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중한 연합항일(中韓 聯合抗日)의 배경(背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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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의용군과 한국독립군이 연합하여 항일하는 길에 오르기까지는 결코 순풍에 돛단 격은 아니었다.
 
9·18 사변이 일어날 당시 동북지구의 조선이민(朝鮮移民)은 중국 국적에 귀화한 사람과 아직 입적하지 않은 자를 포함하여 도합 150만명 좌우였다.註 004  그 중 소수 친일파주구(親日派走狗)를 제외하고는 절대 다수의 조선민중은 모두가 강렬한 반일애국 요구가 있었다. 장기간의 항일구국투쟁 중에서 그들은 시련을 이겨냈고 의지가 완강하였으며 영용(英勇)하게 싸웠다. 동북의용군이 궐기할 당시 만약 애국전통이 있고 반침략전쟁의 경험이 있는 조선동포들과 신속히 연합하였더라면 항일역량은 틀림없이 크게 장대해 졌을 것이고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더욱 침중한 타격을 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9·18 사변이 방금 폭발했을 당시 사람들은 가슴아픈 괴상한 현상을 보게 되었다. 사변을 일으킨 장본인은 일본사람인데 판양(潘阳/潘陽/반양)·창춘(长春/長春/장춘) 등지에서 쫓겨나온 동북군 패잔병들은 오히려 보통 조선교민들에게 미친듯이 보복을 들이대었다. 요녕에서 온 소식은 다음과 같다.
 
自從日本帝國主義武裝佔領滿洲之後 各地發生中國群衆仇視朝鮮群衆 特別是國民黨的敗兵 到農村中任意搶掠和屠殺 在最近一個月以來 只就瀋海吉海鐵路沿線 如淸縣城死40餘人 淸河溝18人(內有農婦小孩等) 柴河溝20餘人 三家子10餘人 其他各地的計300餘人. 註 005  
 
길림에서 온 소식은 다음과 같다.
退兵因受國民黨的欺騙痛恨日本並仇視韓民 所以這次退入農村 在五里河子屠殺了三個韓國農民 在他處是否有同樣的屠殺尙不可知. 註 006  
 
각지에 있는 일부 패잔병 군관들은,
還命令士兵搗毀韓農家屋 搶刼韓農米糧和什物 地方村長土豪更組織密探民團 監視韓農的行動 不許韓農自由行路 無故捜査韓農的家庭. 註 007  
라고 하였다.
 
〈성경시보(盛京時報)〉1931년 10월 14일 소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在鐵嶺之中國軍隊虐殺鮮人及凌辱婦女, 並縱火焚燒鮮人家屋, 因之鮮人等向鐵道沿線地域內撤退.  
 
이 소식은 비록 적들이 의식적으로 과장한 성분이 들어있긴 하지만 참고가치도 있다.
 
이러했을 뿐 아니라 사변후 자발적으로 궐기한 일부 의용군(義勇軍), 구국군(救國軍)과 항일산림대(抗日山林隊)에서도 조선항일민중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조선인을 ‘까오리/꼬리빵즈’(高麗棒子), ‘일본주구’라고 비난하면서 조선청년이 의용군에 가입하는 것을 거절했고 심지어 한국독립단과 반일유격대의 무기를 강박적으로 앗아갔다.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가 중조항일역량이 연합하여 항일하는 데서의 엄중한 장애였다.
 
상술한 현상의 존재는 주·객관 양방면의 원인이 있다. 주관상에서 보면 동북의용군은 동북 각 민족·민중이 나라가 망하게 된 상황에서 자동적으로 조직한 항일무장으로서 자발성과 맹목성을 띠고 있었다. 의용군에는 우두머리가 많고 성분이 복잡하였다. 그 지도자 대부분은 아주 높은 애국정열을 지니긴 했지만 원대한 정치적 안목과 심원한 책략사상(策略思想)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 중의 일부는 협애한 시야와 자신의 이익으로부터 출발하여 조선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일본제국주의가 중조(中朝) 두 민족사이의 관계를 이간시키는 반동정책을 일관적으로 취한 데 있다.
 
