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blog.naver.com/spiritcorea/130070697980 
*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7>후고려기(後高麗記)(20) - 광인"에서 정효공주묘 부분만 가져왔습니다.

정효공주묘

그리고 이 해(792년)에 발해에서는 정효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굴된 것은 1980년의 일이다. 길림성 연변 조선족자치주 화룡현 용수공사 용해대대 용두산 위. 남북향 170도의 장축을 지니고 있으며, 벽돌과 판석을 써서 만들었는데 정혜공주의 것과는 달리 당조의 '벽돌'무덤 양식을 도입해서 무덤을 만들었고, 묘도ㆍ묘문ㆍ연도ㆍ묘실과 함께 무덤 위에다 벽돌로 또 '탑'을 만들었다는 것이 고려와 당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발해만의 독특한 양식이다.
 
지하로 파내려간 다음에 벽돌과 돌로 무덤의 묘실 즉 '안칸'을 만들었는데, 남북으로 긴 장방형 모양으로 동서너비가 2.1에 남북길이가 3.1m이고 벽의 높이는 서로 다르지만 동서가 1.4m에 남쪽이 1.66m이고 북쪽은 1.6m. 벽과 3단평행고임을 모두 '벽돌'로 쌓아서 그 위에 큰 판돌을 덮었으며, 안에 남북 2.4m 동서 1.45m 높이 약 0.4m의 관대를 놓았다.(시신은 이 관대 위에 놓여 있었다)
 
안칸 입구를 돌문으로 막고 바깥문에서부터 지표면까지 마치 계단처럼 수평거리 7.1m의 바깥길을 냈다.(아마 이 문도 원래는 막혀 있었겠지만....) 무덤 위에 세워진 탑은 지금 탑신은 붕괴되고 기단부만 남았는데, 기단 평면이 남북으로 5.65m에 동서 5.5m이고 크기는 가로세로 2.7m * 2.6m, 남아있는 높이는 0.48m로 터무니없이 작다. 이 무덤도 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부장품 같은 것은 흙으로 만든 인형조각이나 금동장식, 목관에 장식했을 금동못과 쇠못, 쇠조각, 그리고 칠기조각이며 토기파편 같은 것이 나오긴 했지만 이미 도굴당해서 별 재미는 못 봤다나. 그나마 무덤의 주인을 밝혀줄 '묘지명'이 발견된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었다.
 
[夫緬覽唐書, 嬀汭降帝女之濱, 愽詳丘傳, 魯舘開王姬之筵. 豈非婦德昭昭, 譽名期於有後? 母儀穆穆, 餘慶集於無疆? 襲祉之稱, 其斯之謂也.]
무릇 오래 전에 읽었던 《상서[唐書]》를 돌이켜보면 규수(嬀水)의 물굽이는 제녀(帝女)를 내려보낸 물가터요,  널리 《좌전[丘傳]》을 상세히 보면 노관(魯館)은 왕희(王姬)를 시집보낸 혼례터라[開王姬之筵]. 아내로서 덕이 환하고 뚜렷할지면[昭昭] 명예로운 이름[譽名]이 어찌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인가. 어머니로서 규범이 단정하고 공경스러울지면[穆穆] 선대가 쌓은 은혜[餘慶]가 어찌 무궁하게 전해지지 않을 것인가. 조상들의 복을 물려받음[襲祉]이란 바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효공주묘지명』 병서(幷序)
 
뭐야, 뭐 이런 게 다있어? 사람만 다르지 내용은 거의 똑같잖아? 
 
