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hanpride.kr/a54/2763


발해의 연구
방학봉/ 중국 연변대학 교수

1930년생
중국 연변대학 역사과 교수(발해사 전공)
발해의 농업 및 상업에 관한 논문 다수


발해의 풍속과 습관에 대한 연구

발해국은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립된 후 마지막 왕 대인선20년(기원926년)에 이르기까지 15대 229년이란 긴 시기를 거쳤다. 경내에 5경 15부 62주가 있었으며, 발해가 가장 흥성할 때 의 영역은 남쪽은 니하(泥河)를 경계로 하여  신라와 접하였고 동쪽은 멀리 연해주, 하바롭스크 주에 이르는 동해안의 전 지역을 차지하였다. 서쪽은 거란과 경계를 같이 하였고 서남쪽은 압록강의 박삭구와 장령부의 남쪽 변계를 경계로 하여 당나라와 접하였으며 북쪽은 흑수말갈(黑水靺鞨)에 끼지 이르렀다. 발해는 지역이 넓고 국력이 강하였으므로 역사에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불렀다.
 
최근 국내외 사학자들은 발해사 연구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해의 민족 습관과 풍속에 대하여 쓴 저서와 논문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본문은 민속학의 각도에서 흩어져 있는 단편적인 사료들은 모아 담론하려한다.


예의 풍속
 
발해 사람은 인근의 다른 종족과 다른 예의 풍속(風俗)을 가지고 있었다. 돌궐은 왕을 커칸, 회홀은 왕을 군장, 토번은 왕을 찬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발해는 그들과는 달리 본 민족의 언어로 사사로이 부를 때에는 ‘가독부(可毒夫)’라고 하였고 조정에서 조회할 때에는 ‘기하(基下)’ 혹은 왕(王) ‘이라고 하였다. 왕의 명령은 ’교(敎‘)라 하고 왕의 아버지 ’노왕(老王) ‘, 어머니는 ’태비(太妃) ‘, 처는 귀비, 맏아들은 부왕 그 아래의 자식들은 왕자라고 불렀다.
 
발해에서는 절을 하는 예법 하는 비교적 엄격하였다. 고려 태조 11년 8월에 발해사람 은계종 등 여러 사람이 고려에 와서 투항하였다. 고려왕은 천덕전에서 그들을 접견하였는데 은계종은 감격한 나머지 고려왕에게 절을 세 번 하였다 그때 누가 말하기를 “절을 세 번 하는 것은 실례입니다”라고 이르니 이윽고 대상(大相) 함흥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지난날 선비들이 세 번씩 절을 한 것은 옛날의 예절이었네 ”라고 칭찬하였다. 발해 사람들이 나라가 망한 후에도 이와 같이 예절을 지킨 것을 보아 발해 존속기간에는 예의제도에 대한 풍속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라가 망하고 항복할 때에는 항복하는 의식과 예의제도가 따로 있었다. 거란 군사들이 발해에 쳐들어와 서울 상경(上京)을 포위에게 되자 발해의 마지막 왕 대인선은 흰옷을 입고 밧줄로 목을 맨 후에 양(羊)이 꿀게 한 다음 신하 300여명을 거느리고 성 밖에 진을 치록 있고 거란왕 아보기의 행영(전성사령부)에 가서 항복하였다. 아보기는 그들을 후하게 대접하여 성내로 돌려보냈고 규정대로 근시(시종) 강말달등 13명을 성내에 들여보내 무기를 점거하여 회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발해 군사들은 아보기가 파견한 13명의 거란군사를 죽이고 대인성은 보좌하여 다시 반기를 들었는데 아보기는 전군을 동원하여 성을 쳐서 점령하게 되었다. 대인선은 할 수 없이 아보기가 탄 말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아보기는 대인선을 거란의 수도로 압송하여 그곳에서 살게 하였고 대인선은 오로고 그의 처는 아리지라고 각각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런데 오로고와 이리지라는 이름은 대인선이 항복할 때 아보기와 그의 처가 탄 말의 말의 이름이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항복할 때 흰옷을 입었고 목을 맨 밧줄을 양이 끌게 하였을까? 흰옷은 상복(喪服)을 의미하여 색조가 선명한 것으로 실패를 승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양은 온순한 동물이어서 양이 끌게 한 것은 양처럼 온순하게 정복자 아보기에게 순종한다는 뜻이다. 지금도 싸움에서 패전하여 항복할 때는 백기(白旗)를 드는 법이 있는데 이는 흰옷을 입고 항복하던 옛날 습성이 전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 타기와 활쏘기

역사문헌기록에 의하면 말갈족은 주로 백두산과 흑룡강 일대에서 생활하였으며 그들의 선조는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즐겼다. 상주(상나라와주나라)시기에 숙신이라고 불렀는데 싸리나무와 돌 활촉을 사용 였고, 한위 시기에는 읍루라고 하였는데 그들은 활쏘기를 잘하여 활을 당기면 목표물을 모두 맞혔다. 남북조시기에는 물길이라고 불렀으며 활을 사용해서 활을 사용해서 수렵활동을 잘하였다. 수당시기에는 말갈이라고 불렀는데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말갈 사람들이 가장 애호하는 활동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중원지구(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지대)의 사람들은 ‘말갈인 말을 몰아 달리는 것을 낙으로 사라는 풍속이 있다’ 라고 까지 평가하였다. 이러한 풍속습관 속에서 사냥매, 사냥개, 좋은 말, 좋은 활은 모두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진귀한 물건이었으며 유명한 해동청은 사냥을 하는 진귀한 매로서 당나라나 요나라에 공물로 바치기도 하였다. 일본을 방문한 발해 사신사도몽 등은 일본 천황의 초청을 받고 일본 궁정에서 거행한 활 쏘는 ‘대사, ‘내사’ 등의 대회에 참가하였고 대회가 끝난 후 사도몽 등은 상을 받았다.