주지하는 바 9·18 사변전야 일본제국주의가 전적으로 조작해 낸 ‘완바오샨/만보산사건(万宝山/萬寶山事件)’과 조선에서의 배화참안(排華慘案)은 바로 중조 민족의 감정을 악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이 두차례의 사건에 앞서 일본제국주의는 갖은 음모수단을 다하여 중조 민족관계를 이간시켰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1928년 6월간에 판양현 용안교(潘阳县 永安桥/瀋陽縣 永安橋/반양현 영안교) 경갑분소(警甲分所) 순찰장 리맹풍(李猛風)은 이런 보고를 올렸다. 그가 관할범위 내에서 호구조사를 할 때 성씨를 말하기 꺼려하는 한 한인(韓人)이 밀고한데 의하면, 일전에 일본인은 사사로이 200여 명 한인(韓人)을 소집하여 시타(西塔/서탑) 부근에서 비밀집회를 가졌다. 회의에서 한 일본인은 이렇게 말하였다.
* 완바오샨/만보산사건(万宝山/萬寶山事件) : 1931년 7월 1일 중국 지린성(吉林省) 창춘현(長春縣) 완바오산(萬寶山) 싼싱바오(三姓堡)에서 일어난 중국인과 조선인의 충돌한 일
* 배화참안(排華慘案) : 화교배척사건
 
奉天 吉林曩有者均係韓國所有 嗣後中國奪去 迄至今日. 現爾韓國已亡 人民失所. 何妨乘此中國戒嚴時期 設法將奉吉兩省奪回. 我日國已準備多數爆裂物品 爾等韓人可爲之實地進行 向省及村鎭地方擇要埋之並以圖炸裂 旣可傷害中國之人民 又可以破壞中國之治安. 彼時如中國商民驚惶之際 我方即可遣兵入城 明爲保護僑民 暗將省城佔領. 佔領後即將所得之地盤完全交給韓人執管 彼時爾韓民等即可移民於此 並可獨立恢復韓國之國體 而我日國亦深願轉人不爲奴隷矣. 註 008  
 
이 일은 다행히 중국방면의 관민에 의해 발각되어 일본방면에서는 미처 폭발품을 산포할 새 없이 음모가 드러났다 하여 사단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일본이 기만술책으로써 조선인을 자기들의 침략도구로 만들려는 죄악적 목적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사변발생 후에 이르러 일본이 이간을 도발하는 수단은 더욱 새로와졌다.
 
奸狡的毒辣的日本帝國主義現在越幹越厲害了! 這一次武裝佔領滿洲 不僅用飛機大砲轟炸民房 屠殺市民與士兵 它還收買少數韓人做走狗 特別用部分的韓國走狗打先鋒 並把日兵穿上韓人服裝 一块慘殺中國民衆 當時他們揮着屠刀 殺起來更加殘酷!
日本帝國主義者在未佔滿洲之前 即在撫順定做許多小刀 交給韓國人 預備屠殺中國人. 同時利用一些韓國走狗大加厭迫中國群衆 甚至於日本帝國主義者特別派人穿韓國衣服 屠殺中國農民 轉移中國農民對日本帝國主義的仇恨到朝鮮群衆身上. 日本帝國主義者企圖一方面破壞中韓群衆的聯合 另一方面在保護韓僑的口實之下 使他們的軍事力量更普遍的布置到農村中去 以及加緊的欺騙朝鮮群衆.註 009  
 
바로 상술한 원인으로 하여 사변발생 후의 한 시기 동북지구에서는 본 장의 첫머리에 쓴 것과 같이 원수가 기뻐하고 친자(親者)가 고통스러워 하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 친자(親者) : 가까운 사람, 아군
 
일본 침략자의 이간음모에 대하여 중조 양국의 항일운동지도자들은 부단히 적발하고 갖은 조치를 취하여 중한 민중사이에 존재하는 매듭을 풀고 단결을 증진하였다. 조선에서 배화참안이 발생했을 때 한국독립당인(韓國獨立黨人) 이동녕·김구 등은 즉시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東省自體解放與韓國獨立有因果相乘之勢. 中韓雙方務令全體韓僑共立於聯合戰線 愼勿爲藪驅省. 希望中國民衆認眞努力於此.  
 
이와 동시에 이동녕은 또한 한국독립당 이사장(韓國獨立黨 理事長)의 명의로 친필 서한을 써 동북정무위원회(東北政務委員會)에 “쌍방이 보전되는 정책을 피력”(피력쌍전지책/披瀝雙全之策)하였고 〈한교선후안(韓僑善後案)〉3장 12조를 제기하였다. 이 제안에서는 “由中央或東省特設韓僑事務機關 由中韓雙方人組織之 俾保護管理韓僑事宜”할 것을 제출하는 한편 ‘한교보위단(韓僑保衛團)’을 조직하여 무기를 발급하고 훈련을 다그침으로써 지방치안을 수호하고 ‘일본 정탐’을 조사하게 할 것이다. 장쉐량(张学良/張學良/장학량)의 동북당국은 이 제안을 받은 후 9·18 사변의 폭발로 하여 미처 실행하지 못하였지만 장쭤샹(张作相/張作相)이 집권하는 길림성에서는 이미 행동에 옮겼었다.
 
