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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상고시대의 교통발달사 고조선, 기원전 1200∼1100년부터 수레 쓰기 시작해

2002-05-16  전영선  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단군신화로 시작된 고조선


그동안 발굴된 유적이나 기록들을 고고학적, 과학적으로 연구분석한 바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역사는 구석기시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약 70만 년 전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함경도, 평안도, 경기도, 충청도 등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첫 국가인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는 씨족 또는 부족 단위로 이 지역들에 흩어져 살면서 주로 고기잡이, 사냥, 채집 등의 원시적인 생활을 했다. 구석기와 신석기시대를 지나 기원전 2500년경 시작된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사람들은 토기와 도구를 만들어 쓰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큰 변화가 일어났다. 앞선 청동기 문화를 가진 부족들은 옛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씨족사회들을 흡수했고, 그 과정에서 권력을 가진 지배자가 등장, 부족사회를 무너뜨리고 생겨난 것이 ‘국가’라는 권력중심집단 사회다. 우리나라의 첫 권력집단이 바로 단군신화의 주인공인 환웅(桓雄)이 기원전 2333년에 건국했다는 고조선이다.


단군신화는 고려 때 학자이며 대승인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나온다. 하늘의 황제 환인(桓因)의 아들인 환웅(桓雄)이 하늘아래 땅으로 내려가 인간세상을 구하려는 것을 알고 아버지인 환인이 세상을 내려다보니 태백산과 삼위산이 아들의 홍익인간사상을 펼치기에 적당했다. 이에 환인이 환웅에게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 땅으로 내려보내 인간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3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지금의 묘향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檀樹) 밑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이곳을 신시(神市)라 했고, 그는 환웅천왕이라 불렸다. 환웅천왕은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생명, 병고, 형벌, 선악 등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렸다. 이때 동굴 속에서 같이 살던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환웅천왕을 찾아와 사람으로 변하기를 원하자 환웅은 쑥 한 자루와 마늘 20개를 주며 “100일 동안 이것을 먹고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될 것”이라 했다.


곰은 이를 지켜 37일만에 아름다운 여자로 변하였으나 호랑이는 지키지 못하여 실패했다. 그 후 곰녀는 결혼할 남자가 없어 신단수 밑에서 잉태하기를 항상 빌었다. 이를 딱하게 여긴 환웅천왕이 사람으로 변하여 곰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이름지었다. 그 후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堯)임금이 즉위한 지 50년 된 경인년(기원전 2333)에 평양성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해 단군조선의 시조가 되었다. 단군왕검은 1천500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중국의 주나라 무왕(武王)이 기묘년(기원전 1200년경)에 즉위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하자 장당경(臧唐京)으로 옮겼다가 다시 아사달산(평양 부근 백악산 추정)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어 1천908세를 살았다는 것이 설화의 내용이다.


고조선 발전에 영향을 끼친 기자(箕子)의 이주


고고학자들은 완전한 국가조직체였던 고조선이 가장 번성한 시대를 기원전 12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때 청동기 문화가 앞섰던 각계 각층의 기술을 가진 중국인들이 대거 고조선으로 망명하면서 고조선의 청동기 문화는 더욱 발달했고, 아울러 중국의 수레제조 기술도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200년경에 이르러 고조선은 동으로는 소련 국경 우스리강, 북으로는 흑룡강, 서쪽으로는 몽고와 북경 접경까지, 남으로는 한반도 전체를 포함할 만큼 영토가 넓고 막강했다. 이 시기의 중국은 하, 은, 주와 춘추전국시대, 진나라를 거치는 동안 전쟁이 끊이지 않아 중국인들은 살기 좋은 고조선으로 망명하기 시작했다. 이때 중국에서 은(殷)나라 초기의 국가였던 큰 무리의 상(商)나라 사람들이 고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자기네 문화를 가져왔다.


사기(史記)와 주본기(周本記) 등 중국고대문헌에 따르면 기자(箕子)는 상나라 말기 상왕실의 어진 후예로서 상나라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에게 바른 정치를 하도록 간하였다가 감옥에 갇혔는데, 때마침 주족(周族)이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주(西周)를 건국, 서주의 무왕(武王)이 기자를 석방했다. 기자는 그의 조국인 상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이 자기를 구출해준 것을 큰 치욕으로 여기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기원전 1200년경 고조선으로 망명한 후 고조선의 서쪽 변방인 지금의 북경근처에 조선현(朝鮮縣)을 세워 고조선의 지배를 받던 거수국(渠帥國)의 일원이 되었다. 그로부터 기원전 200년경 연나라 사람인 위만이 많은 중국 유랑민을 거느리고 고조선으로 들어와 기자조선을 무너뜨릴 때까지 고조선은 중국과 활발히 문물을 교류했다.


