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용이 "정혜공주묘"에 관한 얘기인지라 제목을 좀 바꿔 봤습니다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103>후고려기(後高麗記)(16)
2009/06/06 02:17 광인

[四月十二月又遣使朝唐, 累加司空太尉.]
4월과 12월에 또한 당에 사신을 보내어 조하하였다. 거듭 사공태위(司空太尉)가 더해졌다.
 
보력 7년 4월에 당에 파견된 사신은 특별한 소식을 갖고 있었다. 흠무왕의 딸 정혜공주가 죽었다는 부고였다.
 

<정혜공주묘지명>
 
발해인들이 직접 남긴 자료가 그리 많지를 못하다보니 그런 자료가 나오기라도 하면 그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인 처지다. 그 와중에 발굴된 정혜공주의 묘지명도 그런 '부르는 게 값'인 귀하디귀한 발해 금석문으로 평가받았다. 발굴된 것은 1949년 8월. 화룡현 계동중학과 연변대학 조사과의 육정산고분군에 대한 정리작업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묘비의 발견과 함께 육정산 2호분은 단번에 '정혜공주묘'로 격상되었다. 도굴되고 파괴된 무덤이 그나마 그 주인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정혜공주묘 안칸 천정. 현무암과 용암을 주 재료로 써서 벽면을 쌓고 백회를 발랐다.>
 
정혜공주묘에서 특히나 돋보이는 것은 무덤의 축조양식, 그 중에서도 천장 건축에 쓰인 기법이다. 무덤은 약간 경사진 지면을 다듬어서 지하에다 묘실을 만들었는데, 무덤 규모는 길이가 280에서 294cm쯤 되고, 너비는 260에서 284cm 되는 직사각형 구조. 높이는 바닥에서 한가운데 천장까지 260cm를 유지하고 있다. 벽에 발랐던 백회는 다 떨어져나가고 없고, 바닥에는 장방형 벽돌을 깔고 그 위를 목탄과 모래로 덮었다. (여기까지가 정혜공주의 시신을 안치했던 묘실 구조다) 묘실 남쪽 벽 한가운데에 길이 174cm에 너비 110cm, 높이 140cm의 중간길[연도]를 만들어서 평천정으로 천장을 덮었고, 연도 앞의 무덤길[墓道]은 길이 11m에 너비는 245cm다. 이미 고려의 고분축조에서도 쓰였던 '평행삼각고임' 방식을 그대로 답습해서 쓰고 있다는 점이 고려로부터 발해로 이어지는 문화적 연계성을 입증해주는 증거로 주목받았다.
 
[夫緬覽唐書, 嬀汭降帝女之濱, 博詳丘傳, 魯舘開王姬之筵. 豈非婦德昭昭, 譽名其於有後? 母儀穆穆, 餘慶集於無疆? 襲祉之稱, 其斯之謂也.]
무릇 오래 전에 읽은 《상서[唐書]》를 돌이켜보건대 요(堯)는 두 딸을 규수(嬀水)의 물굽이에 내려보내 순(舜)에게 시집보냈고, 《좌전(左傳)》을 널리 상세히 보건대 주(周) 천자가 딸을 제(齊)에 시집보낼 때 노(魯) 장공(莊公)이 노관(魯館)을 지어 그 혼례를 주관하였다. 부녀자로서 갖춘 덕이 밝고도 밝으면 명예로운 이름이 어찌 후세에 전해지지 않을 것인가? 어머니로서 갖춘 규범이 아름답고 아름답다면 선인(先人)들이 쌓은 은혜가 어찌 무궁하게 전해지지 않을 것인가? 조상의 복을 물려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가리킴이다.
<정혜공주묘지> 병서(並序)
 
재미있네, '상서(尙書)'를 '당서(唐書)'로 적고 있어. 대조영의 아버지이자 발해라는 나라의 건국조나 다름없는 진국공의 휘(諱)가 중상(仲象)이니까 '상(象)'이라는 글자를 기휘하는 것은 알겠는데, '상'자와 발음만 같은 '상(尙)'자까지 발해에서는 기휘한 것일까. 그렇다고 한다면 대조영의 이름자는 어떻게 되지? '영기(靈氣)'라는 글자에서 '영'은 대조영의 '영(榮)'과 동음이의자이니 기피 대상인데도 기피하지 않았다. 묘지명 속에서 '융공(戎功)'이란 단어는 '큰 공훈이나 업적'을 가리킨다는데, 이 정도라도 선대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데에는 아무 무리가 없겠지만 굳이 끼워맞추자면 흠무왕의 아버지인 무왕의 휘인 '무예(武藝)'의 '무(武)'자를 기휘한 것인가 한다.
 
