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jedda/20066008404


발해 멸망

발해의 멸망은 일부 쇠망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치주의 영향보다는 종족 차별주의가 큰 몫을 차지했다.

 

앞서 말갈의 개념에서도 설명했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말갈은 크게 말갈 7부와 함경도 말갈로 이루어진다. 처음에 고구려가 사용한 용어인 말갈을 중화주의적 관점에서 바꾸다보니 일률적으로 말갈 7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에 고구려가 지배한 영역의 말갈족은 사실 고구려의 지방민이라고 보면 적당하다. 딱히 고구려인과 말갈인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인 국인과 피지배층인 말갈의 차이인 것이다. 

따라서 발해는 국인을 우대하고 말갈인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주지 못함으로서 고구려가 완성시켰던 다민족국가로서의 포용성과 가능성을 부정해버렸다. 그 결과는 지방민들의 충성도 저하였다. 이것은 엄청난 전란을 겪으면서도 귀족들간의 내분외에는 그다지 지방의 반란이라는 것을 겪어보지 못한 고구려와 다르게 숱한 반란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발해는 국제정세를 잘못 읽었다.

 

당시 처음으로 민족 국가를 건설한 거란족을 과소평가하여 제대로 정보를 수집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거란을 위협할 수 있었던 하북 3절도사와 손을 잡으려는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야율아보기는 한인을 포용하여 그 군사력을 크게 증대시키고 발해를 상대로 국지전을 도발하여 그 국력을 끊임없이 시험하였다. 이런 서로의 인식 차이는 상대에 대한 정보량의 차이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발해 왕실이 왕위를 놓고 일치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면서 국론이 분열되었고 지방민들은 더이상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발해의 국방력은 최저한도로 추락했다.

 

이에 결정타를 가한 것이 백두산의 화산폭발이다. 인류 문명이래 최대의 화산폭발로 기록된 이 화산폭발은 8등급까지로 분류된 화산 중 7등급을 차지하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화산폭발과 함께 반경 50km의 지역이 용암에 잠기었고 날아가는 화산재와 쇄석물이 일본 열도까지 강타할만큼 발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발해의 군사력은 여전히 거란과 일전을 겨룰만한 저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925~926년동안 많은 발해인들이 전란과 추위를 피해 고려로 망명하였고, 특히 발해 왕자 대광현이 투항함으로서 이때 발해의 지배층마저 국가를 지킬 의지를 잃었음이 분명해졌다. 이에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침공하였고 극도로 사기가 저하되고 숫자도 보잘 것없어진 발해군을 격파하고 홀한성을 함락시켰다. 발해의 마지막 황제(발해는 군주를 황상이라 칭했다) 대인선과 황후는 야율아보기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다. 그를 본 야율아보기는 발해 황제 부처가 타고온 말의 이름을 그 둘에게 붙였다.

 

아리지와 오노고라고..

 

무너진 발해의 옛 땅에는 동단국을 세워 통치케 했으나 제국의 멸망은 좌시했으되 요의 통치는 거부한 발해 지방민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쳐 실질적으로 요동지방을 제외한 그 동쪽 지역에는 전혀 통치를 미치지 못했다. 이는 고려의 외교관 서희가 강동 6주를 넘겨받을 때 말갈이 고려와 요의 교통을 막고 있으니 이를 물리쳐주면 기꺼이 조공하겠다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 이후 발해인들은 200년간 독립 전쟁을 벌였다. 일시적으로 나라를 부흥시켰다가 요의 군대에 번번이 패배했지만 한 국가가 멸망하고도 200년간 독립 운동을 한 전례는 세계 역사에 없다.

그리고 요는 발해의 지방민들 즉 생여진이 세운 금에 멸망하게 된다.

[출처] 발해 멸망|작성자 a gentle bree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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