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57043
고구려군 80년을 만나러 간다
<서울경기 역사기행 14> 아차산 보루 기행
05.05.22 21:00 l 최종 업데이트 05.05.23 09:20l노시경(prolsk)
서울 주변에는 그리 화려하지 않으나, 우리의 역사가 깃든 아름다운 산들이 많다. 서울시 광진구의 북쪽에 위치한 아차산(雅且山·287m)을 오르려고 지하철을 탔다. 지난번 아차산 산행에서는 아차산성을 들렀으니, 이번에는 아차산 줄기를 따라 아차산 보루를 답사해 보고 싶었다.
▲ 아차산에서 바라본 서울 ⓒ 노시경
산줄기를 오를 때마다 서울의 정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산줄기를 조금씩 더 오를 때마다 그 파노라마는 더욱 장쾌하게 다가온다. 다만 아쉬운 것은 스모그가 없는 푸른 하늘의 서울을 볼 수 없을까 하는 점이다.
아무튼 아차산은 당일 다녀올 수 있는 산행지로서도 유감 없는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아차산의 완만한 능선길로 올라서면 암봉과 소나무 군락에서 깊은 산 속의 호연지기를 느낄 수 있다.
이 아차산의 능선을 따라 오르면, 석곽분 등 과거의 고분들이 눈에 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격전을 치르던 당시에 전사한 장수들의 무덤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어느 나라 사람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능선 마루에까지 올라와서 죽은 몸을 눕힌 이들은 분명 무언가 사연이 있어서 이 곳에 묻히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들이 평지에 묻히지 않고 굳이 산마루에 묻힌 까닭은 무엇일까?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한강을 굽어보고 있는 아차산은 예로부터 삼국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 아차산은 삼국시대 당시에는 전방고지였고, 아차산 보루는 말 그대로 최후의 보루였다. 아차산 일대는 삼국시대 당시에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곳이 전장이었을 당시에 만들어진 무덤들은 아마도 전쟁으로 이 아차산 일대를 손에 넣은 고구려 장수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그 고구려 장수는 아마도 이 아차산 지역을 획득하고 다스리던 고구려의 관리 역할도 겸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고구려 장수는 죽은 후에 자신의 영지와 같은 이 아차산에 묻히기를 원했을 것이다.
서울 광진구와 경기도 구리시의 경계를 이루는 산 능선을 계속 걸어 올라갔다. 아차산 서쪽으로 연결된 용마산(龍馬山·348m)과 북쪽으로 이어진 망우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름을 달리하는 이 산줄기들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모두 아차산이라고 불렸다.
▲ 아차산에서 바라본 한강 ⓒ 노시경
아차산과 용마산, 망우산 일대에는 보루라고 불리는 요새 20여 곳이 능선을 따라 2열로 빼곡히 배치되어 있다. 1개의 둘레가 약 300m 안팎에 이르는 보루를 20곳이나 쌓았으니, 이 보루를 쌓은 정성은 웬만한 산성 1개를 쌓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곳 보루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각 보루마다 약 50∼100명, 전체적으로 1000∼2000여명이나 되는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아차산 위에 고구려 군사만 천 명이 넘는 대군이라! 1천∼2천 군사라면 요새 시점으로 봐도 많은 수의 군인들이 아닌가?
우리가 잃어버릴까봐 안타까워하고 있는 고구려. 그 고구려 군사 수천 명이 상주하던 요새가 이 곳 서울에 자리를 잡고 있다. 고구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존재하는 우리의 역사인 것이다. 나는 오늘 그 곳을 가려고 한다.
임진강 유역의 고구려 성에 비해 한강 유역의 요새는 발굴조사가 많이 이루어진 편이다. 그러나 나는 능선을 오르면서 아차산 1, 2, 3보루들이 있는 위치를 파악하였지만, 정확히 그 곳이 보루인지는 확인을 못했다. 1, 2, 3보루는 등산로인 아차산 주능선 한 가운데에 방치되어 있고, 안내 표지판도 없기 때문이다.
그 귀중한 유적이 등산객의 발길에 채여 깎여나가고 있다. 발굴조사 후 보루 위를 덮은 흙이 깎이면서 이 유적들은 훼손되어가고 있다. 문화국가로 가려는 대한민국의 갈 길은 아직 먼 것 같다.
용마산이 갈라지는 고갯길에 고구려 제4보루가 있는 듯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호리호리한 체격의 아저씨에게 길을 확인했다.
"아차산 정상이 어딘가요?"
"아차산 정상이라고 따로 적힌 곳은 없어요. 바로 저 뒤 아차산 4보루가 아차산 정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 앞으로 뻗은 줄기는 용마산 가는 길입니다."