[公主, 稟靈氣於巫岳, 感神仙於洛川. 生於深宮, 幼聞婉嫕. 瓌姿稀遇, 曄似瓊樹之叢花, 瑞質絕倫溫, 如崑峯之片玉. 早受女師之敎, 克比思齊, 每慕曹家之風, 敦詩悅禮. 辨慧獨步, 雅性自然. ▨▨好仇, 嫁于君子. 摽同車之義, 叶家人之永貞. 柔恭且都, 履愼謙謙. 簫樓之上, 韻調雙鳳之聲, 鏡臺之中, 舞狀兩鸞之影. 動響環珮, 留情組紃. 黼藻至言, 琢磨潔節. 繼敬武於勝里, 擬魯元於豪門. 琴瑟之和, 蓀蕙之馥.]
공주는 무산(武山)에서 영기(靈氣)를 이어받고, 낙수(洛水)에서 신선(神仙)에 감응받았다. 궁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순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은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왔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난 한 조각의 옥처럼 온화하였다. 일찍이 여사(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고 하였고[思齊], 매번 한(漢) 반소[曹家]를 사모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예악(禮樂)을 즐겼다. 총명한 지혜는 비할 바 없거니와 우아한 품성은 타고난 것이었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그리하여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부르는 것 같았고[雙鳳之聲], 경대(鏡臺) 가운데에서 한 쌍의 난조[兩鸞之影]가 춤추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면 몸에 단 패옥이 소리를 냈고, 머물 때면 의복의 띠를 조심하였다. 문장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서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한(漢) 원제(元帝)의 딸 경무(敬武)처럼 아름다운 봉지(封地)에서 살았고, 한 고조(高祖)의 딸 노원(魯元)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였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왔다.
『정효공주묘지명』
 
정혜공주가 그러했듯, 정효공주도 개인적인 삶이 화목하지 못했다. 고귀한 혈통을 타고난 황녀라고 다 행복한 삶만 사는 것은 아님을 동서고금을 통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태어난 날 빠르다고 죽는 날까지 빠르란 법 없고, 왕후장상이나 천한 백정놈이나 다 한번 태어나면 한번은 죽는 것이고... 어차피 태어나서 결국 죽게 되어있다면 그래도 죽는 날까지 나름 편안하고 즐겁게 살다가 죽어도 분이 풀릴까 말까한데 죽을 거 왜 사냐고 물어보면 그저 그런 집에 태어나서 왕족이나 귀족같은 편안한 삶을 누리지도 못한 채 평생 힘들게 힘들게 고생만 하다가 이제 막 소원을 이루려는 순간에 켁 죽어버리니 더러워서 못 살겠다네.
 
[誰謂夫聟. 先化无終, 助政之謨. 稚女又夭, 未延弄瓦之日. 公主出織室而灑淚, 望空閨而結愁. 六行孔備, 三從是亮. 學恭姜之信, 矢銜杞婦之哀. 悽惠于聖人, 聿懷閫德, 而長途未半, 隙駒疾馳, 逝水成川, 藏舟易動. 粵, 以大興五十六年夏六月九日壬辰, 終於外第, 春秋三十六. 諡曰貞孝公主. 其年冬十一月廿八日, 己卯陪葬於染谷之西原, 禮也.]
누가 일렀던가, 남편이 먼저 돌아갈 것을. 지모(智謀)를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어린 딸마저 일찍 죽어, 미처 실패를 갖고 놀 나이도 되지 못했구나. 공주는 직실(織室)을 나와 눈물을 뿌렸고 빈 방을 바라보며 수심을 머금었다. 육행(六行)을 크게 갖추고 삼종(三從)을 지켰다. 공강(共姜)의 신(信)을 배웠고, 기부(杞婦)와 같은 애처로움을 품었다. 성인(聖人)의 은혜를 입어 스스로 부덕(婦德)을 품고 살았건만, 절반도 되지 않은 인생길에 세월은 달음질치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에 꼭꼭 감춰둔 배를 쉽게 움직이나니. 아아, 대흥(大興) 56년(792) 여름 6월 9일 임진일(壬辰日)에 외제(外第)에서 사망하시니 나이는 36세라. 이에 시호를 정효공주(貞孝公主)라 하고 그 해 겨울 11월 28일 기묘일(己卯日)에 염곡(染谷)의 서원(西原)에 배장하였으니, 예(禮)로다.
『정효공주묘지명』
 
인생은 절반밖에 안 갔는데 세월은 저만치 달려나가고, 조용히 흐르는 물도 모이면 냇물이 되어 계곡 깊이 숨겨둔 배를 움직이듯ㅡ. 시간이라는 것은 너무도 빠르게 흘러가버리고 마는 것.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었는데 정작 내 몸은 젊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제 갈길로 떠나 뿔뿔이 흩어지고 어디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음을 마음껏 보여줄 수도 없고 관심도 가져주지 않는다.
 
