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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부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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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혁명당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인 자치기관
정의부·참의부·국민부 관계 증언 기록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독립기념관)
1 삼부 통합 1차 회의
조국독립운동에 필요한 재만한인(在滿韓人)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여 일제와 항전하기 위해서는 남북만주에서 성립하여 활동하던 참의·정의·신민 삼부의 통합마저도 조속히 이룩되어야만 하였다. 더우기 일제는 3부 성립 후부터 중국 국민당정부의 무기력과 동삼성의 장쭤린/장작림 군벌의 친일적 경향을 틈타 만주침략을 보다 적극화하는 한편 한인 탄압에 전력을 기우리고 있던 터이므로 삼부통합은 보다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 동삼성(東三省) = 만주
이와 같이 삼부의 성립 초기부터 상호합작이 필요하였던 이 삼부통합 문제는 마침내 1927년 8월 정의부의 제4회 중앙위원회의 다음과 같은 결의에 의하여 구체화되었다.
1. 만주운동선통일을 위하여 신민부 참의부와의 연합을 적극적으로 도모할 것
2. 전민족운동선통일을 위하여 유일만촉성을 준비할 것
삼부통합 방법으로서 유일당을 결성하고자 한 것은 당시 국내외의 독립운동자들 사이에 공통적으로 논의되던 여론이었고, 제1차 세계대전 후 팽배한 각종 사조의 영향으로 인해 하나의 이념으로 정립된 ‘이당(以黨)공작’의 방법으로서 독립목적을 달성하려는데 있었다. 이와 같은 유일당 운동은 1926년 북경에서 ‘대독립유일당촉성회’가 결성되면서 본격화하여 그후 국내외 각지에서 유일당 운동이 활발해졌다. 그리하여 1927년에는 국내에 신간회가 결성되어 민족독립운동에 새 국면이 전개되었다.
그 후 만주 지린/길림과 판스/반석 등지에서 정의부의 주도 하에 통합의회가 몇 차례 개최되어 이 문제는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그 첫 번째가 1928년 5월 12일부터 동월 26일까지 15일 동안 정의부를 비롯한 18개 단체 대표 김동삼, 현정경 등 39명을 비롯하여, 북경에서 온 박건겸 등이 회집하여 전민족 유일당 조직을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이때 참의부 대표는 중일관헌의 심한 단속으로 중도에서 귀환하였고, 신민부 대표는 회의가 끝난 후 도착하여 다 같이 본회의에는 참석치 못하였다. 하지만 만주 각처에서 모인 여러 단체의 대표들은 구체적인 의제로 세계정세에 입각한 대일투쟁방법을 비롯하여, 유일당 결성 문제 및 그밖에 군사‧재정‧정치‧교육‧노동‧청년 등에 관한 각종 문제를 구체적인 의제로 삼고 이를 논의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다음과 같이 양분되고 말았다. 그것은 유일당 결성 방안에 대하여 ① 단체본위조직론 ② 단체중심조직론 ③ 개인본위조직론 등의 의견이 대립되자, 일부는 ‘협의회’를 나머지 일부는 ‘촉성회’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여 양측이 팽팽히 맞섰던 까닭이다. 그밖에도 이 회의에 처음부터 불참하고 ‘기성회’를 조직하려는 일부도 있었다.
‘협의회’를 주장하는 측은 단체본위 내지 단체중심조직론을 주장, 혹은 지지하는 정의부를 비롯한 약산일군조합, 다물단 등 11개 단체로, 이들은 ‘①민족 유일당을 준비한다. ②혁명선열의 유업인 조선혁명 완수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분투노력한다. ③전민족 각층에서 공통된 정치적 불평을 추출하여 민족 유일당을 집중시킨다.’는 등의 내용을 협의하여 민족해방과 독립을 최고 목표로 하고 단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촉성회’를 주장하는 측은 지방적, 파벌적 성격을 가진 기성단체의 완전해체와 개인본위조직론을 주장하는 남만청년동맹을 비롯한 북만청년총동맹 등의 7개 단체였다. 이들의 의견은 일제를 격퇴하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일체의 생활이 평등한 신국가를 건설할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양측의 주장은 15일간이나 계속된 회의에서도 끝내 타협점을 찾지 못한채 본회의는 폐회하고 말았다. 이후 양측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별개의 회합을 갖고 그들 각자의 주장을 굳히는 한편,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와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를 구성함으로써 대립은 보다 격화되었다.
