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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安田喜??動の文明史』2004년 (NTT출판) pp. 106-117. (제 3 장 중)
에서 일부 대목을 우리말로 대충 옮겼습니다만..그림 설명과 참고문헌은 홀랑 뺐습니다.


3. ‘발해멸망한랭기와 마야문명의 붕괴

 

발해멸망한랭기

 

현재 지구온난화를 유발하고 있는 화석연료는 어쨌든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그 화석연료가 다 없어졌을 때지구기온은 어찌 될까?.수가와라 미치자와(菅原道眞)가 ……(중략)…죽었을 때(903)는 마침 이런 지구온난화 직후에 찾아온 단기간 한랭기가 시작한 무렵에 해당한다이 기간은 또한 내가 발해멸망한랭기라고 이름붙인 지구온난화 후의 단기간 한랭기다.

 

서기 740년대 이후의 지구온난화 뒤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살펴보면 화석연료가 고갈된 뒤에 일어날 지구대변동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서기 740년 이후의 지구온난화 뒤로 지구환경은 일방적으로 온난화가 진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중세온난기라고 부르는 온난기엔3번의 급작스런 단기간 한랭기가 있었다추위로 다시 돌아가는 시기가 인류를 덮쳤던 것이다이런 중세온난기 중의 갑작스런 추위가 무엇을 일으켰는가를 살펴보면화석연료가 고갈되서 온실효과가 감소 한 뒤 나타날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어이없이 멸망한 이유

 

발해는 727(일본 神龜 4)을 시작으로 919(延喜 19)까지 다해서 34 번이나 일본에 사절단을 보냈었다일본 측에서도727(신구 5)부터 811(弘仁 2)까지 모두 15번 발해에 사절단을 보냈었다. …… (중략).

 

그러나 200년에 걸친 발해와 (일본의교류는 느닷없이 끝났다도대채 발해에 무슨 일이 생겼을까그 끊김의 배경에는 기후변동이 깊이 자리하고 있음이 요즘 밝혀졌다.

 

발해는 북위 39~48도의 한랭한 지대에서 8 세기 때 말갈 사람이 세운 나라이다그 삶을 떠받든 것은 조기장보리 따위의 농사일,돼지치기그리고 털가죽인상 따위의 수출이었다. 713(和銅 6)에 대조영이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책봉된 것이 발해국(渤海國)의 시작이다특히 819(弘人 10)에 제10대왕 대인수는 월기우루 따위의 북방 말갈부를 정복하고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이란 말을 들을 만큼 발전했었다 (그림 14).

 

그러나 907(연희 7), 당나라가 황소의 난을 거쳐 멸망하자 동아시아는 격동의 시대에 들어갔다그것은 또한 유목민 몽골계가 대이동을 시작한 시대였다그 첫번째 파도가 거란의 대이동이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살던 이 몽골계 거란은 야율아보기가 916 (연희 16)에 왕이되면서 적극적으로 대외원정에 나섰다야율아보기는 잡아온 한인(漢人)에게 농사일을 시키고위구르 상인을 통해 무역을 벌렸으며거란문자를 만들어 민족문화 발전에도 공헌했었다.그리고서 925(延長 3), 발해 서단의 부여부를 공략하고, 926 (연장 4)에는 서울인 상경용천부를 함락시켜 순식간에 발해를 정복해 버렸다. 200년에 걸쳐 번영을 누리던 발해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거란 군대에게 무너졌다왜 이다지도 어이없이 발해는 멸망했던 것일까.

 

그림 15는 키타가와 히로유키(北川浩之)가 야크수기(屋久杉Cryptomeria Japonica나이테에서 추출한 탄소동위원소비(Carbon Isotopic Ratio) 분석결과로부터 밝힌 기온변동을 나타낸 것이다그림 16은 후쿠사와 히토시(福澤仁之)가 아키타현 메가타(秋田目潟)의 바브(varve분석으로부터 밝힌 기후변동을 나타낸 것이다. 8세기 후반의 대불온난기(역주저자가 만든 용어다. 740년 무렵즉 일본 나라시대에 大佛이 세워진 무렵부터 약 100년간 계속된 기온온난기를 말한다)에 의해 기온은 온난다습화 했다. 9세기는 세계적으로 중세온난기라고 부르는 고온기에 놓여있었다이 고온기에 발해에서는 농경전선이 북상했고남부에서는 오늘날엔 재배할 수 없는 보리와 쌀도 재배할 수 있었다발해 발전의 배경에는 대불온난기에 의한 기온온난화와 다습화가 깊이 잇닿아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920년 무렵기후는 일시적으로 갑자기 추워졌다 (그림 15). 게다가 수월호(水月湖후쿠이현에 있다)의 분석결과에서는 건조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도대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중세온난기에서 고온기가 한창일 때 갑자기 한랭화가 유발된 것이다.

그림 15

 

이 무렵에 거대한 화산폭발이 있었을 가능성이 지금껏 지적되어 왔었다이것은 먼저 일본 동북지방에서 일어났었다토와다(十和田)칼데라(caldera)의 대폭발이었다이 분화에 의한 화쇄류(pyroclastic flow)는 요네시로강(米代川)을 타고 흘러가 유역의 집과 마을을 다 덮어버렸다토와다 칼데라의 대분화(토와다a화산재 화산회층연대는 마치다 요(町田洋)에 의해 905~934년 중에 있었던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요즘들어후쿠사와 등에 의한 아오모리현 오가와라호(靑林縣 小川原湖)의 바브 분석으로부터토와다a화산재(volcanic ash) 화산회층은 915(연희 15)에 생겼음이 판명되었다.