[皇上罷朝, 興慟避寢○懸. 喪事之儀, 命官備矣. 挽郎鳴咽遵阡陌, 而盤桓轅馬, 悲鳴顧郊野, 而低昂喻以鄂長, 榮越崇陵, 方之平陽, 恩加立厝. 荒山之曲, 松檟森以成, 行古河之, 隈泉堂邃. 而永翳惜, 千金於一別, 留尺石於萬齡. 乃勒銘曰.]
황상께서는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자지 않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장례를 치르는 의식은 관청에 명하여 완비하도록 하였다. 상여꾼의 명인(鳴咽) 소리 발길따라 맴돌건만 어정거리는[盤桓] 수레 끄는 말[轅馬]의 슬피 우는 소리가 교야에 가득하네. 한의 악읍[鄂長]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넘고, 당의 평양(平陽)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황산(荒山)의 골짜기에 솔과 개오동이 빽빽히 줄지어 섰는데, 고하(古河)가 굽이치는 곳에 무덤은 깊숙히 감추어져 있구나. 천금같은 공주와 이별하기 아쉬워, 비석을 세워 영원히 남기고자 명문(銘文)을 새기나니.
 
不顯烈祖     불현(不顯)하신 열조께서 
功等一匡     천하를 통일하였고,
明賞愼罰     상벌을 밝혀 신중히 하시니
奄有四方     엄정함[奄]이 사방에 미쳤도다.
爰及君父     군부(君父)에 이르러서는
壽考無疆     만수무강하시어
對越三五     삼황오제[三五]와 짝하였고
囊括成康     성왕과 강왕[成康]을 포괄하시니
<其一>       <이것이 첫째이다.>
 
惟主之生     공주께서 태어나실 때를 생각하니
幼而洵美     어려서부터 참으로 아름다웠고
聰慧非常     총명하고 슬기로움이 비상하시어
博聞高視     널리 듣고 높이 보셨다네.
北禁羽儀     궁궐[北禁]의 모범 되시고
東宮之姉     동궁(東宮)의 누나 되시니
如玉之顏     옥같은 그 얼굴
蕣華可比     무궁화만이 비겼다네.
<其二.>      <이것이 둘째이다.>
 
漢上之靈     한강 신녀[漢上]의 영기(靈氣)를 품고
高唐之精     고당 신녀[高唐]의 정기를 이었으며,
婉之熊     고운 자태 지니시고
閫訓玆成     현성(玆成) 속에 자랐다.
嬪于君子     군자에게 시집가
柔順顯名     유순하기로 이름났으며
鴛鴦成對     원앙새가 짝을 이루고
鳳凰和鳴     봉황새가 울음에 화답하듯 하였다.
<其三.>      <이것이 셋째이다.>
 
所天早化     하늘이 일찍 변화한 바 
幽明殊途     유명(幽明)을 달리 하시니
雙鸞忽背     한 쌍의 난조(鸞鳥)가 홀연히 등을 돌리고
兩劍永孤     쌍검이 영원히 떨어져버렸다.
篤於潔信     순결과 정절에 돈독하여
載史應圖     역사책에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길 만하며,
惟德之行     부덕을 행함에
居貞且都     정조가 있고 아름다왔다.
<其四.>      <이것이 넷째이다.>
 
愧桑中詠     음란한[桑中] 노래를 부끄러워 하고
愛栢舟詩     수절의 시를 즐겨하였으며,
玄仁匪悅     크게 어질고 근심으로 즐거워하지 않는 중에
白駒疾辭     빛깔이 흰 망아지가 빠르게 질주하매
奠殯已畢     존빈(奠殯)도 세상을 하직하였다.
卽還靈轜     장례가 이미 끝나 상여가 돌아갈 때,
魂歸人逝     혼도 사람들도 모두 돌아가니
角咽笳悲     뿔피리 소리 구슬프고 호드기 소리 처량하다.
<其五.>      <이것이 다섯째다.>
 
河水之畔     강물의 가장자리
斷山之邊     단산(斷山)의 옆에서
夜臺何曉     묘광[夜臺]은 언제 광명을 볼 것이며
荒隴幾年     봉분[荒隴]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森森古樹     빽빽한 고목들과
蒼蒼野煙     연기 자욱한 들판을 보며
泉扃俄閟     무덤 문을 갑자기 닫으니
空積悽然     처량한 감정 불현듯 쌓이네.
<其六.>      <이것이 여섯째이다.>
『정효공주묘지명』
 
정효공주의 무덤에서는 여러 인골이 수습되었는데, 서른 한 개의 인골 가운데 26개는 남자 것이고 여자 것은 다섯 개,
골격으로 봐서는 남자의 살아생전 키는 161cm였고 여자의 키는 156cm, 치아로 추정한 결과 이들의 나이는 대략 25세에서 45세 사이로 추정된다고 한다. 정효공주와 그 부군의 유골임에 틀림없다고 학자들은 결론지었다. 
 