2 삼부통합 2차회의
그 다음 삼부통합을 위한 제2차 회의가 협의회 측을 지지하는 정의부의 주도 하에 참의부 및 신민부의 대표들이 가담한 삼부만의 회합으로 동년 10월에 길림에서 개최되어 통합논의가 본격화될 여건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회합직후 곧 각파간의 의견대립, 신민부 대표권 시비, 참의부 대표 소환 등의 난제들이 얽혀 정식회의는 제대로 개최되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에 정의부 측은 대안으로 ‘재길운동자 간담회’를 열어 타협을 시도하였으나 이도 실패하고 말았다.
* 재길운동자간담회(在言運動者墾談會)
이와 같이 통합회의가 결렬된 이유는 첫째, 각파의 의견대립으로 신민부와 참의부 측에서는 ① 신민, 참의, 정의부를 완전히 해체할 것, ② 촉성회 대 협의회의 분규를 타파하고 전만 일반의 대당수비를 실행할 것, ③ 이주한인의 귀화를 힘써 행하고 자치권을 획득할 것을 주장한 데 대하여 정의부 측은 당시의 여러 단체를 그대로 두면서 유일당을 추진하자는 소위 단체중심조직론을 고수하여 양자가 끝내 타협을 보지 못한 것이다. 둘째, 신민부에서는 군정위원회와 민정위원회 양측이 모두 각자의 대표를 파견했던 바, 회의장에서 이들은 서로 상대방을 반동분자로 몰고 자파가 신민부의 정식대표라고 주장하였던 대표권 항쟁이라는 시비가 일어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참의부에서는 대표를 파견한 후 내분이 일어나 파견대표 전원을 소환하겠다는 대표소환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점이다. 삼부통합은 당시 모든 독립운동자들의 한결 같은 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길림회의도 이같이 분열되어 재만민족운동의 완전한 통합은 보다 어렵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린/길림에서의 삼부통합회의가 협의회와 촉성회의 대립으로 결렬된 후 양측은 유일당의 촉성과 군정부 건립이라는 각기 다른 길을 걸었다. 우선 촉성회 측은 그해 12월 하순 길림에서 회합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였다. 신민부의 군정위원회 측과 참의부의 김희산계 및 정의부에서 삼부통합회의의 결렬을 계기로 탈퇴한 김동삼, 김상덕, 김원직, 이청천계가 앞장서 추진시킨 혁신의회는 그들의 명의로 신민부와 참의부의 해체를 선언하고, 한인의 자치와 아울러, ① 대당촉성의 적극적 방조, ② 군사선후 및 적세침입 방지, ③ 합법적 중국지방자치기관 조직, ④ 잔무처리 등 4가지로 주 사업의 목표를 정하였다.
이러한 혁신의회는 통일된 군정부 건립에 그 목적이 있었으므로 존속 기간을 1년으로 한정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는 김동삼, 황학수, 지청천, 김승학 외 16명을 선출하여, 의장 김동삼을 비롯해 중앙집행위원장 김원직, 군사위원장 황학수, 군사위원 지청천, 민정위원장 김승학 등의 부서와 임원을 두었다. 또한 한인 자치를 위한 행정구역은 원참의부 관할지대를 남일구로, 원정의부 관할지대를 중일구로, 전신민부 지대를 북일구로 각각 획정하여 만주 전역을 통할하게 하였다. 이 같은 체제를 정비한 후 혁신의회는 친일파 숙청에 주력하여 1929년 5월 해체될 때까지 선민부와 한교동향회 등 일제 부용기관 파괴에 적지 않은 성과를 올렸다.
* 부용 : 독립하지 못하고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일.
촉성회 측은 위와 같이 혁신의회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이를 계승하고, 또 년래의 숙제인 민족 유일당의 결성을 완수하기 위하여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였다. 그 중앙집행위원장에는 김동삼이, 동위원에는 김좌진, 김성교 등이 각각 선임되고, 다음과 같은 방침을 정한 후 혁신의회의 표리일체가 되어 유일당 촉성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1. 일반구성분지를 책동하여 당의 집성토대에 분투진력케 할 것.
2. 조선의 혁명에 대한 이론을 전개시켜 만주운동의 내재적 모순을 정리하고 대당결성의 준비에 노력할 것.
3. 대당성립 전일지라도 과도기에 있어서 악독한 마수의 침입을 방지하고, 일면 소위 만몽침략 적극정책을 배제할 것.