[公主者, 我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之第二女也.]
공주는 우리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의 둘째 따님이시라.
<정혜공주묘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그것은 유교적인 왕도정치의 구현자로서 함께 불교적 전륜성왕으로 군림하기를 바랬던 흠무왕의 통치 방식을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문왕의 딸로서 젊은 나이에 간 정효공주 역시 그 묘지명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고 칭하고 있는데, 당조의 경우는 일찌기 693년에 무측천이 '금륜성신황제(金輪聖神皇帝)'라고 불린 일이 있고, 명황(현종)은 개원 원년(713) 11월에 군신들로부터 '개원신무황제(開元神武皇帝)'라는 존호를 받았으며, 당 숙종은 건원 2년(759) 정월에 '건원대성광천문무효감황제(乾元大聖光天文武孝感皇帝)', 대종도 보응 2년(763) 7월에 '보응원성문무효황제(寶應元聖文武孝皇帝)'라는 존호를 받았음이 《당서》및 《자치통감》에서 확인된다. 대개 연호를 개원한 원년이나 그 이듬해에 존호를 받는 것에서 흠무왕도 보력 원년(774) 이후에 저러한 존호를 받았을 것이라고 한다.
 
[惟祖惟父, 王化所興, 盛烈戎功, 可得而論焉. 若乃乘時, 御辨明齊, 日月之照臨, 立極握機, 仁均乾坤之覆載. 配重華而旁夏禹, 陶殷湯而周文. 自天祐之, 威如之吉.]
할아버님을 그리고 아버님을 생각하면 왕화(王化)의 흥한 바나 성렬하신 무공[戎功]은 가히 논할 수가 있습니다. 뜻하지 않게[若乃] 때를 맞이하여 기회를 얻으시어[乘時], 어변(御辨)의 명제(明齊)하심은 일월(日月)이 내려 비치는 것 같았고, 군진의 위에[極握機] 서셨으나 인을 고르게 하심은 천지[乾坤]가 만물을 포용하는 것[覆載]과 같았습니다. 우순[重華]과 짝할 만하고 하우(夏禹)와 닮았으며, 은의 탕왕[殷湯]이나 주 문왕[周文]과 같은 도략[陶]을 갖추었습니다. 하늘의 도우심으로 위엄을 베풀어 길하게 되었습니다.
<정혜공주묘지>
  
발해라는 나라를 이루신 개국성조들. 
고려 멸망이라는 국난을 맞아 속말수에서부터 머나먼 영주까지 와서 고려와 말갈(예맥)의 옛 유민들을 이끌고 그 위험한 길을 떠나오신 진국공의 아들 대조영이 당조에서 보낸 추격군을 격퇴하여 뿌리를 뽑으시고 동모산, 옛 계루의 땅에 도읍하여 위대하신 국호를 진(震)이라 밝히사, 사방에서 포대기를 짊어지고 아이를 업고 찾아오며, 남자는 등에 지고 여자는 머리에 이고 앞다투어 홀한주 땅의 백성 되기를 바랬습니다.
 
태조(太祖) 고왕의 왕업을 이어 나라를 이어받으신 분은 적자이신 계루군왕 무예. 앞서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나중에나마 귀의해온 마음을 아끼신 분께서 인안(仁安)의 기치로 나라를 다스리시고, 실로 전쟁을 그치게 하는 '무(武)'의 참뜻을 아시고서 자강(自强)의 길로 나아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리셨습니다. 이웃 나라는 화호를 맹세하고 오랑캐는 두려워 스스로 복속하였으며, 이로서 사방이 안정되고 동명의 구토가 모두 회복되었으며, 부여의 유속은 지시하지 않아도 스스로 회복되어 옛 나라가 다시 살아난 것과 같았습니다. 비록 그 성씨는 바뀌었을 망정 문물과 제도는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종족은 변했다 해도 이어받은 뜻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이루는 것은 성현의 교화와 어버이의 가르침이요, 나라를 이루는 것은 선왕의 교화와 문물입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가 깊고 샘물의 근원이 깊어서 혹심한 가뭄과 세찬 바람에도 꺾이거나 마르지 아니하고 천년의 거목을 이루고 대천(大川)과 대독(大瀆)이 되어 대해(大海)의 일부를 이룹니다. 4대를 이어 이룬 성업이 무궁할 것을 신께 바라고 부처님께 기원하옵건대 삼한 땅에 이 나라의 이름이 세세만년 영원토록 이어지기를 바라고 또 바라옵기에 이 글을 지어 바치나이다. 
 