혼인과 가정
 
발해의 혼인제도는 일부일처제가 엄격하게 집행되었다. 발해의 부녀자들은 그 성격이 사납고 질투가 심했다고 역사서적에 기록 되어 있는데 그들은 10명이 모여 자매관계를 맺고 남편들 이 첩을 두거나 다른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엄밀히 살피는 방법으로 혼인과 가정에서의 여성들의 지위를 지켰다.
 
남편이 첩을 두거나 다른 여자와 부정한 관계가 있는 것을 발견하면 부녀들은 음식에 독약을 넣어 사랑하던 남편을 죽이는 경우가 있었다. 만약 남편이 첩을 두거나 다른 여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어도 그의  처가 아직 각성 못하고 있을 때에는 나머지 9명의 부녀들이 모여 그 남자를 호되게 욕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서로 앞을 다투어가며 미워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이처럼 일ㄹ부일처제가 엄격하게 집행된 것은 발해의 무덤에서도 충분히 찾아볼 수 있다. 남녀를 합장한 무덤은 1남1녀이고 1남다녀는 하나도 없으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발해의 여성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에 일정한 자유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숙신과 읍루시기에는 시집가고 장가들때에 남자가 먼저 새 깃을 여자를 머리에 꽂아준다. 그러면 여자는 남자가 전달한 사랑의 뜻에 동의 한다고 화답하고 그 후에 예를 갖추어 혼례를 치른다. 물길 때의 혼인풍속에는 또 새로운 형식이 있는데 결혼 첫날 저녁에 남자가 여자 집에 가서 여자의 유방을 쥐면 정식부부로 인정되었다. 숙신, 읍루, 물길 때의 혼례풍속이 발해 때에는 어떻게 이어졌는가는 문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 그러나 풍속과 습관이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지속되는 것이므로 숙신, 읍루, 물길 때의 혼례풍속이 능히 발해 때에도 있었으리라고 믿어진다.


음식

세계 어느 민족이나 모두 그들의 독특한 음식습관이 있다. 한족(漢族)은 물밴새을 좋아하고 조선족은 찰떡을 좋아하며 몽고족은 양고기를 좋아하고 허저족은 물고기를 좋아한다. 그러면 발해 사람은 어떤 음식을 좋아하였는가? 

발해의 왕공귀족들은 명절, 귀빈을 맞이할 때, 전쟁에서 큰 승리를 얻었을 때, 풍년이 들었을 때, 사사로운 경사가 있을 때마다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어떻게 연회를 베풀고 무엇을 먹었는가, 백성들은 무엇을 즐겨 먹었는가는 자세한 문헌기록이 없는가는 자세한 문헌기록이 없으므로 알기는 어려우나 미묘한 자료를 더듬어 보면 대략적인 실마리는 찾아볼 수 있다.

발해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좋아하였다. 발해족의 한 선조인 숙신 사람들은 돼지를 많이 길러 그 고기를 먹었고, 돼지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도 방지하였다. 발해 때에 와서는 돼지를 더 많이 길렀으며 주요한 음식물 중의 하나였다. 

또한 발해 사람들은 쑥떡을 먹었다. 매년 5월5일 단오 날이면 쑥잎을 뜯어 찹쌀과 섞어 떡을 만들어 먹었다. 한족은 단오절에 송편을 먹는다. 송편이란 기장쌀을 갈대잎, 옥수수잎, 참나무잎 같은 데 싸서 가마에 넣어 쪄서 먹는 것인데 그 싼 형식이 3각형으로 각이 졌으므로 각서(角黍)라고도 한다. 발해 사람은 한족과 달리 독특한 맛이 있는 쑥떡을 만들어 먹었다.

발해 사람들은 술을 잘 마셨다. 물길 때에 벌써 5곡으로 술을 빚었는데 마시면 취하였다고 하며 발해시기에 와서도 술 마시는 습성이 계속 성행하였다. 일부 고급관리들 가운데 많이 마시는 습성이 성해하여 한번 마시기 시작하면 몹시 취하고야 말았다.

발해 사람들은 바다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고기를 먹는 것을 좋아 하였다.

발해 사람들은 된장을 좋아하였다. 책성(오늘의 훈춘현 팔련성)의 된장은 유명해서 당나라 사람들도 책성의 된장이 좋다고 칭찬하였는데 된장의 중심 산지는 오늘의 훈춘현이었다.


꽃기르기

발해 통치계급의 상층인물은 꽃을 기르는 것을 하나의 취미로 여겼다. 그들은 주로 목단과 연꽃을 많이 길러서 한때 발해의 수도였던 화룡현 서고성과 훈춘현 팔련성의 성내에 아름다운 꽃동산과 늪을 만들었고 목단과 연꽃을 기르고 관람하였다. 서고성과 팔련성 성터에서 연꽃을 기르고 관람하였다. 서고성과 팔련성 성터에서 연꽃무늬막새와 ‘4존불’이 나왔는데 4존불은 연꽃 속에 돋보이게 새긴 것이다.

발해의 건축물과 부처를 조각하고 장식한 것에는 거의 목단과 연꽃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의식형태는 객관적 사물이 반영해준다. 당시 목단과 연꽃을 기르고 관람하였기 때문에 건축물과 부처를 조각하는 데 이가 반영된 것이며, 우리나라 동북지구에서 목단과 연꽃을 재배한 역사를 살펴보면 발해 때부터 시작하였다. 연변지구에서 목단과 연꽃을 재배한 역사도 발해 때부터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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