한편 지린/길림에서의 삼부통합회의가 결렬된 후 정의부를 비롯하여 신민부의 민정위원회측과 참의부의 심용준 등의 협의회 측은 위의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에 대하여 통일된 자치정부의 구성과 유일당 결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3월에는 다시 길림성 내에서 정의부 대표인 이동림, 현익철, 고이처, 고유신, 최동욱, 이택, 참의부 대표인 심용준, 림병무, 유광걸, 신민부 대표인 이효원 등이 회집하여 제2차 삼부통합회의를 개최하였다. 비롯 촉성회 측의 전반적인 참석은 없었으나 삼부통합은 만주지역 민족운동의 절대 명제였던 터이므로 거듭된 토론 끝에 그해 4월 1일 새로 통합된 군정부로 ‘국민부’를 건립하였다. 이 국민부의 책진회에 대항하면서 삼부를 계승하여 재만독립운동과 자치행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국민부는 그 중앙본부를 요동성 신빈현 싱징/흥경으로 이전하고 그 해 9월 27일 제1회 중앙의회를 개최하여 군정으로부터 민정을 분리시켜 재만한인의 자치와 산업을 담당한 중추기구로 개편하였다. 즉 독립운동과 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항은 국민부의 모체에 해당되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에서 조선 혁명당과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여 추진키로 하고, 국민부는 단지 한인의 자치기관으로 독립되었던 것이다.
3 3부통합회의와 국민부
이에 따라 그 해 3월에 삼부통합회의에서 제정하였던 강령과 헌장을 개정하여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함’, ‘군사부’ 등의 문구를 삭제하고 ‘재만조선민족의 문화향상, 산업발전, 공안자위를 전적인 임무로 함’이라고만 하였다. 또 중앙 기구 중 군사부를 폐지하는 대신 공안부를 설치하고 각 요충지에는 경호국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와 같이 제1차 국민부를 조직하여 이를 한인의 자치정부로 발족케 한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은 그 후 다음 목표인 유일당 결성에 주력하였다. 이 결과 그해 9월 국민부 제1회 중앙의회의 결의를 거쳐 동년 12월까지는 유일당으로 ‘조선 혁명당’과 여기에 소속된 군대로 ‘조선 혁명군’을 편성시켰다. 조선 혁명당은 민족역량을 총집결하여 동일한 이론과 방법으로 한국의 독립혁명을 완수하겠다는 이당공작 활동을 전개해 그 후 국민부를 지지, 육성하는 유일당이 되었다.
조선 혁명당의 중앙당부는 국민부 소재재인 요동성에 두고, 이와는 별도로 길림, 흑룡강 양성에는 ‘길흑특별위원회’를 조직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 성에는 성당부를, 각 현에는 현당부 등의 하부 조직을 두어 100여개 소의 지부당이 있게 되었다. 또 이 같은 지부당은 국내에까지 확장되어 평안, 황해, 강원, 충청, 전라, 경상 각도에도 설치되어 조직부원이 들어가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중앙당부와 길흑특별위원회의 조직은 중앙부, 비서부, 조직부, 교양부, 경제부, 국제부, 민중부 등 7부, 군사위원회, 자치위원회, 선전위원회 등 3위원회로 편성되었다.
조선 혁명당의 결성과 동시에 조직된 조선 혁명군은 국민부에서 무장군대가 독립하여 혁명사업에 종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혁명군만이 무기를 휴대토록 하였으며, 또 각 대에서 대표자로 군사위원을 선임하여 혁명군의 지도 기관인 군사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성립된 조선 혁명군은 종래의 10개 부대의 편성을 7개 부대로 개편, 각지에 주둔시키는 한편 총사령에 이진선, 부사령에 양벽해, 참모장에 이웅을 각각 선임하여 만주 사변과 그를 이은 1932년 만주국 성립을 전후한 시기에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여 커다란 기록을 남겼다.
1920년 말 일군에 의한 경신참변에도 굴하지 않고 재기한 동삼성 내의 여러 항일단체와 군단은, 밖으로는 그 소속 독립군으로 항일전을 전개하는 한편, 안으로는 상호간의 통합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 결과 1922년 8월에는 남만주에 대한통의부가 결성되었고, 그 후 이를 발판으로 1925년 3월까지는 참의, 정의, 신민 등 삼부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립된 3부는 다 같이 중국 동북 지방에서 독립운동의 바탕이 되는 한인사회의 자치를 집행하는 행정기관과, 소속 독립군의 통솔, 훈련, 작전 등을 담당한 군정기관의 양면적인 성격을 갖춘 군정부였으나, 최고의 목표는 역시 ‘독립전쟁론’에 의한 조국 독립에 두고 있었다.
한편 조국독립운동에 필요한 재만한인의 모든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펴기 위해서는 남북만주에 걸쳐 각기 정립, 활동하던 참의, 정의, 신민 삼부의 완전통합마저도 조속히 이루어져야만 했다. 더욱이 일제는 삼부성립 후부터 중국 국민당 정부의 무기력과 동삼성 장작림 군벌의 친일적 경향을 틈타 만주 침략을 보다 적극화하는 한편 항일한인 탄압에 전력을 기우리고 있던 터이므로 삼부 통합은 보다 절실한 과제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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