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palhae.org/sogilsu/balhe/balhe-24.htm
발해멸망 원인
발해멸망 원인
金 恩 國(중앙대 강사)
10세기에 들어 발해를 통치한 왕은 제15대 마지막 왕 대인선(大諲譔)이었다. 발해의 멸망은 그가 재위에 오른지 20여 년 뒤의 일이다. 발해 멸망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 현재 {요사(遼史)} 뿐이다. {遼史} 야율우지전(耶律羽之傳)에 "거란 태조가 그 갈린 마음을 틈타 움직이니 싸우지 않고 이겼다 (先帝因彼離心 乘 而動 故不戰而克 )" 라는 기록이 유일하다 하겠다.
현재까지 발해 멸망에 대한 연구는 이 기록과 함께 진행되었다. 곧 발해는 대인선 통치시기에 내분에 의해 우왕좌왕하던 중,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발해 내분에 의한 자멸'설은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발해 내분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내분설 자체가 추론일 뿐이다. 내분설의 유력한 근거로는 {고려사(高麗史)} 등에 등장하는 '발해 유민 의 고려 망명'이 그것인데, 고려 태조 8년(925년) 이후 각계 각층 발해민의 망명, 특히 고관과 무관직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망명한 기사가 보인다. 곧 발해 멸 망 직전에 발해 지도층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민심이 이반된 가운데, 일부가 고려로 망명하는데, 이 틈을 이용한 거란의 기습적이고도 대대적인 공세에 결국 발 해가 멸망하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발해인의 고려 망명은 고려 태조 때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고려 예종대인 12세기까지 근 2백여 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또 {요사}라는 사료의 성격 또한 전쟁에서 승리자 중심의 전승물임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발해는 전쟁에서 지고 또 기록에서 또 한번 진 것이다. 이러한 내분설 위주의 발해멸망 시각은 최근 방송매체의 전파를 타고 백두 산 화산폭발설과 연결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 설의 진앙지인 일본에서도 이미 부정적 견해가 나왔는데도, 우리는 이 설을 재활용하고 있음은 아이러니컬하다. 폭발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발해 상경용천부 일대에 광범위하게 사용된 용암들이란 폭발 시 점이 역사시기 이전임을 분명히 말해주는 것이다.
이밖에도 발해 멸망에 대해서는 많은 견해가 있지만, 대부분이 위에 든 {遼史}의 기록에 의거하여 발해 내분설을 보강하고 있다. 따라서 발해 멸망의 모든 책임은 발해인 특히, 발해지도층, 그 중에서도 마지막 왕인 대인선에게 귀결되곤 한다. 이처럼 발해말기 사회의 부패, 나약, 내분 등 부정적 요소로 '발해멸망=내 분' 이라고 이해되어 왔던 것이다.
발해 멸망은 이제 다른 각도에서 보아야 할 때이다. 즉 빈약한 사료에서나마 발해인을 중심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에 따르면 마지막 왕 대인선은 거란이 세력을 확장할 시기, 활발한 대외 외교를 전개하였음을 볼 수 있다 한반도 내의 신라, 고려 등은 물론 중원, 일본 등과 교류를 하였으며, 특히 거란과도 사신교류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특히 신라를 포함한 여러 나라와 결원(結援)을 맺었다 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거란의 공세를 대비한 나름대로의 대비책을 강구하였음 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10세기 동아시아는 공교롭게 혼란 시기에 놓여 있어, 발해의 이러한 요청에 부응할만한 국가가 없었다. 발해는 말기까지 전통적인 방어체제를 구축하여 놓았다는 것을 유적의 존재 와 발굴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의 대규모 공세 앞에 무너졌던 것은, 바로 거란이 발해의 전통적인 군사력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상 정할수 있겠다.
따라서 거란으로서는 발해의 영토의 서쪽에 위치한 요동의 공략에 주력을 한 다. 요동이라는 곳은 당시 동북아시아 요충지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 전략적 중 요성은 오늘까지도 빛을 발하는 곳이다. 사료({요동행부지(遼東行部志)})에서도 요동에 대하여, 거란이 발해와 수십 년간 혈전(血戰)을 치루고서야 겨우 차지하였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므로 거란은 발해공략을 쉽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언급을 토대로, 발해의 멸망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 할 수 있겠다. 곧 발해 말기의 어떤 내분이나 혼란만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분설의 근거는 추론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다. 이제는 발해를 중심으로 보는 발해멸망관이 필요할 때이다. 이는 발해 말기까지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전통적인 방비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또 마지막 왕 대인선은 거란의 압박에 대하여 대내외적인 조치를 강구하였으며, 다만 주변 국가가 발해의 원조 요청에 부응할 수 없었던 것이 한계였다고 본다.
아울러 이제는 다각적인 발해 멸망에 대한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는 발해의 왕계가 단절된 이후 발해전역에서 전개되는 유민부흥운동의 조명이 부각되기 위해서도 그러하다.
발해 멸망 관련글 https://tadream.tistory.com/1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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