고조선은 기원전 700년경부터 춘추전국시대의 국가인 연(嚥)나라, 제(齊)나라 등과 국제교역을 시작했음이 관자(管子)의 발도(撥道)편과 경중갑(經重甲)편에 기록되어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조선의 서쪽은 중국과 넓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사람의 왕래, 상거래 등으로 중국의 문물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은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상품들을 중국으로 수출하고 중국의 물건들을 운반해 오기 위해 운반구인 수레가 필요했다. 이미 중국에서는 고대 황제시대인 기원전 2800년경부터 수레가 쓰였고, 춘추전국시대, 즉 기자의 조선망명과 교역을 시작하던 기원전 700년경에 와서는 운송수단으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던 터라 중국수레의 고조선 유입은 필연적이었다.


고조선의 철기문화


고조선시대의 청동기 문화 시작연대는 기원전 2400년경으로 건국보다 조금 앞서 개막되었고 기원전 9세기경에 이르러서는 매우 높은 수준이 되었다. 이 시기에는 청동기 제조기술이 발달해 비파형 동검, 용기, 무기, 장신구와 더불어 수레와 말의 장식품들이 고조선의 중심부였던 요하(遼河)유역에서 많이 출토됐다. 청동으로 만든 도끼, 끌 칼, 송곳, 자귀 등 공구들은 나무농구, 수레, 배를 만드는 공구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평안남도의 주의리에서 출토된 같은 연대의 목제 보습(쟁기)과 수레바퀴는 청동공구를 사용해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된 고조선의 청동품을 보면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유적으로 나눌 수 있다. 한 유적에서는 청동무기나 철제무기와 함께 말의 장식품과 수레부품들이 나오지만 농구는 없고, 다른 한 유적에서는 무기와 농구는 나오지만 수레부품이나 마구(馬具)는 나오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마구류와 수레부품이 나오는 유적은 고조선의 귀족 유적이고 수레와 마구류가 나오지 않는 것은 농민의 유적이다.

고조선 초기 귀족무덤에서 발견된 두 마리 말의 뼈와 수레 잔해들


귀족들은 평소에는 말과 수레를 교통수단으로 이용하다가 전시에는 말을 기병용으로, 수레는 전차로 썼던 것이다. 그러므로 두 유적지에 무기가 다 들어 있는 점을 미뤄볼 때 기병과 전차병은 귀족이, 보병은 농민들이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철기시대는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철기가 널리 실용화한 것은 기원전 5세기경으로 보인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철기 유적지는 만주에 있는 요녕성 무순 연화보유적과 안산의 양초장유적, 쌍사자유적, 노허산유적 등인데, 특히 연화보유적에서 출토된 농기구의 90%가 철기다. 그러므로 청동기가 무기로 많이 쓰인 것과 달리 철기는 농기구와 공구를 만드는 데 많이 사용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철기유적에서는 호미, 괭이, 삽 등의 농기구와 낫, 반달칼, 도끼, 자귀, 끌, 손칼 등의 공구가 출토됐다. 청동기보다 강하고 예리한 철제공구의 사용은 수레와 바퀴제조 기술을 한층 더 발달시켰다. 그러나 철기는 청동기보다 만들기가 어려워 기원전 2세기까지 두 가지가 병용된 것인데, 이 시기 한반도 북부 여러 유적지에서 출토된 마구와 수레부속품들은 철제품보다 청동제품이 많다.


청동기마구와 수레부속품으로는 말 관자, 멍에금구, 수레굴대끝 씌은개, 삿갓모양 동기, 을 자형동기, 양산살꼭지(수레 위에 설치한 양산), 고리, 고삐끼우개, 동탁, 방울, 장식못, 주머니 등이고 철기는 수레굴대끝, 자갈, 갈모, 고리 등으로 비교적 단순하다.


고조선의 금속기술


고조선에서 쓴 무기, 농기구, 공구, 수레부품 등의 철제품은 주조한 것이다. 초기인 기원전 8세기의 철기시대에는 연철을, 기원전 6세기경에 와서는 선철을, 기원전 3세기부터는 주철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사람들은 탄소함유량에 따라 그 특성에 맞는 주철을 만들어 쓸 줄 알았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이미 열처리 기술이 발달해 주조하기 쉬우면서 쉽게 마모되지 않는 백색 주철로 도끼, 자귀, 낫 등 공구를 만들었고, 탄소 함유량이 많아 마찰에 잘 견디는 회색주철로는 수레바퀴 굴대 끝 부품을 만들어 사용했다.