............. 라고 발해 선대왕들에게 바치는 제문(祭文)을 간단히 지어봤다. 그래봤자 평생 이런 제문을 지을 일은 없겠지만.
 

  

 
정혜공주 무덤은 이미 도굴당한 뒤였지만, 무덤의 주인을 밝혀줄 묘지명이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역사적인 수확을 남겨주었다 하겠다.
 
무덤의 축조양식이라던가, 무덤에서 나온 돌사자상은 고려 영명사터의 돌사자상과 생김새가 닮아있다느니 하는 것으로 고려와 발해의 문화적 연계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고려에서 그런 것처럼 무덤에 벽화라도 남겨주십사 했지만 애석하게도 정혜공주의 무덤에서 '벽화'는 확인되지 않았다. 아니, 있었는데 도굴 때문에 없어졌다고 해야겠지. 발해 고분에서 '벽화'가 발견되는 건 정혜공주보다 뒤에 죽은 정효공주 때부터다.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무덤은 같은 육정산고분군에 속해있는데, 여기서 서남쪽으로 한 10km쯤 가면 성산자산ㅡ옛날 발해의 국조였던 천통 황제, 대조영이 처음 나라를 세웠던 동모산 영승유적이 나온다. 《당서》및 《발해고》에 나온 '구국(舊國)'이다. 정혜공주가 흠무왕의 차녀이고, 정효공주는 4녀로 정혜공주가 언니뻘인데, 둘이 배가 같았는지 달랐는지까지는 묘지명에서 수록을 안 해준다. 하긴 필요가 없으니까. 
 
아무튼 묘지명 얘기로 다시 돌아가서, 정혜공주는 일단 대흥 원년ㅡ그러니까 할아버지 무왕이 죽고 아버지 흠무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던 서기 737년에 태어났다. 발해라는 나라를 다스리는 '가독부'의 차녀로서. 묘지명에는 그녀를 "동궁의 누나"라고 적었다. 동궁이란 태자, 즉 흠무왕의 아들로 일찍 요절한 대굉림을 말한다. 
 
[公主稟靈氣於巫岳, 感神仙於洛川. 生於深宮, 幼聞婉嫕. 瓌姿稀遇, 曄似瓊樹之叢花, 瑞質絕倫溫如崑峯之片玉. 早受女師之敎, 克比思齊, 每慕曹家之風, 敦詩悅禮. 辨慧獨步, 雅性自然. ▨▨好仇嫁于君子. 標同車之義叶家人之永貞柔恭且都履愼謙謙簫樓之上韻調雙鳳之聲鏡臺之中舞狀兩鸞之影, 動響環珮, 留情組紃. 藻至言琢磨潔節繼敬武於勝里擬魯元於豪門琴瑟之和蓀蕙之馥]
공주는 무산(武山)에서 영기(靈氣)를 이어받고, 낙수(洛水)에서 신선에 감응받았다. 궁중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유순함으로 이름이 났다. 용모는 보기 드물게 뛰어나 옥과 같은 나무에 핀 꽃들처럼 아름다왔고, 품성은 비할 데 없이 정결하여 곤륜산(崑崙山)에서 난 한 조각의 옥처럼 온화하였다. 일찍이 여사(女師)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능히 그와 같아지려 하였고, 매번 한(漢) 반소(班昭)를 사모하여 시서(詩書)를 좋아하고 예악(禮樂)을 즐겼다. 총명한 지혜는 비할 바 없고, 우아한 품성은 저절로 타고나셨다. 공주는 훌륭한 배필로서 군자에게 시집갔다. 그리하여 한 수레에 탄 부부로서 친밀한 모습을 보였고, 한 집안의 사람으로서 영원한 지조를 지켰다. 부드럽고 공손하고 또한 우아하였으며, 신중하게 행동하고 겸손하였다. 소루(簫樓) 위에서 한 쌍의 봉황새가 노래부르는 것 같았고, 경대(鏡臺) 가운데에서 한 쌍의 난조(鸞鳥)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움직일 때면 몸에 건 패옥이 소리를 냈고, 머물 때면 의복띠를 여몄다. 문장이 뛰어나고 말은 이치에 맞았으며, 갈고 닦아 순결한 지조를 갖추고자 하였다. 한 원제(元帝)의 딸 경무(敬武) 공주처럼 아름다운 봉지(封地)에서 살았고, 한 고조(高祖)의 딸 노원(魯元) 공주처럼 훌륭한 가문에서 생활하였다. 부부 사이는 거문고와 큰 거문고처럼 잘 어울렸고, 창포와 난초처럼 향기로왔다.
<정혜공주묘지>
 
