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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화백과사전 (검색어) "발해" 글에서 [건국과 성쇠] 중 "5. 멸망과 부흥" 내용만 가져왔음.
5. 발해의 멸망과 부흥
* 민족문화백과사전 (검색어) "발해" 글에서 [건국과 성쇠] 중 "5. 멸망과 부흥" 내용만 가져왔음.
5. 발해의 멸망과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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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 907(?)~926)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이 번갈아 일어났다. 이 틈을 타서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발흥했다. 거란은 남쪽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배후세력을 먼저 제거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서 서방 세력을 먼저 공략하고 이어서 동방의 발해를 공격해왔다.
발해는 거란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926년 정월에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마음이 갈라진 것을 틈타서 싸우지 않고 이겼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발해의 내분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주민 구성이 고구려계와 말갈계로 이원화되어 있던 것이나, 지방의 수령 세력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했던 것도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분해될 수 있는 소지를 안고 있었다.
거란은 발해를 멸망시킨 후 수도에 동쪽 거란국인 동단국(東丹國)을 세우고 맏아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928년에는 수도를 요양(遼陽)으로 옮기고 발해 유민도 함께 이주시켰다. 이로부터 발해 유민은 금나라 초기까지 200여년간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자취를 남기다가 서서히 중국 속으로 흡수되어 들어갔다. 일부는 요나라 또는 금나라 지배층으로 들어갔고, 일부는 이들 지배에 저항하면서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멸망 직후 서경압록부에서 일어난 후발해국(後渤海國, 926~?)과 그 뒤를 이은 정안국(定安國, ?~980년대), 원래의 발해 중심지에서 일어난 오사국(烏舍國,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 요나라의 동경에서 일어난 흥료국(興遼國, 1029~1030)과 대발해국(大渤海國, 1116)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고려로 망명해와 한국사의 한 부분을 이룬 부류도 있으니, 이들은 멸망 직전부터 들어왔고 때로는 부흥운동이 좌절될 때마다 피신처를 찾아 망명해왔다. 국내의 태씨, 대씨들은 발해 왕실의 후예로서 그러한 망명자의 후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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