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년,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던 “해동성국”―발해는 갑작스럽게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발해멸망의 원인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외부세력인 거란의 침입에 의해 멸망되였다는 설인데, 이에 대한 문헌자료가 가장 많다.
발해국은 동아시아 중세기 보편문명의 습득에 있어서 모범생이고 우수생이였다. 그러나 중세기문화에서 우수생의 국운(国运)이 꼭 탄탄대로와 같고 동녘에서 솟아오는 아침해와 같이 계속 욱일승천한다는 법은 없다.
동아시아 중세기 보편문명을 습득하느라고, 문치주의(文治主义)에 힘을 너무 기울이다가 그만 점차 상무정신을 잃어버리게 된 발해가 몽골초원에서 그 사이 말 달리고 활 쏘면서 싸움재주를 꾸준하게 길러온 거란인들에게 맥없이 무너지고말았다는것이다. 발해국의 마지막 국왕인 대인선(大諲譔, 재위 907-926)은 왕후와 함께 거란의 포로로 되여 잡혀간후 거란인들은 그에게 오로고(乌鲁古), 왕후에게는 아리지(阿里只)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는데, 이 이름은 거란의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机, 재위 907-927)와 그의 왕후가 대인선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때 탔던 좌기(坐骑)의 이름이였다고 한다.[1]
이처럼 세상만사는 새옹지마인것이다.
둘째는 내분설인데, 이는 충분한 문헌자료가 뒷받침해주지 못한다.
내분설은 비록 주관적추측의 요소가 상당히 많기는 하지만, 문명의 발생, 성장, 개화발전, 쇠락의 주기적인 법칙을 감안할 때 역시 있을법한 추측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한 문명국이 일정한 년륜이 쌓이게 되면 마치도 나무도 병이 들듯이 내분 같은 국가유기체내에 병폐들이 생기기마련이다. 바로 이런 내분으로 국력이 쇠퇴해졌을무렵에 외부세력으로부터 오는 갑작스러운 충격을 받으면 거꾸러지게 되는것이 상례이다.
셋째는 자연재해설이다.
“해동성국” 발해가 돌연스럽게 멸망된 원인을 단순한 외적의 침입으로 귀결시킨다는것이 탐탁스럽지 않아서였는지 일부 학자들은 발해멸망의 다른 한 원인을 돌발적인 자연재해에서 찾기도 했다. 이를테면 일본의 나고야대학에서는 2002년에 백두산에서 채집한 용암과 화산재로 하여 말라죽은 고목(古木)들의 년대를 측정하여 장백산 정상에서 화산이 폭발된 시간을 925년부터 945년 사이로 추정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였다면 바로 발해가 거란의 침공을 받기 한해전에 백두산에서 화산이 폭발한것으로 된다. 장백산만이 아니라 발해경내에는 화산이 분출했던 곳이 아주 많다. 경박호에 있는 지하삼림, 왕청현 사방산에 있는 거대한 화산분출구 등은 아직 그 화산분출의 구체적인 시간이 밝혀지지 않았다.
아무튼10세기 전반기에 일어났던 백두산 화산폭발은 그 규모가 엄청났다고 한다. 심지어 그 화산폭발 당시 하늘에 뿜겨져 올라갔다가 바람에 실려 동쪽으로 날려간 화산재가 일본 홋카이도와 도호쿠지방의 지층에서까지 발견된다고 하니 말이다. 화산폭발로 하늘에 뿜겨 올라간 화산재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베수비오산의 화산폭발로 인한 이딸리아의 고대도시 폼페이의 비극을 통해 넉넉히 짐작할수 있지 않는가. 폼페이는 이딸리아 나폴리만에 남서쪽으로23km 떨어져있는 베수비오산 기슭에 자리잡고있었던 고대로마시기의 도시였다. 인구가 약 2만명 정도였는데 기원 63년의 대지진에 이어 기원 79년 베수비오산에서 화산이 폭발하면서 대량의 화산재가 하늘로 뿜겨 올라갔다가 비와 섞여서 억수로 쏟아져내리는바람에 폼페이는 완전히 형적을 찾아볼수 없을 정도로 매몰되여버리고말았다. 그뒤로 1600년 남짓하게 세월이 흘러간후인 1748년에 우연한 계기로 발굴되였던것이다.
발해 멸망의 원인에 대해 학계의 많은 학자들은 발해 통치계급내부의 내분에다가 백두산 화산폭발까지 겹쳐서 나라가 극도로 피페해졌고 설상가상으로 이 틈을 타서 거란의 철기(铁骑)가 들이닥치기까지 하여 끝내는 멸망하였다고 인정하였었다. 그런데 몇년전 일본의 최신 측정결과에 의하면 백두산 화산폭발은 문헌에 기록된, 거란의 돌연적인 침공으로 발해가 멸망한 시간인 926년보다 3년 내지 19년 늦게 일어났다는것이다.
그래서 발해의 멸망원인에 대한 탐구는 다시 오리무중에 빠지고말았다.
“해동성국” 발해 멸망의 진정한 원인은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