발해의 상류 문화는 신라가 그러했듯 당조의 문화에 물들어 있었을 것이다. 당조에서 하는 것처럼 시서와 예악을 즐기고, 이국의 노래와 무용을 즐기며 여인네들은 당조의 옷을 본떠입고 그네들의 아름다움을 과시한다. 사내들은 모이면 서로 한문으로 된 문장을 읽고 한문으로 한시를 지으며 유교 경전에 대한 이해수준을 가지고 서로의 교양을 평가한다. 그 외의 활쏘기와 격구, 매사냥을 즐기고 하는 모습은 고려 때의 그것을 완연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복장은 그렇지 않다. 상류층 거의 모두가 당조에서 입는 것과 같은 단령-복두로 대표되는 호복(胡服)을 입고 국가제도 역시 당조의 것을 모방해 설치하여 따르고 있다. 유교에서 말한 '군자'의 모습에 가까워지려는 사내들과, '현숙한 아내이자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닮고자 하는 여인들은 발해 상류층의 가장 일상적인 모습이자 그들이 지향하는 생활양식,
나아가 나라에서 강조하는 유교규범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라고 쓰긴 했지만 여자들에 대한 설명이 좀....)
 
[誰謂, 夫聟先化. 無終助政之謨. 稚子又夭, 未經請郎之日. 公主出織室, 而灑涙望空閨. 而結愁六行, 孔備三從. 是亮學恭姜之信, 矢銜杞婦之哀悽, 惠于聖人聿懷閫德.]
누가 일렀던가, 남편이 먼저 갈 것이란 사실을. 지모(智謀)를 다하여 정사를 보필하지 못하게 되었구나. 어린 아들도 역시 일찍 죽어 미처 소년으로서의 나이[請郎之日]도 지나지 못하였다. 공주는 직실(織室)을 나와 눈물을 뿌렸고, 빈 방을 바라보며 수심을 머금었다. 육행(六行)을 크게 갖추고 삼종(三從)을 지켰다. 위공백(衛共伯)의 처 공강(共姜)의 맹세를 배웠고, 제기량(齊杞梁)의 처와 같은 애처러움을 품었다. 부왕께 받은 은혜로서 스스로 부덕(婦德)을 품고 살았다.
<정혜공주묘지>
 
정혜공주의 개인적인 삶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묘지명에 따르면 공주는 남편을 일찍 잃고, 아들이 한 명 있었지만 관례도 채 행하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중국 제도에서는 친영이라고 해서 아내가 남편을 따라가서 남편 집에서 시집살이를 했지만 고려의 제도는 그렇지 않아서, 부마인 정혜공주의 남편이 황궁으로 들어와서 사는 처가살이를 했다. 이 점은 《구당서》나 《신당서》모두가 발해의 제도를 설명하면서 "그 제도는 고려나 거란과 같으니라."
라고 말했으니 쉬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而長途未半, 隙駒疾馳, 逝水成川, 藏舟易動. 粵以寶曆四年夏四月十四日乙未, 終於外第, 春秋四十. 諡曰貞惠公主, 寶曆七年冬十一月廿四日甲申, 陪葬於珍陵之西原, 礼也.]
인생길이 절반도 되지 않았건만 세월은 달음질치고, 흐르는 물은 내를 이루어 계곡에 꼭꼭 감춰둔 배를 쉽게 움직이나니. 아아, 보력(寶曆) 4년(777) 여름 4월 14일 을미(乙未)에 외제(外第)에서 사망하시니 나이 40세라. 이에 시호를 정혜공주(貞惠公主)라 하고 보력 7년(780) 겨울 11월 24일 갑신(甲申)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으니, 이는 예의에 맞는 것이다.
<정혜공주묘지>
 