그는 이 높지 않은 산에서 정상을 찾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보인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는 장소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왠지 친근하고 모두 성실한 사람들 같이 보인다.
▲ 아차산 4보루 전경 ⓒ 노시경
아차산 일대에서 가장 높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 산줄기를 오르자 아차산 4보루가 한눈에 들어왔다. 아차산 주능선의 가장 북쪽에 자리한 4보루는 용마봉으로 연결되는 아차산의 마지막 봉우리에 자리하고 있다. 보루의 양쪽은 작은 봉우리이며, 보루의 가운데는 말안장 같이 약간 들어가 있다.
1997∼1998년에 발굴된 이 보루는 경기도 구리시에서 발굴 유지 및 유적에 대한 설명문을 등산로 양 옆에 가지런히 배열해 놓았다. 급경사를 이루는 봉우리의 경사면에는 3∼20단의 석축 성벽이 쌓여 있다. 하지만 간이 대장간 터가 위치했던 유적의 한 중앙으로 등산로가 지나가고 있다.
이곳이 요새였던 만큼 등산로 양쪽의 경사가 너무 심해 등산로가 우회하는 길은 만들 수 없는 상황이겠지만, 1500년 전 고구려 유적을 발로 짓밟고 다녀서야 되겠는가? 등산객이 밟고 지나가면 유적을 덮고 있는 흙이 계속 깎여나갈 것이다. 이 아차산에 등산객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니, 유적을 흙으로 덮고 그 위에 다리 형태의 등산로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내 뒤를 따라 이 보루에 오른 이들의 반응도 한결같다. 고구려 유적 관리를 이렇게 해도 되느냐는 것이다. 나도 그렇고 그 등산객도 그렇고 발로 고구려 유적을 밟고 있지만, 고구려 유적관리가 잘못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행히 등산로 양 옆의 건물 터는 잔디가 덮여 있고, 그 위에 설명문이 세워져 있는 등 관리가 양호했다. 발굴조사 당시, 이 4보루에서는 건물터 7곳, 온돌, 저수시설, 배수시설, 간이대장간 등이 발굴되었다. 이 아차산 4보루의 시설들을 둘러보면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당시 고구려 군의 편제 등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낼 수 있다.
이 보루의 성벽은 잘 다듬은 석재로 길이 210m, 높이 4m 정도로 둘러서 쌓았다. 이 타원형 석축성벽의 동벽과 남서벽 모서리에는 고구려 성에서만 발견되는 치(雉: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불쑥 튀어나온 성벽)를 각 1개소씩 설치하였다. 산성에 비하면 작은 보루이지만, 요동에 쌓은 고구려 산성에서 보이는 치가 이 한강변의 고구려 유적에서도 보인다는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 아차산 4보루 복원도 ⓒ 경기도 구리시
성벽 안쪽의 평탄한 지형 위에는 모두 7기나 되는 장방형 건물이 축조되어 있었고, 가장 큰 3호 건물지는 길이가 45m, 폭이 10m에 달하며, 내부에는 강당까지 있다. 건물 내부마다 1기 이상의 온돌이 설치되었다. 이 곳에서 발굴된 총 13기의 온돌 중 2호 온돌 외에는 모두 건물 내부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는 온돌이 현재와 같이 난방을 주목적으로 한 시설이었음을 말해준다.
병사용 막사로 추정되는 3호 건물지에서는 3칸 온돌방이 설치되어 있었다. 막사의 모든 바닥이 온돌로 깔린 게 아니라 중간 중간에 온돌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고구려 병사들이 이 온돌 바로 위에서 몸을 덥힌 게 아니라, 이 온돌이 취사와 함께 방을 따뜻하게 하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막사의 벽면은 돌과 점토를 섞어 담장식으로 쌓고, 그 위에 맞배지붕을 얹었다. 1500년 전 어느 겨울날 밤, 이 큰 막사 안의 고구려 병사 100여명은 몸을 부딪치면서 온돌의 따뜻한 기운을 조금이라도 더 쬐고 싶었을 것이다.
이 건물지에서는 2기의 집수시설 및 배수시설 2기도 발견되었다. 풍화된 암반 흙을 파내고 물을 저장하였던 집수장 2곳은 벽과 바닥에 펄 흙을 발라 방수처리를 한 후, 통나무를 직각으로 세워서 펄 흙이 무너지는 것을 막고 있었다. 그리고 취사 후나 세면 후에 버리는 물은 배수구멍을 통해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이 정도면 현대 대한민국 국군의 중대 내무반 막사에 크게 뒤지지 않는 시설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보루터에서는 무기, 마구, 농공구 등 철기가 319점이나 출토되었다. 마구가 이 곳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고구려 군사들이 말을 타고 이 산 위까지 올라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말을 놔두고 마구만 가진 채 이 산 위에 올라올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보루의 성격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고구려군의 철기 무기는 흔치 않은 귀중한 유물들이다. 이 철기들은 3호 건물지 북서쪽 외곽에 자리한 간이대장간에서 제련되었을 것이다. 이 철기들은 녹슬고 부서진 형태로 발굴되지만, 그 당시 군사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이 소중한 용기들이었다.