원래는 그 이전에 동북 각지의 조선민족주의자 수령들은 길림성 정부에서 조선어 통역으로 일하고 있는 독립당원 오인화(吳人華) 등을 통하여 길림성 주석 장작상에게 건의하여 “길림성정부에 한교관리국(韓僑管理局)을 설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장쭤샹/장작상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오씨 등을 초빙하여 한교관리국 사업에 참가하게 하였다. 장쭤샹(張作相)의 지도하(指導下)에 길림성 강동(江東)의 한인농촌(韓人農村)은 이미 농무회(農務會)가 조직되었다. 註 010
 
이와 동시에 북만(北滿)의 한국민족총연합회(韓國民族總聯合會) 간부 권수정(權守貞)도 길림성정부 장관고문으로 초빙되어 길림군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러한 합법적인 기구가 있었기에 길림성 경내에서의 독립당원의 항일활동은 다소 편리하게 되었다. 이는 사변후 이청천(李靑天) 등이 길림성정부 중의 애국인사와 연합하여 항일하는데 편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반드시 지적해야 할 것은 권수정 등 소수사람은 파쟁경향이 엄중했다. 사변전의 한시기 그들은 합법적 지위를 이용하여 파쟁활동을 진행하고 ‘치안을 수호한다’는 미명하에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박해하였다. 이로 인하여 조선항일역량 내부 각파 간의 모순은 또 다시 격화되었다.
* 파쟁 : 파벌끼리 다툼
 
동북지구에서의 중국공산당의 당조직-중공만주성위와 공청단만주성안(共靑團滿洲省委)에서는 중조 민족의 단결을 강화하고 중조 민중의 연합항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남모르는 사업을 많이 하였다. 사변폭발 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결의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用盡一切方法在全國以至全世界擴大宣傳 特別要加强中韓勞苦群衆反對日本帝國主義的聯合戰線與組織.註 011  
 
동북군 부분 패잔병들이 조선민중을 살해하는 현상이 방금 나타났을 때 중공만주성위와 공청단만주성위에서는 즉시 〈고중한농민서(吿中韓農民書)〉와 〈고중한청년회(吿中韓靑年書)〉를 발표하여 일본침략자의 이간음모를 적발하고 동북군 소수 장병들의 죄악적 행위를 엄숙하게 비평하였으며 중한 민중은 호상 참살을 정지하고 매듭을 풀며 연합하여 항일할 것을 호소하였다. 따라서 각지의 공산당, 공청단조직과 중조 유지인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구하였다.
 
組織追悼會 追悼被難的中韓群衆 組織募捐隊 撫恤被難中韓群衆的家庭. 註 012  
 
판스(磐石/반석), 칭위안(淸原), 하이롱(海龙/海龍) 등지에서는 패잔병들이 한민(韓民)을 살해한 곳마다 모두 추도회를 열고 의연금 모집, 위문을 조직하였으며, 중한 청년들이 중공이 지도하는 민중항일단체-‘반제대동맹(反帝大同盟)’(후에 ‘반일회(反日會)’로 개칭)註 013에 참가할 것을 호소하고 그들을 수용하였다.
 
중한 농민과 청년들이 사업을 하는 동시에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패잔병들 속에 들어가 동북군장병의 사업도 하여 그들로 하여금 진정한 적은 일본제국주의자이지 조선 농민이 아님을 알게 하였다. 일부 ‘출로가 없다’고 생각하는 병사들에 대해서 공산당, 공청단조직에서는 그들을 항일의용군에 참가하도록 이끌었다.
 
여러 방면의 선전동원사업을 거쳐 이전에 민족갈등이 심했던 지구의 중조농민들 사이의 감정은 날로 어울리게 되었다. 일부 조선 농민들이 중국농가에 피난을 갔을때 중국 농민들은 힘껏 도와주었고 그들을 이끌어 중국의 항일지사들과 만나게 해주고 연합항일의 대계(大計)를 상론하게 했다.
 
사변폭발 후, 동북지구의 허다한 애국유지들과 항일단체들도 동분서주하며 중조 양대 민족이 단결하여 항일하는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요녕의 황시안셩(黃显声/黃顯聲), 왕통쉬안(王彤轩/王彤軒), 리춘룬(李春润/李春潤), 길림의 청윈(诚允/誠允), 펑잔하이(冯占海/馮占海/풍점해), 톈린(田霖/전림) 등은 모두가 한국독립당원을 수용하고 연합하여 항일사업에 참가하였었다. 동북민중구국회(東北民衆救國會)와 요길흑민중후원회(遼吉黑民衆後援會) 등 항일민중단체들에서도 한교항일부대(韓僑抗日部隊)를 원조하기 위하여 거액의 현금을 찬조하였다. 註 014
 
창쉐량(张学良/張學良), 왕화이(王化一) 註 015 등 동북애국장령(東北愛國將領)은 조선항일열사 안중근(安重根)의 친동생 안저근(安著根) 등을 친히 접견하고 그들의 항일 활동에 편리를 도모해 주었다. 註 016
이상의 사실들은 모두 중조항일역량이 연합에로 나아가는데 유리한 조건을 마련해 주었다.
* 안저근(安著根) ? 
 
