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숫자로만 되어 있는 소제목에 제가 내용에 맞춰 제목을 붙였습니다.

출처 : http://mahan.wonkwang.ac.kr/jucheon/Columns/column3-13.html

발해가 멸망할 때 後三國의 영웅들은 무엇을 했나? 
 
I. 서론
 
668년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한 후 30년 뒤인 698년 고구려 유장 대조영은 그 지역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한때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발해는 926년 정월 거란의 야율아보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북방의 漢族이나 북방 민족들의 한반도 침략을 방어하는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필자의 견해로는 발해가 쇠퇴하고 거란족이 발흥할 때가 고구려 멸망이후 한민족이 다시 북방의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최초의 好機였다고 판단된다. 후삼국시대를 살았던 한국인들의 고구려 古土에 대한 관심과 미련은 21세기를 사는 우리 세대보다 훨씬 더 강열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후백제, 통일신라가 각축을 벌린 후삼국시대의 분열, 대립의 현실은 훨씬 냉혹했다. 21세기에도 아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후삼국의 3傑들(궁예, 왕건, 견훤)이 발해 멸망기에 무엇을 했는지를 재조명해 보면서 역사의 교훈을 얻어보자. 
 

II. 후백제, 신라, 후고구려의 대거란 외교
 
발해가 멸망하기 직전 9세기말부터 10세기 전반기의 동북아시아는 하나의 전환기라고 할 것이다. 안사의 난 이후 쇠퇴하기 시작한 唐제국은 황소의 대난을 겪으면서 907년에 멸망하고 후량이 들어서면서 五代十國(907-960)의 분열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한반도 내에서는 후삼국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신라가 쇠퇴일로를 걷고 있었고 견훤의 후백제와 궁예의 태봉(고려의 왕건)이 세력다툼을 벌이던 시기이다. 발해의 서쪽에서 일어난 거란이 발해의 쇠퇴와 중원의 분열로 인해 갑짜기 큰 나라가 되고 있었다. 거란은 옛부터 요하 상류에 흘러가는 시라무렌강가에서 발흥한 東胡계통의 퉁구스와 몽고의 혼혈족으로 알려졌는데, 907년 야율아보기가 제위에 올라 점차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중국으로 진출하는 한편, 동쪽으로 발해를 위협하였다. 그는 임기 말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중원을 도모할 새로운 야망을 품었다. 그래서 916年 신책(神冊)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자칭 황제라 하고 임황(臨潢, 熱河省)을 皇都로 정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때 영역은 확대되어 발해와 상접하게 되자 발해와 본격적인 전쟁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한편 후삼국 중에서 가장 영토를 넓힌 궁예의 고려는 정치판도에 큰 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905년 궁예는 청주에서 만난 策士 아지태의 권고를 받아들여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고려에서 마진이라 정하였다. 이는 고려 호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일이라 결국 궁예 몰락의 신호탄이 되었다. 청주지방의 1천호를 이주시키고 궁궐을 수축하는 동안 많은 세금과 부역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호족과 농민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던 것 같다. 궁예가 사용한 국호(901년 고려, 904년 마진, 911년 태봉)를 분석해 보면 자주적인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있지만, 정권의 불안정을 또한 내포한 것이었다. 913년 청주파내부에서 서로 참소, 모함하는 분열이 생기는 소위 "아지태 사건"이 발생했다. 왕건은 이 사건에서 아지태를 척결하면서 호족들의 신망을 한 몸에 얻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궁예는 대외관계에서, 특히 거란에 대해서는 별다른 적대적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요사>에 의하면, 915년에 궁예가 거란에 보검을 바치면서 조공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아마도 궁예는 그가 추진한 정치숙청으로 말미암은 정치적 혼란을 외교적 관심이전을 통해 극복하려했던 것 같다. 그리고 918년 왕건에 의해 축출되기 3,4개월 전에 두 차례에 걸쳐 거란에 사신을 파견하였던 것도 이런 내부 정세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결국 고려 호족들은 918년 왕권과 결탁하여 궁예를 축출하였다. 그러나 왕건은 환선길, 이흔암 등 장수의 반란을 겪어야 했고, 공주 이북 30여성이 다시 후백제에 귀부했다는 점에서 왕건은 초기에 내부 분란을 정비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왕건은 이듬 해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개성)으로 옮기고, 연호를 天授라 하였다. 