외제(外第), 그러니까 상경의 황궁 바깥에 흠무왕이 마련해준 저택에서 정혜공주는 숨을 거두었고, 3년상을 치른 뒤인 보력 7년 겨울 11월 갑신일(24일)에 '진릉(珍陵)'의 서쪽 언덕에 묻혔다고 했는데, (묘비의 기록대로라면 정혜공주묘 동쪽에 있는 것이 진릉이다.) 보통 고려나 조선조의 경우에서도 보이듯 피치못할 사정이 없는 한 왕실 종친의 묘는 수도 아니면 그 근교의 기내(機內)에 쓰는 것이 상례인데, 발해에서는 정혜공주의 시신을 흠무왕의 당시 도읍이었던 상경 근교에 묻지 않고 구국(舊國), 천도 이전의 옛 도읍지(그것도 왕조의 발상지)에 묻었다. 오늘날에는 정혜공주의 무덤 동쪽에 있었다는 '진릉(珍陵)'이 발해의 왕릉, 그것도 2대 무왕(인안제)의 무덤일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진릉'이 흠무왕 이전의 발해 가독부의 무덤이라면 무왕이 아니어도 고왕의 무덤일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못할 것이다. 조상의 무덤 가까이 묻히고 싶었던 건가.
 
[皇上, 罷朝興慟, 避寢○懸. 喪事之儀, 命官備矣. 挽郎鳴咽, 遵阡陌而盤桓, 轅馬悲鳴, 顧郊野而低昂喻以鄂長榮越崇陵方之平陽恩加立厝. 荒山之曲, 松檟森以成行, 古河之隈泉, 堂邃而永翳. 惜千金於一別, 留尺石於萬齡, 乃勒銘曰]
황상은 조회를 파하고 크게 슬퍼하여, 정침(正寢)에 들어가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음악도 중지시켰다. 상사(喪事)의 의식은 관에 명하여 완비하게 하였다. 상여꾼[挽郎]의 호곡[鳴咽] 소리만 발길따라 머뭇거리고, 수레 끄는 말[轅馬]의 슬피 우는 소리는 들판따라 오르내리도나. 한의 악읍공주(鄂邑公主)처럼 영예는 숭산(崇山)을 뛰어넘고, 당의 평양공주(平陽公主)처럼 은총을 장례에 더하였다. 황산(荒山)의 골짜기에 솔과 개오동나무가 빽빽히 줄지어 섰는데, 고하(古河)가 굽이치는 곳에 무덤은 깊숙히 감춰져 있네. 천금과도 같던 그 분과 이별하기 아쉬워, 한 자[尺]의 돌이나마 영원히 남기고자 이 명문(銘文)을 새기니 다음과 같도다.
 
위대하고 빛나는 업적을 세운 조상들은 천하를 통일하였고, 상주는 것을 분명히 하고 벌내리는 것은 신중히 하여 그 인정(仁政)이 사방에 미쳤다. 부왕(父王)에 이르러서는 만수무강하여 삼황오제와 짝하였고 주의 성왕(成王), 강왕(康王)을 포괄하였다. 생각컨대 공주가 태어나매 어려서부터 진실로 아름다왔고, 비상하게 총명하고 슬기로와 널리 듣고 높이 보았다. 궁궐의 모범이 되었고 동궁(東宮)의 누나가 되셨으니, 옥같은 얼굴은 무궁화만이 비길 수 있었다. 한강(漢江) 신녀(神女)의 영기(靈氣)를 품고 고당(高唐) 신녀(神女)의 정기를 이었으며, 고운 자태를 지니고 부덕(婦德)의 가르침 속에 자랐다. 군자에게 시집가서 유순하기로 이름났으며, 원앙새가 짝을 이루듯 하였고 봉황새가 울음에 화답하듯 하였다. 남편이 일찍 죽어 유명(幽明)을 달리 하니, 한 쌍의 난조(鸞鳥)가 홀연히 등을 돌린 듯하였고 쌍검이 영원히 떨어져 있는 듯하였다. 순결과 정절에 돈독하여 역사책에 기록하고 그림으로 남길 만하며, 부덕(婦德)을 행함에 정조가 있고 아름다왔다. 사랑 노래를 부끄러워하고 수절시를 즐기시며, 크게 어질고 근심으로 즐거워하지 않는 중에 세월이 어느듯 빨리 지나 공주도 세상을 하직하였다. 장례가 이미 끝나 상여가 돌아갈 때, 공주의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사람들은 집으로 되돌아오니 뿔피리 소리 구슬프고 호드기 소리 처량하다. 강가의 깎아지른 산 옆에 자리잡으니, 묘광(墓壙)은 언제 광명을 볼 것이며 봉분은 언제까지 갈 것인가. 고목이 무성하고 들판에 연기가 자욱한데, 무덤 문을 갑자기 닫으니 처량한 감정이 홀연히 쌓이는구나.
 
