 발해 유민으로서 (중략) 근년에 거란이 강포한 힘만 믿고 우리 영토를 침략하여 성채를 함락시키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으나, 저희 할아버지께서 절개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3] 백성들과 함께 난을 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힘을 길러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 부여부가 근래에 거란에서 등을 돌려 우리 나라에 귀순하였으니, 재앙이 장차 이르게 되면 이보다 큰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천자의 조정으로부터 비밀 계획을 듣고, 정예의 군사를 거느려 거란 토벌을 돕고자 합니다. 기필코 원수를 갚고 싶으니, 감히 명령을 거역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신 오현명은 진실로 간절히 원하며 삼가 고개를 숙입니다.
- 원흥 6년(981년) 10월 일, 정안국왕 신 오현명이 성스러운 황제 앞에 표문을 올림. -
하지만 송은 서하를 견제하는데 정신이 없었으며 983년~984년 정작 요가 정안국을 털어갔다... 이것 딱 송나라 필이네
985년 고려에게 청천강을 통해 SOS를 보냈고 잠시 통교했으나 곧 관계가 끊겼다. 고구려의 계승국을 자처한 고려이긴 하지만 명분과 동포애보다는 냉철한 이해관계가 앞선 것으로 보인다. (반면 초기 고려가 여진-정안국-북송과 함께 거란을 포위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연대를 방해하려는 거란의 간섭에 의해 쉽게 좌절되었다.) 거기다 당시 고려는 겨우 내부 권력관계를 정리하고 행정체계를 정비한 수준에 그쳐 있어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의문이다. 당시 요나라가 현재 의주 지방에 내원성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제지도 못했으니...
결국 정안국은 985년 12월 ~ 986년 1월 경 요나라에게 제차 공격받아 재건한지 2대 48년만에 멸망했다. 포로 10여만 명과 말 20여만 필을 노획하였으며, 그 땅에 4개 주(州)를 설치하였다고 하니 나름대로 세력을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는 있으나 허무하게 멸망했다.
993년 발발한 1차 여요전쟁에서의 서희의 담판으로 멸망했다는 와전된 이야기도 있으나, 연도에서 보듯 이는 정안국의 멸망 7년 뒤에 일어난 일이다. 도리어 정안국이 고려를 침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멸망했다. 한편으로 서희가 거란과의 협상에서 정안국의 부흥세력인 후발해국 등을 여진의 범주에 넣었을 가능성이 유력하지만, 협상의 대상이었던 강동 6주는 당시 발해 부흥운동의 중심지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지역이었다. 거기다 여진족들이 발해가 건재했을 때에도 고구려계와의 동화가 되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1차 여요전쟁이 일어나기 3년전 고려가 이 지역에 대한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으니 정답이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다.
짧은 시간 존재했지만 엄연하게 중국 정사 열전에 입전된 국가이다. 이 열전에서 정안 = 마한드립을 치고 있어서 공상가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최치원 대부터 '고구려 = 마한'이라는 인식이 대두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발해 후신 세력들(길게보면 고구려계 국가) 가운데는 가장 오래 버텼다.[4]
유난히 고구려-발해-고려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한국 국사교육계 전반의 풍토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역사교육에서 거의 다루어지지도 않고 인지도도 그만큼 처참하다. 잘 해야 거란의 제1차 침입의 원인에서 거란의 정안국 정복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는 정도에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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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촌이란 설도 있으나(후발해에 대해서는 삼촌 설이 정설) 이름이 미상.
[2] 열만화를 도운 오제현의 후손이라고도 한다.
[3] 이에 따르면 열만화는 그의 할아버지 격이 될 수 있다.
[4] 예컨데 정안국 유민으로 보이는 오소경이 995년 올야국(兀惹國)을 세웠으나 다음해 다시 거란에 항복했고, 대씨인 대연림이 1029년 흥요국(興遼國)을 세우고 나름 여진 등 세력을 모았으나 괜히 요나라에 개기고 고려가 돕지 않아 역시 다음해 멸망했다. 요나라의 지방관이었던 고영창이 건국한 대발해(대원국)는 1116년 1월에 건국했으나 역시 금나라에 개겨 4개월만에 멸망했다. 안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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