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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혁신의회와 국민부
(2) 국민부의 성립
근대사료DB > 한민족독립운동사 > 독립전쟁 > Ⅱ. 독립군의 재편과 3부의 활동 > 5. 재만독립운동단체의 민족유일당운동 > 4) 혁신의회와 국민부 > (2) 국민부의 성립
1928년 9월 지린/길림에서 개최된 3부통일회의는 자체의 내분으로 결렬되어 촉성회와 협의회로 대립되어 서로 유일당의 촉성과 군정부의 건립을 서두르고 있었다. 그해 12월 하순 촉성회측은 길림에 모여 회합을 갖고 혁신의회를 조직하였다. 이에 대하여 협의회측은 정의부의 주도아래 다시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결성하고 이듬해 3월 하순에 본격적인 새로운 군정부의 조직을 위한 회의를 가졌다. 여기에 참석한 대표는 註 048
정의부측 대표 현익철·이동림·고이허(高而虛)·최동욱(崔東旭)·이탁(李鐸)·고할신
참의부측 대표 심용준(沈龍俊)·임병무(林炳武)·유광흘(劉光屹)
신민부측 대표 이교원(李敎元)
등이었다. 본 회는 다시 3부통일회를 개최하여 통일할 것을 결의하고 곧 그해 4월 1일에는 국민부라는 새로운 군정부를 조직하고 정의부·신민부·참의부의 3부를 해체함과 동시에 책진회에 대항할 수 있는 집행위원으로 註 049
정의부측(주력) : 현익철·이웅·김이대 외 11명
참의부측(심용준파) : 심용준·이호(李虎) 외 3명
신민부측(민정파) : 송상하·독고악(獨孤岳) 외 2명
을 선임하여 총무·군무·교육·재무·지방의 각부를 담임케 하고 적극적으로 책진희의 박멸을 획책하고 있었다.
비록 촉진회측의 불참으로 전적인 통일은 되지 못했으나 당시 만주에 있는 우리 동포사회의 명제(命題)였던만큼 그 기대가 컸던 것이다. 어떻든 본 국민부는 정의부를 주축으로 하여 신민부의 민정파측과 참의부의 심용준 일파 등의 일부 세력을 통일하였는데 정의부가 추진하고 있던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은 계속 유지되는 등 정의부 체제를 계승하고 있었다. 5월 28일에는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였는데 그 조직은 다음과 같다. 註 050
중앙집행위원장 : 현익철
민사위원장 : 김이대
경제위원장 : 장승언(張承彥)
외교위원장 : 최동오(崔東旿)
군사위원장 : 이웅
교육위원장 : 고이허(崔容成)
법무위원장 : 현정경
교통위원장 : 김돈
중앙집행위원 : 김진호(金鎭浩)·심용준·이일세·이동림·황기용(黃起龍)·고할신
사령관 : 이웅(겸임)
제1중대장 : 양세봉(梁世奉)
제2중대장 : 윤환(尹桓)
제3중대장 : 이태형(李泰馨)
제4중대장 : 김창헌(金昌憲)
제5중대장 : 장철호(張結鎬)
제6중대장 : 안홍(安鴻)
제7중대장 : 차용목(車用睦)
제8중대장 : 김보국(金保國)
중앙호위대장 : 문시영(文時映)
등 중앙집행위원 14명과 8중대 중앙호위대로 군인은 1만 2천명이었다.
그해 9월 20일부터는 새로 조직된 후 처음으로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를 개최하여 수일 간에 걸쳐 장래의 방침과 제반 결의를 하고 3부 통일회에서 제정했던 강령 및 헌장의 일부를 개정하였는데 그 강령은 註 051
1. 재만 조선민족의 문화향상, 산업발전, 공안유지
2. 재만 조선민족의 단일 자치기관의 실현
3. 한·중 양민족의 혁명적 협동작업
등을 선언하였다.
아울러 27일에는 새로이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12월 20일에는 민족유일당 조직동맹을 개편하여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여 이당공작으로 무력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소속당군을 조선혁명군이라 하였다. 국민부는 민정과 군정을 구별하여 재만 동포사회의 자치 기관만을 담당하였고 군사에 관한 사항은 조선혁명군이 담당하여 민족유일당 조선혁명당의 명령에 따라 독립 전투에 헌신하였다가 1938년 9월까지 만주에서는 유일한 민족운동단체로 존속하였다.
3·1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기로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조국의 광복을 쟁취하기 위한 독립전투는 격렬하였다. 곧 상해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모든 독립운동 단체의 중핵이 되었다.