보력(寶曆) 7년 11월 24일.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 그리고 황상(皇上). 어쩐지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대왕'과 '황상'이라는 단어가 같은 묘비명 안에서 쓰이고 있어서일 것 같다. 당조에서 하는 것처럼 그들의 '가독부'에게 존호를 올리면서도, 그 존호에 '천자'니 '황제'니 하는 칭호 대신 '대왕'이라고 둔 것은 당조를 의식한 결과일 것인가. 안으로는 공공연하게 '황제'를 칭하면서 외부로는 그걸 당당하게 말하지 못하고 '왕'으로 칭하던 외왕내제(外王內帝) 시대의 편린. 고려의 천자들도 자신들을 '해동천자(海東天子)'라고 부르며, 스스로 짐(朕)이니 '조칙(詔勅)'이니 하고 '황제급' 제도들로 치장했지만, 정작 '붕어'한 뒤에는 그들은 모두가 '대왕(大王)'이라 불렸다.
 
제(帝)와 왕(王). 두 글자를 《설문해자》에서 찾아보면 이런 설명이 나온다.  "제(帝)는 살펴 아는[諦] 것이다. '왕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王天下]'의 호칭이다[帝, 諦也. 王天下之號也.]" "왕(王)은 천하가 귀의하는[歸往] 것이다[王, 天下所歸往也]." 그런데 왕이라는 글자에 대해서는 좀 오래 전부터 그걸 써와서 그런지, 《설문해자》도 설명을 많이 붙여놓고 있다. 우선 동중서(董仲舒)의 설명은 “옛날에 문자를 만들 때, 셋[三]을 그리고 그 가운데를 이어서 '왕(王)'이라 했다. 셋이란 하늘과 땅, 사람을 의미한다. 參通한 것이 왕이다 [古之造文者,三畫而連其中謂之王. 三者,天地人也. 而參通之者王也].” 라고 했다. 공자께서는“하나로 셋을 꿰뚫어 왕(王)이 되었다[一貫三爲王].” 라고 정의하셨는데, 곧 '하늘'과 '땅'과 '사람'이라는 세 가지 이치를 모두 꿰뚫은 자를 가리켜 '왕'이라 부른 것이다. 그런데 혹자는 도끼[斤]를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해서 '왕(王)'이라는 글자를 만들었고 곧 '권위를 가진 자'의 뜻이라고도 해석한다.
 