그리고 철기 농공구와 함께 발굴된 고구려 토기는 이 곳에서 주둔하던 병사들이 일정 식량을 자급했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저장용기, 조리용기, 운반용기, 배식용기 등으로 사용된 고구려 토기는 26개 기종 538개체나 출토되었다. 발굴 토기 중에는 '후부도□형(後部都□兄)'이 새겨진 토기접시가 발굴되어, 고구려의 영역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 분석에 따르면, 아차산 보루 유적은 475년 장수왕의 백제 한성 함락 무렵에 축조되어, 551년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한강유역 회복 때까지 약 80년간 존속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551년이면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559년)이 북쪽에서 침공하는 돌궐군을 물리치던 해였다. 양원왕은 중국의 동위(東魏)·북제(北齊)와 친선을 도모하고 547년에 요동지방 태자하 북쪽 기슭의 백암성(白巖城)과 푸순(撫順)의 신성(新城) 등을 중수하고 있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이 고구려왕은 북쪽으로부터의 침공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 아차산 4보루 원경 ⓒ 노시경
<삼국사기>에 따르면, 양원왕 7년(551년), 양원왕은 9월에 돌궐병(突厥兵)이 요동지방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자 군사 1만으로 하여금 돌궐병을 물리치고, 돌궐병 1천여명을 죽였다.
그러나 바로 이 때에 신라군이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10성을 취했다. 551년에 고구려군은 돌궐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에 1만명의 대군을 동원했다가 신라·백제 연합군의 기습공격에 한강 유역을 잃은 것이다.
<삼국사기> 진흥왕 12년(551년) 조에 따르면, '왕이 거칠부(居柒夫) 등을 명하여 고구려를 침략하여 이김에 따라 십 개 군(郡)을 취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성은 한강 상류에 위치한 성들로 추정된다. 551년 당시 한강 중류의 아차산 유역에 대한 백제와 신라 연합군의 기습공격도 성공하였고, 이 아차산 일대는 다시 옛 주인인 백제의 손안으로 들어갔다.
551년 당시, 백제군과 신라군은 이 아차산 능선을 따라 물밀 듯이 보루에 진격하여 왔을 것이다. 신라와 백제 연합군이 아차산의 고구려군 진지를 기습하였고, 양측간에 고지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이는 현재 사라져 버린 아차산 남단의 구의동 보루 유적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구의동 보루 유적의 고구려군 무기와 그릇들이 기습공격을 받은 듯 그대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진격해 오자 돌궐과의 전투에 군 전력의 주력이 투입된 고구려군은 이 곳에서 속절없이 패퇴한 것 같다.
그러나 이 아차산 능선을 점령한 백제군과 신라군은 한마디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을 가지고 있었다. 백제가 이 곳을 차지한 것은 단 2년에 불과했다. 553년, <삼국사기> 백제 성왕 31년 7월조와 진흥왕 14년 7월조에 따르면, '신라가 칠월에 백제의 동북지방을 취하여 신주(新州: 경기도 광주 추정)라는 골을 두고'라고 되어 있다. 신라는 다시 백제군을 기습 공격하여 한강유역 전체를 제 손안에 넣은 것이다. 백제는 북쪽의 고구려를 방비하다가 남쪽의 우군이었던 신라군의 기습에 당한 것이다.
아차산 4보루에 서서 보니, 이 아차산보다 더 높은 용마산의 보루들이 바로 눈앞에 잡힐 듯이 다가온다. 그리고 그 용마산 보루에 올라가는 가파른 암봉 위로 수십 층의 나무계단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아차산과 용마산은 급격한 경사를 사이에 두고 이어지고 있다.
이 천혜의 요새를 뚫고 백제군과 신라군이 고구려군을 쫓고 있다. 병력에서 밀린 고구려군은 아차산보루, 용마산 보루, 망우리 보루, 봉화산 보루까지 연이어 퇴각을 한다. 이 아차산에서의 고구려 80년 역사는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 당시 고구려군이 원통해 했을 빼앗긴 산하는 1500년의 역사를 뚫고 지나와 이렇게 우리 앞에 서 있다.
덧붙이는 글 | 4월에 아차산 보루를 다녀온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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