 

이 토와다 칼데라의 대폭발과 이후의 기후한랭화가 어떤 인과관계에 있는지 현재로선 아직 분명치 않지만어쩌면 화산폭발이 기후한랭화의 한가지 요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이 토와다 칼데라의 대폭발 직후에이 번엔 발해국 중앙부에 자리한 백두산이 대폭발했다이 백두산 정상에는 그 때 생긴 칼데라에 물이 채워진 천지(天池)가 있다이 때의 대분화에 의한 화쇄류는 탁류(濁流)가 되어 흘러내려가 백두산으로부터 2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리한 저지(低地)라는 저지대에서 범람했었다고 마치다는 보고있다화쇄류는 숲을 쓰러트려 없애고 밭을 덮었다.북한 중앙부는 이 백두산 대폭발에 의해 큰 타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꽤 술렁거렸었다발해는 동아시아의 폼페이 일지도 모른다고. 14-C 연대로 백두산의 화쇄류 분출연대를 측정한는 한그 연대는 발해가 멸망한 무렵에 해당하는 920±20 년이란 수치가 얻어졌기 때문이었다.

 

초기 단계에선 이 백두산 대분화가 혹시 발해국 멸망의 원인이 아닐까 우리는 생각하기도 했었다그러나아니다를까 이것은 14-C연대측정치의 한계를 드러낸것에 지나지 않았다바브에 의해 보다 낱낱이 발해의 멸망시기와 백두산의 분화시기를 짚어 보았다후쿠사와 등에 의한 오가와라호와 아키타현 메가타의 바브 분석결과(그림 16)에 따라서 백두산의 분화시기는 937(承平 7여름에서 938(天慶 원년봄 사이로 좁혀졌다. 937년 여름부터 938년 봄이란 계절까지도 바브에서는 콕 찍어 가리킬 수 있었다백두산의 분화는 발해가 멸망한지 11년 뒤의 일이고발해의 멸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발해의 멸망과 백두산의 분화는 전혀 잇닿음이 없었다백두산 분화가 발해의 멸망을 가져왔다함이 그럴듯하게 보였던 것은 14-C 연대측정의 정밀도의 한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20년의 오차로 이루어진 14-C연대측정 결과에선 926(발해의 멸망) 937(백두산 분화)를 구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림 16

 

그렇다면 왜 발해는 멸망했을까? 기후변동이 문명과 역사흥망에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우중요한 점은얼마나 기온이 상승했는지 아니면 얼마나 추워졌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앞 시대에 비해 얼마나 기후 낙차가 있었는지가 중요하다.

 

그림 15에서 시원하게 드러났지만 920~925년 무렵의 한랭기는 고온기 피크 때에 일어나고 있다키타가와에 의한 탄소동위원소비 분석결과에 따르면이 한랭기는 이전 과거 2000년 동안 가장 기온이 높았던 시대 도중에 일어났다이렇게 고온기가 한창일 때 이런 한랭기가 일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활에 끼친 영향은 굉장히 컸다고 볼 수 있겠다.

 

이처럼당나라의 멸망몽골계 유목민 거란의 대이동 개시그리고 발해의 멸망 배경에는 거대한 화산분화와 그 직후의 기후 악화가 존재하고 있다이 중세온난기 한가운데에 일어난 단기간의 한랭기를 발해멸망한랭기라고 부르겠다.

 

더군다나 발해는 920~925년의 겨우 5년 만큼의 단기간 기후악화에 의해 덧없이 멸망했었다이와 같은 일은 아래에 적은 마야문명를 두고도 말할 수 있다.

 

 

마야문명과의 인연의 끈[赤絲]’

 

당나라와 발해의 멸망과 때를 함께해서 붕괴한 또하나의 문명이 있었다그것은 중남미의 마야문명이다.

 

………(중략)…….

 

그런데 마야문명은 920년 무렵에 갑자기 붕괴하고유적은 다시 열대우림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마야문명 붕괴의 배경에는 당나라와 발해를 멸망시킨 기후변동이 깊이 개입하고 있음이 요즘들어 밝혀졌다호델(Hodell, D.A.)등은 유카탄 반도 중앙부에 자리한 Chichancanab호의 호수바닥에서 채집한 4.9 미터 퇴적물로부터 탄산칼슘 양과 Gypsum 그리고 산소동위원소비를 분석했다.

 

그 결과(그림 17) 마야문명(고전후기)이 붕괴한 920년 무렵에는 Gypsum의 양이 급증했었다. Gypsum이란 수화황산염의 결정인데 염수호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Gypsum가 급증함에 따라 조개류에서 나오는 탄산칼슘은 역으로 감소했었다이는 Chichancanab호가 담수호로부터 염수호로 바뀌었음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게다가굉장히 심한 가뭄 극성기가 922년 무렵에 있었다호델 등은 이 922년 무렵에 절정을 이루었던 심한 가뭄이 마야문명을 몰락시킨 원인일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가뭄이 절정에 달한 시대는 딱 발해가 멸망한 시대와 들어맞는다발해멸망의 원인이 된 한랭화가 마야에서는 대가뭄을 유발했던 것이다이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동아시아의 발해멸망과 중남미의 마야문명멸망은 920~925년 무렵에 일어난 기후변동에 의해 인연의 끈으로 묶여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문명 모두 920~925년 동안의 불과 몇 년에 걸친 단기간 기후악화에 의해 붕괴했던 것이다기후가 변동하면,설령 이것이 단기간에 불과하더라도문명은 막대한 영향을 받게될 것임을 이 발해와 마야문명의 붕괴가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림 17 (원문의 그림은 아니지만 큰 차이는 없습니다)


발해 멸망 관련글  https://tadream.tistory.com/13813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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