<정효공주묘에서는 발해 고분 가운데서는 유일하게 '벽화'가 확인되었다>
 
무덤이 주목받은 이유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밝혀주는 명문이 발견된 것 말고도, 이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 때문도 있었다. 모두 열두 명이 정효공주 무덤 안에 그려져 있었는데, 무덤 안길의 동서 벽과 안칸 동서벽, 그리고 남쪽 끝과 북벽에 모두 벽화를 그렸다. 그리고 그들 인물들은 모두 당풍의 옷을 입고 있어 발해의 상류층이 정효공주무덤이 조성된 무렵에는 이미 당의 문화를 널리 수용해 그 복식까지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정혜공주묘나 화룡현 하남둔 고분에도 벽화를 그린 흔적이 남아있긴 한데, 밑바탕으로 바른 회칠이 떨어져나가 완전히 멸실되고 파편만 남았는지라 그나마 온전한 것은 정효공주묘의 벽화다. 벽에 백회를 발라 그 위에 열두 명을 채색으로 묘사했는데, 예리한 긁개같은 것으로 밑그림을 그린 위에 적ㆍ청ㆍ녹ㆍ흑ㆍ백색의 색깔을 칠하고 다시 먹선으로 윤곽을 명료하게 나타내는 방법(오늘날 한국화 그리듯이)으로 그렸는데, 윤곽을 스케치하는 방법만 다르지 대체로 수산리무덤 등 고려 벽화에서 발휘된 전통적인 화법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란 지적이 있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은 대부분 무기류, 칼이나 철퇴 같은 것을 들고 화살통도 차고 있는 모습이지만 악기를 들고 있는 사람도 더럿 보이는데, 아마 당악을 수용한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재미있는 건 저기 그려진 위사(衛士), 그러니까 팔을 걷어붙인 채 몸에는 옷깃이 둥근 단령을 입고 머리는 '말액'이라고 해서 상투를 틀어올려 두건으로 싸맸으며 오른팔에는 철퇴 비슷한 것을 들고 있는 인물상의 '성별'이 실은 남자가 아닌 여자라는 주장이 있다는 것. 중국 학자가 주장한 건데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얼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데다 얼굴도 뽀샤시하고 갸름하며 입술에도 약간 붉은 빛이 감도는 것이 아무리 봐도 남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실은 남장을 한 여자로서 정효공주를 수행한 위사의 모습을 벽화에 그려넣었다는 것이다.
 
글쎄, 그게 뭐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정말 그렇다면 재미있긴 하다. 공주를 수행한 위사들이 모두 남장한 여자들이었다면 이들이 공주의 경호까지도 맡았던 것인지, 그렇다면 발해는 실로 여권이 신장된 국가로서 세계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나라가 아닐 것인가. 여자들이 말을 탈 때 말등 한쪽에서부터 다소곳한 모습으로 걸쳐앉는 것이 보기 흉하다며 '앞으로는 남자들처럼 다리를 벌려서 타라'고 한 측천무후보다도 훨씬 앞서간 나라로서 여자들도 남자들처럼 당당히 공주를 호위할 일익을 맡겼던 나라임에 틀림이 없으리니.
 
...


<정효공주묘에서 나온 구리거울.>
  
여담이지만 정효공주를 칭송하면서 묘지명의 찬자가 든 인물 가운데 경무공주는 《한서》에 나오는 한 선제의 딸이자 원제의 여동생이다. 처음에 시집간 남편 장림(張臨)이 죽자 설선(薛宣)에게 다시 시집갔고, 몰래 남자하고 붙어먹은 일도 있단다. 지금이야 '그게 뭐?'라고 하지만 당시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지아비를 두 명 섬긴 것도 모자라서 자기 지아비 놔두고 딴 남자와 놀아난 속된 말로는 화냥년보다 더한 '썅년'인거지. 그런 경력이 있는 경무공주와 정효공주를 비긴 것은 묘지명을 새긴 사람의 오류인듯.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이게 자칫 알려졌다간 죽은 사람 욕보였다고 묘지명 찬자의 목이 무사했을 리는 없다.


Posted by civ2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