일찌기 북간도에서는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최진동(崔振東)이 이끄는 도독부(都督府)가 통일하여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라 하고 1920년 3월에는 은성(穩城) 전투의 승리와 6월에는 삼둔자(三屯子) 봉오동(鳳梧洞) 전투의 대승리를 가져 왔다. 10월 하순에는 북간도의 국민회(國民會), 군정서(軍政署), 대한독립군, 군무도독부 광복단(光復團)군, 의민단(義民團)군, 신민단(新民團)군, 군무부(軍務府:韓民會)군의 독립운동단체가 일심동체의 한 독립군으로 통일되어 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한편 이듬해 4월에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軍事統一會)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10개 단체대표가 모여 남북만주에 산재한 부대를 게릴라 부대로 편성하여 국경(國境) 방면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그 후 5월에는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하여 “군사단체를 완전히 통일해서 혈전을 꾀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만주의 독립군 단체를 통일하여 능률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함을 목적으로 대표 두 사람을 선정하여 남만주와 북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후 1922년 8월 오랜만에 남만주 7개 독립운동 단체가 통합하여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를 개최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라는 강력한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도 오래가지 못하고 1부 의용군(義勇軍)이 탈퇴하여 육군주만(陸軍駐滿) 참의부를 조직하였고 나머지 주력은 정의부를 조직하였다. 곧 이듬해 북만주 7개단체가 통합하여 신민부를 조직하니 이 3부가 만주내의 독립운동 단체의 주력이었다.
이상의 조직 하에 정의부는 재만 독립운동단체의 영도권을 장악할 목적으로 유일당 촉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유일당 조직의 근본이론에는 3파론의 논거가 있었다.
1927년 정의부는 제4회 중앙의회를 개최하고 유일당 촉성회를 속히 진전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이듬해 2월에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간부들은 회합을 갖고 3부연합회 의를 개최하기로 결의함으로서 정의부를 중심으로 한 전만주독립운동단체에서는 유일당운동이 활발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부 참의부가 참석하지 못한 채 5월 재만독립운동 단체로서 민족·공산주의를 망라한 18개 단체대표가 모인 가운데 회의가 진행되었으나 결국 기성단체의 부정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 촉성회파와 기성단체의 본위를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 협의회파로 분열되고 말았다. 즉시 촉성회측은 민족유일당 촉성회조직동맹을 조직하였다. 그러자 협의회측은 회의의 결과 재만운동단체 협의회란 규약을 정하였다. 이후 협의회의 중핵인 정의부는 유일당조직의 방침을 바꾸어 만주에서는 가장 유력한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와 참의부의 통일을 도모하여 촉성회측에 앞서서 유일당을 완성하고자 신민부와 참의부에 3부통일회담의 개최를 제의하자 그해 9월 길림에서 3부대표는 초당파적 입장에서 전민족의 숙원인 민족유일당의 조직과 3부통일등 안건을 숙의한 끝에 정의부의 과대한 주도권에 대한 반발과 신민부의 민정·군정파의 대표권 취득문제, 참의부 대표의 소환문제로 결렬되고 말았다. 이 회의를 계기로 3부는 자체의 분열이 표면화되면서 다시 독립운동단체의 정비작업이 추진됨으로써 3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정의부에서 이탈한 간부로 촉성회에 가담한 일부와 신민부의 군정파와 참의부가 완전히 촉성회에 투합할 것을 결정하여 본 단체는 과도적 임시기관으로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숙원이었던 민족유일독립당 재만책진회로 개편하여 활동하다 자체의 근거지로 돌아가므로써 무실하게 되었다.
이때 협의회측은 정의부의 주도 아래 다시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결성하고 1929년 4월 1일 국민부라는 새로운 군정부를 만들어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의 3부를 해체함과 동시에 촉성회에 대항할 수 있는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여 민족주의독립운동 단체로는 가장 늦게까지 독립전투를 한 독립군이었다.
이상에서 끝내 분열된 점을 요약해 보면
첫째, 유일당 조직의 근본 이론이 3파였다는 점
둘째, 전민족유일당 조직이 촉성회파와 협의회파로 분열된 점
세째, 3부통일회의 결렬로 혁신의회와 국민부로 분열된 점이다.
내내 전 민족의 숙원이었던 전민족유일당운동은 결국 분열되었으나 나름대로 항일독립 전투에는 빛나는 공적이 많았었다.
註 04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편, 앞 책, p.583.
註 049 慶尙北道警察部, 앞 책, p.128.
註 050 蔡根植, 앞 책, p. 149.
註 051 國史編纂委員會編, 『韓國獨立運動史』五, p.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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