고조선 말기인 기원전 3∼2세기에는 제철기술이 더욱 발달해 강철을 생산했고, 강철로 주조제품과 단조제품도 만들어 썼다. 단조품을 만들기 위해 강철을 두드리고 구부리는 기술과 물을 사용하며 열처리하는 기술도 이용되었다. 특히 기원전 2세기경에는 이러한 냉각 열처리기술이 수레바퀴를 한층 튼튼하게 만드는데 널리 이용되었다. 바퀴용 철태를 만들어 불에 달군 다음 나무바퀴에 씌우고 즉시 물에 담그면 쇠태가 오그라드는 원리에 따라 튼튼한 바퀴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제철 기술의 발달은 청동기 제조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 철기는 물론 청동기 제품들이 섬세하고 다양하게 만들어졌음을 요하유역의 많은 출토품들이 증명하고 있다. 고조선의 제철기술이 중국보다 앞설 수 있었던 것은 요동과 두만강유역에 청동보다 광대한 철강산지가 있었고, 철기가 동기보다 단단해 실용성이 있음을 일찍부터 알아차린 덕분이다.


고조선 첫 수레의 등장과 제조기술


고조선 중기부터 쓰인 우리나라 최초의 수레가 고조선사람들이 발명한 것인지, 아니면 기원전 2900년경부터 사용된 중국의 수레가 들어와 우리 실정에 맞도록 개조되어 쓰이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련 고고학적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나타난 기록과 유물의 연구를 통해 중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그러면 먼저 ‘수레’란 말은 어디서 어떻게 생겼을까. 사람이나 소, 말이 끄는 바퀴 달린 운반도구를 통틀어 수레라고 한다. 수레 중에는 소와 말이 끄는 ‘달구지’가 있다. 몽고어를 보면 데르게(terge)라는 말이 있는데, 수레의 뜻을 내포한 어원을 갖고 있다. 이 데르게를 만드는 기술자를 데르게지(tergeci)라 한다. 많은 학자들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데르게 또는 데르게지가 변화해 달구지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는 또 고대의 선조들이 지금의 수레를 ‘술위’라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술위의 어원은 ‘숟’인데, 이것이 뒤에 ‘술’로 변했다는 것이다. 즉 ㄹ이 ㄷ으로 변한 것이다. 고대의 우리 조상들이 쇠를 발견해 사용하기 전에는 도구와 물건을 운반하는 기구 등을 모두 나무로 만들어 ‘술’이라 불렀다. 이 술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변음되어 나무로 만든 창살, 화살, 떡살 등 ‘살’로 변했는데, 이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술’도 변음되어 ‘수레’로 변한 것으로 사학자들은 풀이하고 있다.


여러 사료에 의하면 고조선에서 수레를 쓰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000년경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이른 기원전 1200∼1100년 사이에 중국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바로 이때 기자 일족이 고조선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기자가 조국인 상나라에서 고조선으로 망명한 기원전 1200년경에는 상나라에서 전차와 수레가 쓰이기 시작했다. 특히 상황실의 후예인 기자는 고조선으로 들어오기 전에 전차와 수레를 이미 사용해보아 그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할 때 거느리고 온 상나라 유랑민 중에는 여러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 중에는 수레와 바퀴를 만드는 기술자들도 틀림없이 끼어 있었을 것이다.

기자가 고조선으로 올 때 탔던 상나라 말기의 수레 추정도


또 다른 추정으로는 상나라에서 멀리 떨어진 고조선까지 일족과 필요한 물건을 수송하기 위해서는 수레가 틀림없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상나라의 수레가 사람과 짐을 싣고 고조선으로 굴러 들어와 퍼졌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중국수레의 고조선 유입에 대한 또 다른 증거도 있다. 기자일족이 망명해와 정착했던 곳은 고조선의 문화 발상지요 중심지역인 요하 서쪽지역이다. 이 요하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분석된 기원전 1000년 전후의 수레와 마구부품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조선은 일찍부터 중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의 고대문헌인 일주서(逸周書)의 왕회(王會)편에 숙신(肅愼), 예(濊), 고구려, 양이(良夷), 양주(楊洲), 발인(發人), 청구(靑丘), 고죽(孤竹) 등 고조선 거수국들의 사신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가 국내의 제후와 외국사신들을 위해 베푸는 잔치인 성주대회(成周大會)에 해마다 참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해인 기원전 1200년에 주나라를 건국하고 곧이어 성주대회를 열었으므로 고조선의 거수국(渠帥國) 사신들이 중국을 왕래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100년 초로 추정된다.