 
註) 004 : 이 시기 동북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수에 대한 중·일·조선 각 방면의 통계수자는 같지 않다. 길림주재 일본 총영사 이시야이다로(石射猪太郞/석사저태랑)의 말에 따르면 일본 쪽의 통계는 65만 명이었다(즉 소위 간도/間島에 38만명, 기타 산쥐/산거/散居지구에 27만명). 마쯔무라다카오(松村高夫)의 저서 《일본제국주의에서 만주로의 조선인 이동에 관해서(日本帝國主義における滿洲への朝鮮人移動について)》에서는 재만 한인수가 630,982명이라고 하였다. 중국국민당쪽의 공개 문고에는 ‘백수십만’ 혹은 ‘2백만’으로 같지 않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滿洲省委) 장위(江宇)는 중앙에 올리는 보고에서 “본인이 답사한데 의하면 동북의 한인 총수는 196만 여 명”이라고 밝혔다(즉 연변 및 돈화지구 65만명, 남만 75만명, 중동로연선(中東路沿線) 및 국경 일대 27만명, 송화강유역, 이란, 치치할부터 타오난(洮南/도남)일대 20만명, 중동로 할장선연선 4만명, 흑룡강연 안 및 기타 편벽한 지구 5만명). 한국독립당인의 통계에 따르면 28만 세대에 140만명이다(중국 국적에 입적한 자가 2만 세대에 10만여 명, 입적하지 않은 자가 26만 세대에 130만명). 한민족은 일본식민당국의 계획에 따른 강박적인 이민 외에도 자동적으로 出入境한 한국애국지사와 평민백성 들이 적지 않다. 때문에 그 숫자를 정확하게 통계 낼 수 없다. 그러나 각 방면의 자료를 종합추리해 보면 약 150만 좌우였다.
 
註) 005 : 《단만주성위통지 제9호(團滿洲省委通知 第9號)》(1931년 10월).
 
註) 006: 《중공만주성위특파원길자보고 제1호(中共滿洲省委特派員吉字報吿 第一號)》(1931년 10월 2일).
 
註) 007: 《단만주성위급중한청년적신(團滿洲省委給中韓靑年的信)》(1931년 10월).
 
註) 008: 《봉천전성경무처훈령 제777호(奉天全省警務處訓令 第777號)》(1928년 6월 27일).
요녕성당안관(遼寧省檔案館), 《혁명전제당안(革命專題檔案)》 안권호(案卷號) 580.
 
註) 009 : 《단만주성위통지 제9호(團滿洲省委通知 第9號)》(1931년 10월).
註) 010 : 《중공만주성위급중앙적 보고(中共滿洲省委給中央的 報吿)》(1931년 4월 24일), 별지 〈남만특위대한민족문제적보고(南滿特委對韓國民族問題的報吿)〉.
 
註) 011 : 《중공만주성위결의(中共滿洲省委決議)》(1931년 9월 21일).
註) 012 : 《단만주성위고중한청년서(團滿洲省委告中韓靑年書)》(1931년 10월 10일).
 
註) 013 : 당시 공청단만주성위 선전부장으로 있었던 허넝(何能/하능)노인은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在火車上我聽說逃兵殺朝鮮人 我們便問爲什麽殺朝鮮人呢?據說是日本進攻瀋陽時前面都是朝鮮人殺中國人. 我們分析 這一定是日本帝國主義的陰謀 挑撥民族矛盾. 因此我們回去後便在柳河 淸原之間開了一個會並在山上印了一些宣傳品 揭穿日帝陰謀 宣傳中朝人民要團結一致抗日等等. 印完後找小學生和朝鮮小孩去淸原 柳河散發 均是在晚間進行的.” 하능, 《동북지하당(東北地下黨)·단적활동정황(團的活動情況)》(1959년 6월 18일).
 
註) 014 : 《요길흑민중후원회조각항일부대관항일람표(遼吉黑民衆後援會援助各抗日部隊款項一覽表)》를 참고.
註) 015 : 왕화이(王化一/왕화일)(1899∼1965), 즈더화(字德華), 요녕요중인(遼寧遼中人).
註) 016 : 《왕화이일기(王化一日記)》(1932년 11월 29일 ; 왕쥐(王驹/王駒)·샤위춘(邵宇春), 《동북항일민중구국회(東北抗日民衆救國會)》, 랴오닝대학출판사(遼寧大學出版社), 1991·3 소수(所收)).
 
 
Posted by civ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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