나 자신은 금ㆍ수ㆍ화ㆍ목ㆍ토의 상생과정과 제-왕의 관계가 서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소위 '오행'에 해당하는 다섯 가지 요소들은 어느 것이 서로 강하다거나 약하다거나 하는 것이 없다. 서로가 어느 한 가지에게는 강점을 갖고 있지만 반대로 다른 한 가지에게는 약한, 그렇게 다섯 가지가 서로 대응하면서 힘의 균형은 치우치거나 부족하거나 하지도 않고 고르게 유지된다. '제'라는 글자의 뜻이 '왕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라고 했지만, '왕'이라는 글자에 대해서도 '천하가 귀의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로 뉘앙스가 다르기는 하지만 둘다 모두 '천하'라는 피지배층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는데, 우리가 인식하기로는 '천하'라는 것을 지배할수 있는 자격은 단 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 그럼에도 '제'보다 격이 떨어지는 '왕'에게도 마찬가지로 '천하가 귀의하는 곳'이라는 '제'에 버금가는 수준의 위상을 《설문해자》가 부여한 것에 대해서 이것은 '왕'이라는 것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될 수도 있으며, '제(帝)'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수많은 '왕'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는 뜻이 아닐까 싶다. 《설문해자》도 말했지만 '왕으로서' 천하를 다스리는 자가 제(帝)라면 '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왕'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제'로 격상되기 전에는 그 '제' 역시 수많은 '왕'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쉽게 비유하면 여기에 별을 그려놓았다고 해보자. 다섯 획으로 한붓그리기로 그린 별. 이 별에는 다섯 가지의 꼭지가 있는데 여기에다 하나씩 쇠ㆍ물ㆍ불ㆍ나무ㆍ흙의 이름을 붙이고, 꼭지마다 또 전구를 하나씩 달아놓되, 서로 돌아가면서 한 번에 '한 개'씩만 켠다. 여기에도 원칙이 있는데 '쇠'에다가 먼저 전구를 켰다면 그 다음에는 '불'의 위치에 있는 전구를 켜고, '불' 다음으로는 '물', 그 다음으로 '흙', 그리고 '나무', 다섯 가지를 고루 돌아봤으면 다시 '나무'에서 '쇠'로 전구를 옮겨가는 것이다. 대신 한 개에만 너무 오래 켜놔서도 안 되고, 쇠에서 불, 물, 흙, 나무 다시 쇠로 이어지는 순서를 어겨서도 안 된다. 왜냐면 그것은 '오행상극'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따른 것이기에 거꾸로 하거나 빠뜨리면 자연의 질서가 어지러워지는 것이 되고 세상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다.
 
현학적인 말 같지만 소위 말하는 '천명(天命)'을 받는다는 것은 곧 수많은 왕들 가운데 한 사람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해서 우뚝 서게 되고 다른 '왕'들보다 두각을 드러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순서가 정해진 '복불복'이다. 지금 현재 시점에서 '쇠'에 불이 켜져있다는 것이 꼭 거기 한 군데에만 계속 불이 켜져있을 거란 보장도 아니며, '쇠'가 불이 꺼진다고 해서 '불'을 뛰어넘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것도 아니다. '제(帝)'도 다른 여러 왕들과 다를 것이 없는 단지 '천명'이라는 전류를 공급받아 불이 켜져있는 전구에 불과한 것. 전구의 수명이 다되든 어쨌든 때가 되면 불이 꺼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자동으로 다른 전구가 불이 들어오고 '제(帝)'라는 칭호를 이어받게 된다. 불이 다 된 전구는 다시 자동으로 '왕(王)'으로 돌아가게 되고 말이다. 17세기 병자호란 직전에 청 태종이 조선의 인조에게 보낸 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대저 황제를 칭함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문제는 너에게 달린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시면 필부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재앙을 내리시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되는 법이다."
 
쉽게 풀이하면 이거다. 지금 찌질하게 노는 놈하고 부티나게 노는 놈이 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런 모습이 유지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소위 '빵돌이'니 '빵버스'니 해서 힘없는 놈 빵심부름이나 시키는 '일진'들이 10년 뒤, 20년 뒤에도 똑같이 명령내리면서 거들먹거리고 있을까? 그런 놈들은 10년, 20년이 지나도 여전히 그렇게 찌질하게 놀고 있을까?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안다. 상황이나 지위는 언제든지 역전이 가능하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가 '하기 나름'에 달려있는 문제다. 천명(天命)이 저절로 내리진 않으니까. '제'나 '왕'은 서로 지위상 차이는 엄청나지만 그 지위란 것도 영속성이 없는 가변적인 것이어서, '천명'이라는 복불복이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오늘의 '제'가 내일의 '왕'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왕'이 내일 갑자기 '제'가 되는 역전상황이 얼마든지 올 수 있다는 말이다. 중화의 왕조를 향해서 겉으로는 '왕'이라 칭하면서도 안으로는 '천자'를 자칭했던 '외왕내제(外王內帝)' 시대의 지배자들도 그렇게, 자신들에게 내려질 '천명'을 기다리면서 그러한 이원적 칭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중국의 소위 '중화주의'에 맞서서 '우리도 언젠가는'이라는 희망을 품게 해준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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