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69418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5)
http://www.kihoilbo.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70300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6)
* "5-5 일부와 5-6 일부가 내용이 유사하여 묶었습니다. 부제는 검색의 편의를 위해 내용에 따라 임의로 붙였습니다."

고구려의 새로운 자료 5-5
고구려의 수도 이전
연천선사박물관 관장  2012년 06월 21일 (목)  기호일보  webmaster@kihoilbo.co.kr

고구려 수도[王都]는 705년간의 존속기간 중 2차로 옮겨졌다. 제1차는 졸본천 홀승골성(卒本川 紇升骨城, 현 요녕성 환인오녀산성(桓仁五女山城))에서 국내성(國內城(현 길림성 집안(集安))으로 옮겨졌다. 제2차는 국내성에서 조선반도의 평양으로 옮겨졌다. 

주몽(朱蒙)이 수도로 정한 환인(桓仁)은 장백산(長白山)의 산림지대의 한 곳으로 이곳은 휘강(徽江)의 충적평지로서 토양이 대단히 비옥하다. 오녀산(五女山)은 환인 동북의 휘강 서쪽에서 2km 지점에 있는 곳으로서 높이가 800m이다. 홀승골성은 오녀산성이 있는 곳으로 남북길이가 약 1천m이다. 그리고 동서너비는 300m이다. 이곳은 동서남 3면이 돌로 쌓아져 담벽이 만들어졌다. 북면은 거의 수직이다. 성벽의 잔존 높이는 3~6m 정도이다. 

홀승골성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긴 이유는 부여국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고구려 북부에 위치한 부여는 고구려보다 강대했다. 기원전 6년, 부여왕 제소가 5만 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당시 고구려는 제2대 유리왕이 지배했다. 이로 인해 홀승골성에서 국내성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곳을 견고하게 방어하기 위해 위나암성(尉那巖城) 또는 환도성(丸都城))을 위성(衛城)으로 축조했다. 이곳은 400여 년 동안 고구려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환도성은 계속되는 싸움(전쟁)으로 보존이 어렵게 되었다. 기원 209년, 고구려의 산상왕(山上王)과 공손강(公孫康)의 싸움에서 국내성이 심하게 파손되었다. 기원 244년 중국 위(魏) 장군 모구검(母丘儉)이 고구려를 공격해 환도성이 크게 훼손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통치자들은 환도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신도시를 찾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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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312년 미천왕(美川王)시에 고구려 주된 활동구역은 압록강 북암(北岩)에서 시작되었다. 이때 낙랑군을 점령하고, 평양 일대를 소속시켰다. 그 이후 100년이 지나 수도를 옮겨야 하지만 평양지역은 객관적 조건이 좋지 않았다. 첫째, 고구려는 아직 반도상에서 세력이 확실하지 않았다. 더욱 백제의 위협이 있었으며, 쌍방은 자주 서로 공격되어 평양은 백제의 주된 공격지의 한 곳이 되었다. 기원 371년 겨울과 377년 겨울에 평양이 공격되었다. 백제군은 이 2차 공격에 3만 군을 보냈다. 두 번째 이유는 고구려는 언제나 낙랑·대방군과의 싸움이 지속되어 평양의 안전성이 환도와 차이가 심했다. 세 번째 이유는 고구려는 요동에서의 싸움이 멈추지 않아 지속적으로 군대를 유지시켜야 했으며, 만약 평양으로 옮겨가면 고구려의 안정성이 대단히 불안했다. 상기한 3가지 이유로 고구려가 도성을 옮겨 평양으로 가기 힘들었다. 

평양은 당시에 왕검성(王儉城)으로 불렀다. 조선반도 내의 정치·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평양은 중국 한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설치 후 평양은 낙랑군의 통치 장소가 되었다. 

광개토왕 때 백제를 공격하며 대방군을 점령하고 그 이후 대대적으로 남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신 점령지의 통치는 광개토왕을 계승한 장수왕의 중요한 일이 되었다.  
 
기원 412년 광개토왕이 사망 후 장수왕이 직위되었다. 장수왕은 기원 425년부터 매년 중국 위(魏)나라에 헌납 인사를 46차례나 거행했다. 기원 427년 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했다. 

고구려 역사 발전의 3가지 의미가 생겼다. 

첫째, 중국의 북부(北部)공격이 활성화 되고, 왕도(王都)의 안정성이 보장되었다. 그리고 환도성(丸都城)의 여러 차례 피해가 가볍게 되었다. 둘째, 남진(南進)정책이 유리하게 되었다. 셋째, 고구려 경제가 발전될 계기가 되었다. 

평양은 지리적으로 교통의 요충지이다. 그리고 방어조직이 확실하게 보장되었다. 대동강은 남쪽을 방어하는 천연(天然)방어선이다. 그리고 동·서의 중요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또한 동서를 가로지르는 자비령산맥이 있다. 평양의 남쪽은 지형을 이용해 방어가 충분히 보장될 수 있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남북을 가로지르는 북대봉산맥이 있다. 이곳은 평양 동쪽의 방어벽이 될 수 있다. 대성산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가는 묘향산맥의 한 가지이다. 이 산맥 등을 따라서 국내성 소재지의 북쪽 압록강 유역과 왕래가 가능하다. 

경제적 시각에서 보면, 대동강 하류지역은 비옥한 평원지역으로 농산물의 생산 조건이 대단히 좋아 왕도 평양성의 식량 수효를 충분히 보충할 수 있었다. 또한 주변의 산속의 나무(임야)들은 가축 생산이 가능하고 사냥하기에 좋은 장소가 되어 있었다. 

문화적 의미로 보면, 왕검성의 평양은 기씨(箕氏)왕조와 위만(衛滿)정권을 지난 후에 한조(漢朝)의 낙랑군의 통치 장소가 되었다. 

고구려 건국 후, 기원 302년부터 평양에 특수한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특히 성지(城池)를 축조하고 사원(寺院)을 세우는 데 100여 년 동안의 시간을 보냈다. 즉, 고구려 정치 중심이 남쪽으로 옮겨졌다. 즉, 고구려의 선진문화가 조선반도로 전파되어 신라·백제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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