고려의 정권교체에 따른 후유증을 지켜본 후백제 견훤은 두 번이나 실패한 대야성 정복의 꿈을 키워갔다. 그는 920년 대야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면서, 후백제의 통일정책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925년 12월 후백제의 견훤은 후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後唐 조정으로부터 '백제왕'임과 食邑 2,500호의 통치자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거란의 야율아보기는 후삼국의 분쟁의 틈을 충분히 이용한 것 같다. 그는 神冊元年 (916) 정월 황제 즉위 이후 바로 서방 諸國(제국) 공격을 준비하여 오다가 그해 7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돌궐, 토혼, 당항, 소번, 沙陀諸部(사타제부)를 쳐서 곧바로 평정하고 그 개선하였다. 그는 궁예가 축출되었을 918년에는 생산의 요충지인 요동의 정복을 완료했다. 그 후 발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장기 관찰을 한 결과 발해국 내분소식을 접하고 바로 전면 공격전을 선언하였다. 야율아보기는 드디어 925년 12월 발해의 수도를 대규모 병력을 동원, 기습하여 발해의 부여성을 함락시키고 말았다. 高王이후 200여년동안 해동성국이란 칭호를 받았던 대국 발해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926년 정월 1달만에 어이없이 멸망하고 말았다. 

발해가 거란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 주변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여러 곳에서 감지된다. 거란의 핍박을 경계하여 925년경에는 발해가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結援하였음이 {契丹國志}(권1)에 보이고 있다. 이보다 앞서 921년에는 발해가 고려와 외교관계를 맺고 아울러 通婚하였던 듯한 기록이 {資治通鑑} 권285에 보이고 있다. 만일 이 기록이 신빙성이 있다면 발해는 거란과의 전쟁에서 신라와 고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양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은 받지 못한 것 같다. 
  
 
III. 고려와 신라의 대거란 외교
 
그런데 이 당시 위기에 처한 발해를 보면서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고려의 왕건의 숨은 의중이 무엇이었던가? 고려의 왕권은 과연 건국초기부터 거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을까? 결코 아니었다. 925년 주물성(경북 안동 또는 상주 부근) 전투를 전후로 하여 고려는 후당과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하는 등 대외정책에서 저자세의 모습을 보인다. 그 이유는 첫째로 고려가 주도하는 통일전쟁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고려가 거란에 호감을 사기 위해 준비한 외교 선물로서는 그해 9월 발해장군 申德 등이 그들의 정치내분으로 고려에 내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발해내부에 관한 중요 정세를 전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거란으로서는 크게 환영할 것으로 그들이 발해 정벌의 시기를 결정하는데 크게 도움을 얻은 것이다. 실제로 거란이 발해의 정치 혼란을 이용하여 "先帝[태조]가 발해인들의 틈을 타서 공격하여 싸우지도 않고 이겼다"는 『요사』를 통해서도 알수 있다. 거란은 922년에 먼저 사신을 파견하여 발해견제를 위한 고려의 협조를 요청했었고, 고려의 사신을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고려가 거란과의 관계 개선에 신경을 쓴 이유는 두 번째 이유는 거란의 국제적 위치 상승이라는 국제역학관계의 변화였다. 거란은 고려 사신이 오기 1년 전에 이미 토혼(吐渾), 당항, 돌궐, 등의 정벌작업을 벌였는가 하면, 大食國에서도 조공사신이 다녀갔다. 그리고 고려사신이 다녀갔던 925년 2월에도 대원수 요골(堯骨)이 당항을 경략하고, 北府宰相 소아고지(蕭阿古只)가 燕과 趙를 경략하고 돌아오는 등, 그 국력의 강성함은 주변 여러 나라들이 인정하고 있는 터였다. 그래서 고려도 이제는 거란의 국제적 위치를 인정하고 그들과 교섭을 원하는 적극외교를 펼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사실은 신라가 발해를 돕겠다던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란에 조공사를 파견하였다는 사실이다. 신라도 거란의 국력상승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은 거란의 발해 침략을 고려, 신라 모두가 묵인, 방조함으로써, 거란의 발해멸망을 도와주는 결과는 낳고 말았다. 고려는 발해의 멸망에도 불구하고, 926년(2월 20일) 거란에 사신을 파견했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이 거란을 "無道의 나라"로 규정한 942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르다. 발해의 멸망 전후를 영토확장의 호기로 활용하지 못한 주된 원인은 주물성 전투에서 보았듯이 925년 이후 전개된 고려와 후백제간의 팽팽한 세력균형 때문이었다.

<원대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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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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