주나라의 성주대회에 파견했던 고조선의 사신들은 상나라 시절부터 널리 쓰인 수레, 가인차(인력거), 전차들을 틀림없이 보고 수레의 편리함을 간파했을 것이다. 따라서 자주 중국을 왕래하던 고조선의 사신들이 수레를 수입하거나 그 제조법을 배워, 기원전 1100년 초기에는 고조선에 수레가 나타났을 것으로 보인다.


수레의 조기유입은 중국과의 교역사를 살펴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이 거수국(渠帥國)들의 사신을 주나라의 성주대회에 파견하였다는 것은 벌써 중국과의 교역을 시작했다는 뜻이다. 기록상으로 중국과의 교역이 가장 일찍 이루어진 것은 기원전 7세기경으로 중국의 사기(史記) 중 화식열전(貨殖列傳)편에 보면 이미 고조선은 연나라(燕國)와 교역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고조선이 중국과 기원전 7세기 훨씬 전부터 교역을 했다는 뜻이다. 먼 거리로 물자를 대량수송하기 위해 이미 주나라에서 사용하고 있던 수레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그 제조법이나 실물을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다. 이런 몇 가지 이유를 들어 고조선에 수레가 나타난 시기를 기원전 1200∼1100년 사이로 보고있다.


고조선 초기의 수레 모양

수레 멍에대 부속품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수레 유물은 평남 주의리 이탄층에서 나온 나무수레바퀴, 만주의 요녕성에 있는 누상무덤에서 발견한 일산대꼭지와 원통형 수레부속, 역시 요녕성 와룡천 무덤에서 나온 멍에 형상의 청동기 등으로 기원전 1000년 초기 고조선의 수레부속품들이다. 주의리 이탄층의 나무바퀴는 참나무로 만든 바퀴태의 일부분으로서 원형으로 복원했을 경우 직경이 1.6m나 되는 큰 바퀴다. 이 바퀴태 조각을 5개 이으면 완전한 바퀴가 되고, 바퀴태 조각에는 바퀴살을 박았던 네모난 구멍이 4개 있다. 따라서 이 참나무바퀴는 20개의 바퀴살로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나무바퀴는 철판태가 씌워져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철기시대 이전인 BC 100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조선의 수레는 초기부터 발전된 것이었음을 여러 무덤에서 출토된 부속품들을 보고 알 수 있다. 누상무덤에서 나온, 수레의 좌석기둥에 세워 햇빛이나 비를 피하는 일산대의 꼭지라든가 와룡천무덤의 수레멍에형 청동기, 평안도 금석리 오금당무덤의 방울 달린 원판형 일산대 꼭지 등으로 보아 고조선의 수레는 상당히 화려한 것이었다. 특히 수레가 움직일 때 방울소리를 내게 한 방울 달린 일산대 꼭지와 수레굴대 양끝을 덮어씌우는 청동마구리는 고조선 사람들의 생활 정서를 반영한 수레부속품들이라 하겠다.


이런 화려한 수레는 서민들보다 지배계급들이 사냥용이나 승용으로 타고 다녔던 것 같다. 요하 상류지역의 남산근 102호 무덤에서 나온 짐승 뼈에 새겨진 그림에서도 이런 구조의 수레와 용도를 알 수 있다. 이 그림에는 모양이 꼭 같은 수레 두 대가 각각 두 필의 말과 함께 그려져 있다.


수레는 2륜차로서 두 개의 바퀴는 긴 굴대에 끼워졌고 두 바퀴 사이에 직사각형의 차체가 놓여있다. 차체의 중심에서 말이 수레를 끄는 긴 외가닥 수레채가 앞으로 뻗어있고 채의 끝에는 채와 직각으로 두 필의 말에 연결할 수 있도록 멍에대가 가로로 연결되어 있다. 또 바퀴에는 여러 개의 바퀴살과 마구리쇠가 그려져 있다. 수레의 제일 앞쪽 부분에는 노루 두 마리와 함께 활을 쏘는 사람의 그림도 있다. 이 동물뼈 그림에서 고조선 초기의 수레는 말이 끌었으며 사냥용과 승용으로 귀족들이 탔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초기의 이런 수레모양은 중국의 은과 주나라시대의 수레와 매우 비슷해, 역시 중국수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동물의 뼈에 그려진 고조선 초기의 수레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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